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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2화 (22/227)

#022화

첫 번째 삶에서, 이미 공공연히 점술가로 활동했던 아렌과, 독실한 태양교 신자였던 제5 황자 고드프리는 곧잘 충돌했다.

유일신인 태양신이 뻔히 있는데, 사이한 미신을 믿는 건 좋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태양교는 널리 퍼져있을 뿐, 제국의 공인 종교도 아니었거니와 황궁 내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고드프리의 불만은 그저 불만인 채로 끝나는 게 보통이었고, 그렇기에 레온나토스를 사이에 둔 지리멸렬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아우님. 아우님의 진심을 의심하는 바가 아니나 그런 미신 따위를 언제까지고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빛께서 노여워하실 겁니다.]

[고작 사기꾼 따위에 이지가 어지러워진다니요. 간단히 홀려서는 안 됩니다.]

[빛을 믿으십시오. 빛이 진리로 이르는 길을 언제까지고 비추어주실 겁니다.]

반면, 아렌 역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아렌은 이대로 밀렸다간 간신히 얻은 사다리를 놓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드프리 전하께선 자신만의 빛에 가득 차 계시는군요. 너무 밝은 빛은 때때로 눈을 멀게 하지요.]

[본래 그런 분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말이 통하지 않으실 겁니다. 너무 강한 빛은 상대를 매료시키는 법이죠.]

[태양신이라, 존재할 수도 있으나 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상 믿을 수도 없지요.]

[태양교라. 태양교에선 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증명했습니까? 적어도 제 점술은 이미 여러 방면으로 증명했습니다만.]

고드프리로서는 체면 떨어지게 일개 시종을 핍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렌도 마찬가지로 황족인 고드프리에 직접 대항하는 건 무엄한 짓이었다.

둘의 신경전은 레온나토스를 끼고서만 진행되었다.

몇 년 후 고드프리가 황궁을 떠나게 되고, 그간 고드프리의 등살에 못 이겨 점술을 보기 꺼리던 황족들도 그 후 알음알음 아렌에게 점술을 부탁했다.

고드프리가 떠나고 나서 아렌의 황궁 내 입지는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 고드프리.’

고드프리는 아렌의 임명까지는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반론한 어린 시종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비서관이라. 그래도 너무 어린 것 아닙니까? 물론 레온 아우님이 굳이 비서관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총명하다지만, 적어도 철은 들어야지요.”

“저도 아렌과 같은 나이입니다, 고드프리 형님.”

“…….”

“저도 철이 들어야 합니까?”

“…이거 실례했군요. 확실히 아우님은 형제 누구보다도 철이 들었죠.”

“아렌. 너도 형님께 예의를 갖추거라.”

“죄송합니다. 단,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궁금한 것?”

아렌은, 고드프리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돌멘 전하가 살해당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라고?”

“돌멘 전하의 사인은 늑대에 의한 교상(咬傷)입니다. 가웨인 전하가 그 자리에 계셨던 것은 맞지만, 검으로 늑대의 이빨 자국까지 흉내낼 수는 없습니다.”

“흥, 그건 간단하다. 황제 폐하께선 사냥에 참가한 인원 모두에게 사나운 사냥개를 선물하지 않았나. 특히 황자를 향한 공격성이 두드러지는. 그 사냥개로 물어 죽이게 한 다음 그 곁에 미리 준비한 늑대 시체를 둔 것이다.”

“흠, 그렇군요.”

“아무튼-”

고드프리 황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자리가 어쩌면, 너무 일렀을지도요, 아우님.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고드프리는 나가려다가 뒤돌아보고 말했다.

“곧 대회견(大會見)이 있을 겁니다. 그때에 전 가웨인 형님의 죄를 고발하겠습니다.”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의혹만으로는-”

“걱정 마십시오. 아마 제 말은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고드프리가 방을 나갔다.

태양이 그려진 자주색 로브를 입은 그의 신하들 역시 뒤따라 방을 나갔다.

황궁 밖에서 온, 태양교도들이었다.

모두가 나간 후 한동안 적막만이 감도는 방.

잠시 후, 레온나토스는 작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후우! 아렌. 이건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난 태양교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우연이군요.”

첫 번째 삶에서 고드프리와 태양교는 사사건건 아렌의 일에 트집을 잡아 왔으니까.

태양교가 스스로의 발에 걸려 고꾸라지지만 않았다면 아렌은 황실의 중추로 들어가는 일 없이 외곽에서만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이 말했다.

“그와는 별개로 고드프리 전하가 한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가웨인 전하의 행적과 행실을 보았을 때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아렌, 네가 가웨인 형님을 가까이서 봤을 때는 범인이 아닐 거라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리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하지만 제 판단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기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크흠, 아렌이 헛기침하자 황자 레온나토스, 근위기사 더글라스의 이목이 아렌에게 집중되었다.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고드프리 전하가 말씀하신, 사냥개의 이빨 자국으로 늑대의 짓이라 꾸며내는 것은 가능합니까?”

“…아니, 불가능하지. 하사받은 엽견들의 이빨은 모두 갈아내었기에 살을 뭉개고 뼈를 부러뜨릴지언정 날카롭게 찢어놓지는 못해.”

고드프리는 사냥대회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대리로 보낸 부하들에게 사냥개가 사납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이빨이 뭉툭했다는 사실까지는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드프리 형님이, 범인일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의외로 정말 가웨인 전하가 범인일 수도 있고요.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령 내원 시종장 각하, 백부님이라던가.”

“동기는 차치하고라도, 가장 동원할 수단이 많은 분이시죠.”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가능성이 점점 더 늘어났다.

아렌이 말했다.

“지금 확실한 건, 곧 있을 대회견장에서 고드프리 전하께서 가웨인 전하를 고발할 거라는 겁니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 자리에서 모두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형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무모해.”

“아마 우리에게만 찾아온 건 아니겠지요. 다른 황자들에게도 방문해, 암묵적 동의를 구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그래도 쉽지 않은 길이다.

설령 고드프리의 고발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웨인은 자신의 궁인을 죽이고도 문책을 피했을 만큼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 황자다.

물론 같은 황자를 죽인 혐의가 가볍지 않지만, 확실한 물증 없이는 일축당할 게 뻔한 일.

‘…그러고 보니. 설마?’

굳이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레온나토스가 앓아누웠을 때 대회견장에서 무언가가 일어났었고, 모두가 놀랐던 것이 기억난 것이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어.’

아렌은 말없이 주머니의 카드를 꺼내 재빠르게 섞었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손.

검술의 고수인 더글라스조차 눈치 못 채는 사이, 아렌의 손은 카드 뭉치에서 특정 카드 두 개를 골랐다.

“아렌, 그건?”

“…….”

아렌은 말없이 카드 한 장을 들췄다.

앞면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색으로만 칠해진 카드였다.

“대회견장에서의 점괘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약식이지만요.”

“…이건, ‘빛’ 카드 아닌가?”

“네. 그리고 이게 두 번째 카드입니다.”

아렌이 다음에 뒤집은 카드는, 반대로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진 카드였다.

“…어둠 카드로군요.”

평소 점을 볼 때는 빼놓는 카드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아 평상적인 점괘에선 방해되는 카드기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만 다른 카드였어도 대강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을테지만.

아렌은 송구한 듯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전하. 점괘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은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지금 제 실력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점괘를 두 번 보는 것은 금기입니다.”

“이해하네. 모든 점괘가 항상 명확하지는 않을 테니.”

“…….”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레온나토스에게, 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확실히, 직책이 좋긴 좋네.”

원래라면 왜 들렀는지, 누구의 명인지 경비들이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다.

특히 제국 내의 모든 장서를 보관하는 황궁 도서관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정식으로 레온나토스 황자의 비서관이 된 이상, 아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황궁 도서관에 올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10m는 족히 될법한 높은 천장과 그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는 책장. 책장은 나무로 된 하나의 구조물이었고, 중간중간 난간과 발판이 있어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책이라도 올라가 뽑아 읽을 수 있었다.

아렌은 익숙하게 사서에게 걸어갔다.

아렌이 알고 있던 것보다 익히 어린 모습.

사서는, 안대를 한 젊은 청년이었다.

‘이때도 이미 맹인이었나, 레밍?’

“어서 오십시오. 무언가 찾으시는 책이 있습니까?”

맹인은 아렌의 발소리를 듣고 차분하게 물었다.

“실제로 기록된 천문기록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몇 가지 책을 소개해드리죠.”

레밍은 안대를 쓴 눈으로 익숙하게 종이와 목탄을 꺼내 끼적였다.

다섯 가지 책의 제목과 그 책이 꽂힌 상세한 자리의 목록.

눈을 가린 채 쓴 정갈한 글씨도 놀라웠지만,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 단번에 적어낸 실력은 다시 봐도 놀라운 지경이었다.

‘…내가 레밍을 처음 봤을 때보다 10년은 이전인데. 이때도 괴물이었군.’

사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 요구되지만 않는다면, 레온나토스의 세력에 합류시키고픈 인재였다.

“감사합니다. 아, 열람기록을 적어야 하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 오신 적 있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이크.’

도서관을 처음 찾은 사람에겐 생소할 만한 열람기록을 입에 자연스럽게 담자 레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지금 시기에, 아렌은 글을 알지 못했다.

첫 번째 삶에서 황실에 들어오게 된 후부터 여유 있을 때마다 조금씩 글을 익혔지만, 도서관에 들른 건 스무 살이 족히 지났을 시기.

그때에도 항상 먼저 글을 배워둘걸, 후회하곤 했었다.

“아니, 방문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 그러시겠죠. 죄송합니다. 찾는 분은 정해져 있는데, 왜 그리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때였다.

“레밍! 얼른 바닥 청소해!”

고요한 장서관에 어울리지 않는 고성이 들려왔고, 레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벌써 이런 시간이었군요.”

레밍은 안대를 위로 올리고, 감겨있는 눈을 떴다.

눈은, 옅은 회색이었다.

“…어, 볼 수 있어?”

당황한 아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렌이 레밍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완전히 눈이 먼 전맹이었다.

딱히 상처도 보이지 않았고 당시에도 아직 젊은 30대였기에, 아렌은 그의 맹증이 선천적인 걸로만 여겼었다.

그리고, 놀란 건 레밍도 마찬가지.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다, 눈앞의 아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렇게 어린 방문자님일 줄은…”

“뭐야, 목소리 들으면 몰라요?”

눈을 가린 채로도 소리만으로 많은 걸 알아내던 레밍이기에, 아렌은 짓궂게 물었다.

“면목 없군요. 저는 영락없이 목소리가 가늘고 키가 아주 작은, 서른은 넘은 남자를 생각했으니까요. 참 이상하군요. 보통은 잘 틀리지 않는데 말이죠.”

“…….”

점쟁이인 자신보다 더 족집게 같은 레밍의 말에, 몰래 진땀을 흘린 아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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