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3화 (23/227)

#023화

레밍의 예리한 지적에 아렌은 식은 땀을 흘렸다.

‘눈에 의존하지 않아서 그런가… 더 예리한 구석이 있어.’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아렌의 나이는 영락없는 열 살 아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레밍도 착각을 한다.

아렌은 내버려 둔 채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대걸레질을 하는 레밍.

책에는 습기가 가장 큰 적이기에, 양동이를 서가 바깥에 둔 채 물기를 꼭 짠 대걸래로 몇 번이나 왕복하고 있었다.

아렌은 말을 걸었다.

레밍이 아직 맹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을 볼 수 있었네요? 안대를 끼고 있길래 저는 영락없이 장님인 줄 알았어요.”

“어차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

“제 눈은 유전병입니다. 아버지도 그러했고 할아버지도 그랬죠. 저 역시 서서히 눈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피해갈 방법은 없어요.”

‘그랬군. 그래서 10년 후쯤에는 이미…’

“증상을 호전시킬 방법은 없나요?”

“네. 물론 있죠. 눈을 덜 쓰는 거”

“…….”

“눈을 쓰면 쓸수록 점점 보이는 것이 줄어들고, 이윽고 완전히 암흑 속에 잠긴다고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역설적이었다. 계속 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보지 않아야 한다니.

“아, 전 괜찮습니다. 어릴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력으로 정말 중요한 것만 보며 살고 싶거든요.”

레밍의 말을 듣고 나니 더 화가 났다.

“…그렇게 중요한 시력인데, 고작 바닥 닦는 데 쓴다고요?”

“고작이라뇨. 이런 일을 해야 황궁 도서관에 있을 수 있는걸요. 전 만족합니다. 업무가 끝나고 틈틈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 해도요.”

하지만 아렌의 화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맹인 사서 레밍의 진가는 기억력에 있었다. 그는 한 번 본 책을 절대 잊지 않았다.

첫 번째 삶에서 레밍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른 무렵이었고, 이미 전맹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 권 넘게 읽은 책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 달달 외우는 묘기를 보였다.

누군가가 무엇을 물어도 곧잘 대답해 주는, 아렌이 기억하는 레밍은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었다.

‘만약 레밍의 시력을 청소 따위에 쓰지 않고, 더 많은 책을 담는데 쓴다면.’

오늘 온 이유는 단지,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맹인사서 레밍의 능력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렌이 알고 있던 레밍은 마음 가는 대로 독서를 했기에, 머릿속 안 도서관의 서가는 그다지 황자들에게 유용하지 않았다.

바다 건너 대륙의 동화에 가까운 모험기라던가, 이미 더 좋은 기술이 개발되어 쓰이지 않는 예전의 야금술처럼 흥미 본위의 독서로만 가득 채워넣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한정된 시력을 바닥청소같은 쓸데없는 데 쓰지 않고 황자에게 유리한 것들로만 채워 넣는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아렌이 말했다.

“실은 전, 어느 황자님의 비서관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꽤 직책있는 분이셨군요. 혹시 제가 무례했던 것이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무슨 말씀을.”

“어느 황자님 아래 계시죠?”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입니다.”

“…….”

레밍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열일곱의 황자들 중 가장 명석하고 박식하기로 소문난 황자.

당연히, 이 도서관에 단골로 드나든다.

“…그거, 정말 부럽군요. 그분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다니.”

“도서관에는 자주 오실 텐데. 그쪽도 매번 만날 수 있지 않나요?”

“아뇨. 저 같은 건 황송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걸요. 관장님께서 직접 응대하시니까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레밍의 말에선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이거 어쩌면?’

“혹시, 레온나토스 전하와 대화해 보고 싶습니까?”

레밍은 잡고 있던 대걸레까지 놓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 그런 말씀 마세요! 저같은 자가 무엄하게 어찌…”

“글쎄요.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도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

그때였다.

“레밍! 한가하게 잡담만 하다가 하루 다 보낼 거야!”

레밍의 선배 사서가 우악스레 다가왔다.

이용하는 자가 많지 않은 도서관이기에 무심코 소리를 높인 모양.

그는 레밍 옆의 열 살짜리 가신 아렌은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어쭈, 밀대까지 놓고 있겠다? 대걸레도 사치다 이거야? 그럼 맨손으로 시켜버린다?”

“아, 저기… 여기 이분이….”

“이 꼬마가 뭐!”

사서는 아렌을 몰라봤다.

매일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으니, 황궁의 정세에는 아무래도 둔한 모양.

소문 정도는 들었을지 모르지만 얼굴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아렌은 큼흠, 목을 가다듬고 허리를 쭉 폈다.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의 비서관 아렌입니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서의 예절은 저절로 주입되었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아렌이 이어 말했다.

“사서 레밍을 레온나토스 전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 그런 일개 사서를 말입니까? 아직 초짜인데다 눈도 불편한지라 별로 도움 되지 않을 텐데요.”

“그건 이쪽이 알아 할 일입니다.”

“네, 네. 물론입니다.”

사서는 완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

괴팍하다거나, 난폭하다거나 하는 특별한 소문은 없었다. 애초에 고작 열 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위험하며 까다로울까.

정말 무서운 건 그 뒤에 있는 황자.

소문에 둔한 레밍은 미처 몰랐지만, 이미 레온나토스가 여러모로 아끼는 가신이라는 소문이 황궁 내에 퍼져 있었다.

무려 내원 시종장이 직접 은면병까지 대동해 그를 잡아가려 했었고, 근위기사 더글라스가 단신으로 막아선 것은 황궁 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이어 레온나토스가 그를 두둔하기 위해 황권 경쟁을 천명했고, 그와 동시에 비서관 직책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

‘반응을 보니, 대충 이런저런 소문들을 들은 건가?’

자신에 대한 여러 소문이 돈다는 것을 아렌도 알고 있었다.

앞에 드러나지 않은 채 흑막이 되겠다는 처음의 생각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이젠 반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레온나토스를 황제로 만들려는 이상, 그 아래 가신의 주목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뒤에서 조종하는 고고한 흑막이 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방법은 있다.

‘뒤에 숨을 수 없다면, 아예 무대에 더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세우면 되니까.’

“허락해 주셨으니, 내친김에 지금 당장 소개해드리죠. 아, 레밍이 맡았던 일은 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대신해 줄 능숙한 선임이 있으니 문제없겠군요.”

“아… 제가요?”

덥석.

아렌이 건넨 밀대 자루를 얼결에 받아든 사서가 멍하니 있는 동안, 아렌과 레밍은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

아렌과 레밍이 나란히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얼른 안대를 내리게 한 아렌이었지만, 레밍은 꽤나 익숙한 듯 복도를 걸었다.

지팡이의 도움 없이, 발달한 청각만으로도 주변을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비록 점점 레밍의 발걸음이 느려졌지만, 그건 시각 탓은 아니었다.

“…저, 역시 괜히 온 걸까요?”

“왜 그러시죠?”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왜 왔냐고 물으시면… 그리고 사서는 항상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설마요. 레온나토스 전하는 반겨주실 겁니다. 고작 만나서 인사하는 것뿐인데 중립을 깨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정 신경 쓰이면 사서를 그만두면 되지 않나요?”

“그럴 순 없습니다!”

아렌이 슬쩍 흘린 말에 레밍은 화들짝 반응했다.

“왜죠?”

“전 책이 좋습니다. 사서를 못하게 되면 제가 황궁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글쎄요,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도서관은 언제든 다시 들를 수 있는 곳이고, 앞으로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면 더 좋은 것들로만 골라 채워 넣고 싶을 텐데요.”

“…….”

‘그리고, 레온나토스가 승리한다면 도서관장 자리쯤은 떼 놓은 당상이겠지.’

“지금 당장 결정하란 건 아닙니다. 일단 만나 뵙고 생각하시죠.”

아렌은 안에 기별한 후 벌컥, 황자의 방문을 열었다.

“아. 왔군, 아렌. 그리고 거기는… 자주 보던 사서로군. 무슨 일인가?”

“펴펴펴, 평강하십니까, 전하!”

레밍은 떨리는 손을 모은 뒤 고개를 떨궜다.

“으음, 반갑네.”

“…….”

“…….”

그리고, 잠시 말이 없는 둘이었다.

‘…그래, 이렇게 어색해할 줄은 알았지.’

그리고, 이 어색함을 없애는 것도 간단했다.

“흠흠! 조금 갑작스럽지만, 레온나토스 전하가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무엇입니까?”

“…재미? 재미라… 어떻게 한 권을 꼽으라 할 수 있겠나만, 지금 생각나는 건 대모험가 그랜튼의 북해항로 개척기로군. 분명-”

“마흔두 척의 배로 출항해 다섯 척만 돌아온 처절한 탐험이었죠. 그중 두 척은 출발했던 배가 아니라, 얼어붙은 땅에서 나무를 파내 현지에서 건조한 배였지요.”

레밍이 끼어들었다. 레온나토스의 시선에 호기심이 어렸다.

“…자네도 그 책을 읽은 건가? 꽤 상세히 기억하는 걸 보니 최근에 읽은 듯한데.”

“읽은 건 3년 전입니다. 한번 읽은 책은 전부 기억하고 있는지라…”

“…그게 사실이라면 놀랍군. 그럼 이 책은 읽어봤나? 프랑크 로스웰이 쓴 현대….”

“현대 해부학 말씀입니까. 신체 모든 장기는 뇌와 연결되어 있고, 영혼 역시 뇌에 담겨 있다는 이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모든 책을 기억한다는 게 허언은 아닌 듯하군. 솔직히 부럽군. 그럼 이 책은 읽어봤나?”

한번 물꼬가 터진 이상, 두 독서광 사이에 이야깃거리는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아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한번 본 책을 달달 외듯 기억하는 레밍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필요할 때 필요한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레밍 정도의 인재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들 법도 하지만, 지금은 아직 도서관의 신입 사서일 뿐이고, 초짜 티를 벗은 후에는 맹인이 되었기에 누구의 눈에도 들지 못한 것.

하지만 레밍이 레온나토스를 섬기게 되고, 레온나토스에게 도움이 되는 책들만 눈에 집어넣는다면.

‘이거 장래가 기대되는데?’

아렌은 도서관에서 자신이 빌려온 책들을 펼쳤다.

레밍에게 물어본 대로, 모두 제국의 천문학과 관련된 책들이었다.

천체 관측 기록부터 역사에 남은 천문현상들까지.

그리고, 책 맨 뒷장에 꽂힌 쪽지에는 이 책을 빌려 간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역시’

고드프리 브륀할트.

아렌이 빌린 책에는, 예외 없이 모두 제5 황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전부 최근의 기록.

“…너도 알고 있단 말이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렌.

확실한 증거도 없는 주제에, 어전회견에서의 고발에 너무도 자신만만했던 고드프리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거기서 생각이 미친 것이 고드프리가 믿는 태양교.

고드프리의 ‘믿는 구석’을 확인하기 위해 천문학 서적의 열람표를 뒤적였고, 그 결과는 적중했다.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채 아렌은 중얼거렸다.

“…꽤 성대한 어전회견이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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