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비록 황권 경쟁에서 레온나토스가 열세라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황궁 안에서의 입장.
황궁의 병사, 그것도 황자의 근위병을 뽑는다는 포고령이 황도 전역에 퍼지자 나름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속속들이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그들의 실력이 황궁이 원하는 기준에 맞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
이중 옥석을 구분하는 것은 시험관들의 몫이었다.
정말 기본적인 실력만 확인하는 1차 심사가 있었고, 거기에 간단히 통과한 사람들은 의기양양하게 2차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2차 시험장 안에는 더글라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예외 없이 파김치가 되어 밖으로 나왔다.
“헉, 헉… 저게 평민 출신 근위기사 더글라스인가? 내 검은 스치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통과라고?”
“저런 괴물도 얼마 전까지 그냥 경비병이었다니… 역시 황궁이라는 건가?”
“아무리 금방 끝난다지만 대체 몇 명째 상대하고 있는 거지? 모인 사람이 백 명도 넘는데?”
더글라스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나름대로, 고향에선 고수라 불리기 충분한 자들이었다.
나름 자부할 만큼 괜찮은 실력이 있었지만, 더글라스와 몇 합 나눠본 것만으로 평생 가지고 있었던 자신감은 급격히 떨어졌다.
고작 몇 분 동안의 짧은 대련이었지만 등의 땀이 비 온 것처럼 흥건했다.
“이게 끝인가?”
하지만, 아직 다른 관문이 남아 있었다.
아직 채 땀이 식지도 않았는데,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한 명씩 다른 곳으로 불려갔다.
더글라스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안내된 건 대기실 바깥에 설치된 원뿔 모양의 천막.
“…여기로 들어가란 겁니까?”
주섬주섬, 시험 통과자는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잘 왔네. 거기 앉게나.”
그 안에는, 보라색 천을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노인이 있었다.
비록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천 사이로 삐져나온 흰 머리카락과 잔뜩 쉬어 있는 목소리, 탁자 중앙의 수정구와 사방에 놓인 촛불들은 누가 봐도 ‘나 늙은 점술가요,’ 하는 모양새였다.
“저기… 이건 대체….”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게.”
“네, 넵!”
반론을 불허하는 단호한 어조에 통과자는 절로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했다.
점술가는 천천히, 장갑을 낀 손으로 카드를 뒤집기 시작했다.
통과자의 눈에는 철저히 맨살을 가린 모습조차 영험해 보였다.
‘…뭔가 범상치 않은 분이다. 하긴, 황궁에서 직접 고용할 만한 분인데 어련할까.’
첫 번째 카드, 두 번째 카드를 연이어 뒤집은 후, 늙은 점술가는 잔뜩 쉬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었구만. 그럴만한 실력도 충분하고. 하지만 지금은 조금 기세가 꺾였군. 사실 자신이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 말이야.”
“아니, 그걸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은 출세나 돈을 위해서는 아니군. 명예를 위해… 서만도 아니고. 옳거니. 그저 실력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나 확인하고픈 간단한 이유. 향상심이로군. 맞나?”
“정말 족집게십니다!”
“그런 건 척 보면 척이지.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할텐데….”
*****
점술가는 당연히 아렌이었다.
더글라스에게 시달려 녹초가 되고, 정신적으로도 풀 죽어있는 통과자의 심중을 떠보는 것 정도는 아렌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오히려 더 큰 고역은 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제 하루 꼬박 고함을 지르는 일이었다.
모습이야 열 살 아이였지만 내용물은 황궁에서 20년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종국엔 목까지 잘린 점술가.
노인 연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 사람은… 나쁘진 않군.’
지금 아렌이 점을 빙자해 알아내고 있는 건 그 사람의 기본 성정이었다.
출세욕보다는 명예욕이 우선인 자, 경쟁심보다는 자부심이 우선인 자를 선별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아렌이 뽑은 병사가 안전하다는 보증은 없다.
근위병이 되고 난 후 변심할 수도 있고, 그때그때의 충동까지 아렌이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확률을 줄일 뿐 완벽한 건 아니었고, 아렌은 레온에게도 그리 설명했다.
[불길한 점괘를 피할 수 있듯, 점괘로 파악한 사람의 행동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그건 감안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렇겠지. 아렌 네 점괘는 최후의 거름망 정도로 생각하지.]
스무 명의 근위병을 뽑는 자리에서 스무 명 이하가 뽑힌다면 아렌이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글라스의 거름망은 느슨해서 마흔 명 정도가 추려졌고, 거의 절반가량이 아렌의 손에 의해 떨어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레온 황자. 이건 알고 있나?’
황자가 깜빡 잊고 있거나, 혹은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어쨌든 레온나토스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킬 무사들을 뽑을 최종 선별권을 덜컥, 아렌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내가 다른 생각 안 먹는 걸 고맙게 여겨, 황자.’
눈앞에 있는 통과자의 성정을 살피면서도, 아렌은 피식 웃었다.
*****
총 스무 명의 근위병이 추려졌다.
아렌의 손에 의해 탈락한 지원자들은 모두 어딜 가더라도 높은 대우를 받을 강자들이었지만, 고작 열 살짜리 아렌의 손에 의해 우수수 탈락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스무 명은, 황궁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법도를 익힌 채 근위병으로서 레온나토스의 곁을 지키게 된다.
레온나토스는 자신의 방에서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어떤가, 더글라스. 실력 좋은 자들이 모였나?”
“음,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글라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단지 실력만 본다면 황궁의 경비병과 견줄 만합니다. 그 중 좀 더 뛰어난 몇몇이 있었고요. 하지만 전하만의 근위병이니만큼 앞으로도 꾸준히 훈련해야 할 테지요.”
“훈련은 자네에게 일임하지. 내게 조금 더 명망이 있었더라면 좀 더 많은 인재가 모였을 텐데, 그러지 못해 자네를 수고스럽게 하는군.”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
더글라스가 펄쩍 뛰었지만, 레온의 말은 사실이다.
황권 경쟁에서 유력하다고 여겨지는 황자 밑에는 자연히 사람이 모인다.
문무 양면으로 빈틈이 없고 가장 맏이인 제1 황자 라이안과, 자타공인 검의 천재인 제4 황자 가웨인의 아래엔 그래서 항상 인재들이 모인다.
‘어쩔 수 없지. 아직 보여준 것 없는 후발주자인데다 저쪽엔 나이라는 훌륭한 무기까지 있으니.’
당장 제9 황자 테오드릭만 해도 꽤나 군주의 자질을 보이는 황자이지만, 이제 스물을 넘은 청년 황자들에 비하면 발언권이 적은 게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차기 황제의 자리는 자연히 지금 청년인 황자들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20년 동안은 황제가 별다른 병치레 없이 무사할 거라는 사실을.
‘뒤바뀐 역사 때문에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직 어린 레온나토스가 기반을 다질 시간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상적인 그림은 청년 황자들이 서로 반목해 힘이 분산되는 동안, 어린 후발주자들이 단합해 위를 견제하는 것.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인데…’
아렌이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
레온나토스의 방으로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
“오랜만이군요, 아우님.”
평온한 눈빛을 이쪽에 떨어뜨리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
몸에는 태양의 문양을 하고 있고, 주변의 가신들도 태양교도들이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은발에, 구김 없이 깨끗한 표정에는 한 치의 죄도 짓지 않았을 것 같은 기품이 묻어있었다.
‘…이 자가 여긴 웬일이지?’
고드프리 브륀할트. 제국의 제5 황자였다.
“최근 격조했습니다, 형님. 지금도 수도원에 계신 줄 알았는데요.”
“빛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최근에 상심한 아우가 큰 결단을 했으니, 그 용기를 북돋아 주라고 말입니다.”
고드프리는 태양 모양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고드프리는 제국에 널리 퍼져있는 태양교의 독실한 신자였고, 그만큼 황권 경쟁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 본인에게는 황권에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렌이 알기로는 고드프리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줬을 태양교는 앞으로 몇 년 후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레온나토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빛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레온나토스는 오랜만에 본 형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자주 찾아오는 형도 아니었다.
예전의 레온이었다면 그저 보기 힘든 형님의 방문을 거리낌 없이 즐겼을 테지만.
지금은 황권을 천명한 몸.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레온나토스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드프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최근 아우님께서 황권 경쟁에 참가한다고 천명하셨지요. 아우님을 응원하는 한편, 조금 놀랐습니다.”
“승산이 낮은 승부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흠, 아우님이라면 능히 잘하실 겁니다. 그런데…”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형님?”
여기서 고드프리의 눈이 진지해졌다.
“얼마 전, 돌멘 아우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황궁을 나가 태양교 수도원에 있었던 고드프리는 돌멘이 죽었다는 소식도 나중에 들은 모양이었다.
그 사냥대회마저 엽사만 덜렁 보내고 본인은 불참했었다.
고드프리는 주위를 둘러본 채, 더욱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저는 그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
“…….”
‘호오.’
아렌의 눈이 빛났다.
뜻밖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도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한껏 조심스러워진 기색이었다.
“…그게 누구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바로 가웨인 형입니다.”
“가웨인 형님이요? 설마요.”
가웨인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건 레온나토스도 의심했던 사항이지만, 여기선 의뭉스레 굴었다.
“놀라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빛이 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웨인 형님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지 않은 한, 쉬이 믿기 어렵군요.”
“증거가 있을 수 없지요. 먼저 돌멘 아우의 부하들을 현장에서 다 베어 죽였으니 증인이 없고, 늑대에 물려 죽은 걸로 했으니 물증도 없지 않습니까?”
고드프리의 말.
‘…하지만, 결국은 증거가 없다는 말 아닌가?’
의심만으로 범인으로 모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물론, 가웨인의 경우엔 그 의심이 더 커지긴 한다.
“다른 무엇보다 현장에 가웨인 형님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전부터 가웨인 형님은 난폭하고 잔혹한 구석이 있었죠. 궁인들을 모두 베어 죽인 것도 그렇고요.”
여기서 아렌은 그만 끼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베인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어린 시동이 자신의 말에 끼어들자 고드프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레온나토스 아우님. 이 녀석은 무엇입니까.”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자는 제 비서관을 맡게 된 아렌입니다.”
“비서관을요? 이런 아이가…?”
항상 어질고 사람 좋은 미소만 짓던 고드프리의 표정은 굳은 채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럴만했다.
비록 고드프리는 모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만 첫 번째 삶에서도 고드프리와 아렌은 물과 기름처럼 대립했으니까.
기분이 편치 않은 건 아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삶에선 꽤나 악연이었지, 고드프리. 이번엔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고.’
그때와는 직책부터 위치까지, 많은 것이 다른 아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