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신분.
지금 하는 말은 자칫 레온나토스의 공식 의견이 될 수도 있었으니 조심해서 말해야 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지금 누구도 범인으로 특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단정 짓지 않고 똑같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지.’
여기서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건 하수다.
아렌만큼 안색을 잘 살피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분석과 관찰, 소위 말해 ‘촉’이 좋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가요? 하지만 이곳에 들른 건 우연이 아니잖아요? 지나가는 척, 우연을 가장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단지 더글라스 경과 가웨인 전하의 대련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두 분의 대련을요?”
“네.”
방금 한 말 역시 에누리 없는 사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아렌의 눈이 연무장을 향했다.
가웨인 황자는 자신의 키만 한, 장대만큼 긴 목검을 지면과 평행하게, 눈높이에서 겨누고 있었다.
반면 더글라스는 궁에서 병사들에 가르치는, 정석적인 검술의 중단세 형세.
둘은 서서히 접근했다.
쐐액!
가웨인 황자의 장대처럼 긴 목검이 순식간에 바람을 갈랐다.
살이 베일 것처럼 검로는 매끄러웠지만, 더글라스의 반사신경 역시 천부적이었다.
목검의 끝은 상체를 뒤로 젖힌 더글라스의 이마를 스치듯 지나갔고, 더글라스는 목검이 지나가자마자 곧바로 거리를 좁혔다.
딱!
더글라스의 반격을, 가웨인은 목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막았다.
그 뒤, 수십 합이나 공방이 오고 갔다.
기다란 목검을 채찍처럼 낭창하게 휘두르는 가웨인과, 그 맹공을 침착하게 받아치며 서서히 압박해가는 더글라스.
가웨인의 실력이야 황궁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일개 경비병이었던 더글라스의 선전은, 특히 가웨인의 무사들에게 무겁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가웨인의 무사들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이거 상상 이상인데?’
대련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아렌도 조용히 감탄했다.
첫 번째 삶에서, 더글라스는 덜컥 나온 무술대회에서 갑작스레 우승한 후 등용된다.
그때 더글라스를 발탁했던 황자는 제4 황자, 가웨인.
가웨인은 본인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에, 주변의 무사들 역시 고수로만 가려 뽑았다.
그리고 그런 실력자 중에서도, 더글라스의 실력은 단연 돋보였다.
고수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가웨인이 탐을 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심지어 그때 더글라스는 이미 잦은 음주로 몸이 상한 뒤였어.’
더글라스가 무술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
그때보다 더 젊고 술도 줄인 지금의 더글라스는, 무술대회에서 우승하던 당시보다도 더 강하다.
수십 합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자, 가웨인이 장대처럼 기다란 목검을 내려놓았다.
“우리 이쯤 하는 게 어떻겠나. 더 했다간 둘 중 하나가 다칠 것만 같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배려라. 겸양이 지나치군. 아직 힘의 2할은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는 전하께서도 진심을 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전하의 무기는 목검이 진검보다 더 느리니까요.”
“…호오.”
가웨인의 장검, 백아(白牙)는 강철을 얇고 길게 벼려낸 반면, 지금 가웨인이 든 목검은 부러지지 않도록 다른 목검보다도 훨씬 두껍고 길게 만들었다.
같은 부피의 철은 당연히 나무보다 무겁다. 하지만 목검에 쓰인 나무의 양이 진검에 쓰인 철보다 훨씬 많기에, 백아와 목검의 무게 차이는 그리 나지 않는다.
백아의 길고 얇은 날은 공기마저 베어버리며 더욱더 가속한다.
가웨인이 목검으로 아무리 진심을 다하더라도 실전에서보다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까지 간파한 건가. 하지만 내가 황자가 아니고 실전이었다면 자네 또한 달랐겠지.”
“그건…”
“변명하지 않아도 되네. 어쩔 수 없겠지. 그나저나 이 황궁 안에는 더이상 내 적수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래서 검의 길이 재미있단 말이지. 안타깝지만 내 무사들 중에는 자네만큼 강한 자가 없어. 왜 내가 자네를 몰랐지?
“그야, 저도 저를 몰랐으니까요.”
“레온 녀석은 운도 좋지. 진흙 속 진주를 캐내다니.
가웨인 황자의 치하가 이어지자, 황자 주변 무사들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 눈빛은 주로 더글라스, 간혹 아렌에게 향했다.
황궁 한복판에서 설마 험한 짓을 당하겠냐마는, 괜히 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크, 한동안은 몸 좀 사릴까?’
더글라스는 겨눈 목검을 내리고 한숨 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역시 대단하시군요. 전하시라면 소문대로 언젠가 검성에도 능히 오르실 겁니다.”
“흥, 모두 그리 말한다만, 글쎄. 검성은 되겠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가웨인은 냉소했다.
“그리고, 황자인 내가 검성을 진지하게 노린다면 내 형제들만 기뻐하겠지. 네 주군도 포함해서.”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만.”
더글라스의 말문이 막혔고, 멀리서 지켜본 아렌이 확신했다.
‘여기까지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다 했으니, 이제는 물러갈 때.
아렌의 시선이 연무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보고 시온도 이해한 것 같았다.
“…흠.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대련이 보고 싶었다는 말 자체는 진실 같군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적은, 더글라스 경의 실력 선전인가요? 가웨인 전하와 호각을 이루었다는 건 황궁 최강의 무사 중 하나란 뜻이니까요. 그가 레온나토스 전하의 근위기사라는 것만으로 레온나토스 전하의 위상은 오르겠죠.”
“그것도, 목적 중 하나죠.”
시온은 가웨인의 비서관답게 제법 날카롭게 찔러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렌이 날카로움을 발휘할 차례였다.
“그런데, 가웨인 전하의 호위가 좀 안됐네요. 자신들이 지켜야 할 자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오히려 전하의 강인함에 이끌린 자들도 많으니까요. 강자에 대한 순수한 존경은 때론 어떤 충성심보다도 끈끈하고 두텁죠.”
“하긴. 그런 충성 관계도 있는 법이죠. 그렇다면 저런 자들은 전하의 어떤 명령에도 기꺼이 따르겠네요?”
“…어떤 명령도, 라니 그건 무슨 뜻이죠?”
“가령, 죽여선 안 되는 자를 죽인다거나, 하는 일 말이에요.”
“…….”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영민해도 고작 열 살, 얕볼 생각은 없었지만, 성인에 비해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말로 시온은 아렌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물론 그런 일에도 충성을 다하죠. 무슨 의도인지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별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꽤나 섬뜩하군요.”
비무를 끝낸 더글라스와 가웨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조금만 있으면 아렌과 시온, 둘만의 대화는 곧 끝난다.
“…그런데, 시온 님도 같은 생각이셨나 보네요.”
“네?”
“‘의심’이라니, 우리가 가웨인 전하의 무엇을 의심했다는 말이죠?”
“…….”
“만약 돌멘 전하를 누가 해했냐는 의심이냐면, 돌멘 전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꽤 자연스레 전제되는 것 같아서요. 분명 늑대에 물려 돌아가셨는데요.”
“그건….”
시온의 말문이 막혔다.
아렌은 곧장 눈을 앞으로 돌렸다.
이제 더글라스와 가웨인의 귀를 피할 수 없기에.
이미 더글라스와 시온에게 끌어낼 수 있는 건 전부 끌어낸 뒤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가웨인 전하.”
“출세 축하하네. 비서관 아렌. 그리고 더글라스, 다음에 또 보자고.”
“…감사합니다, 가웨인 전하. 그만 가시죠, 더글라스 경.”
“자, 잠깐만, 아렌. 잡아끌지 마!”
더글라스는 열 살짜리 아이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연무장을 나와야 했다.
연무장에서 충분히 멀어진 뒤에야, 아렌은 입을 열었다.
“어떠셨습니까. 가웨인 전하의 실력은.”
“뭐냐니, 그야 대단했지? 솔직히 가웨인 전하와 진심으로 싸웠을 때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그건 제국 전역을 뒤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장래 검성이 머지않았다는 말은 황족이기에 추켜세워주는 말이 아니란 뜻이죠. 반대로 이야기하면, 가웨인 전하와 호각을 이룬 더글라스 경의 실력 또한 그에 못지 않다는 거겠죠.”
“…설마 너, 그걸 알아보려고 대련시킨 거냐?”
“그것도 있습니다만.”
아렌은 주위를 둘러봤다. 탁 트인 공터.
투명한 옷을 입고 있거나 땅을 파고 발밑에 숨어 있지 않은 한, 누군가 몰래 엿들을 염려는 적었다.
아렌은 말했다.
“돌멘 전하를 죽인 건, 가웨인 전하가 아닐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지?!”
아렌은, 처음엔 가웨인을 의심했다.
돌멘이 죽은 현장에서 만났을 때 가웨인은 동생의 죽음에 아무렇지도 않아 했으니까.
그 자리에 우애는 없었다. 오직 철저한 능력주의만 있을 뿐.
그 능력주의의 기반에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가 뒤따라 있었다.
“멀리서 본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가웨인 전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는 걸로 보입니다. 자신의 힘에 그만큼 확신이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뭔가를 하는 건 어색하죠.”
“…….”
“범인은 아마도, 돌멘 전하에게 사주해 레온나토스 전하를 해하려던 사람일 겁니다. 가웨인 전하가 정말 레온나토스 전하를 노렸다면 다른 이의 손을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가신을 이용해 직접 움직였겠죠.”
“그건, 그럴듯하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비서관 시온은 돌멘 전하의 죽음을 타살로 알고 있어요. 범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사인을 늑대의 습격으로 꾸며낸 만큼 모른 척 의뭉스레 있는 게 더 자연스럽죠. 그렇지 않았다는 건, 자신들도 범인이 꾸며낸 판에 휘말린 걸 알고 있다는 뜻이고요.”
“…….”
가웨인과의 대련으로 더글라스의 몸은 땀 범벅이었지만, 아렌의 말을 듣는 동안 땀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더글라스의 눈은 마치 미지의 생물을 보는 듯 떨렸다. 아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체 넌, 누구지?”
마치 말하는 인형이라도 대하듯, 생경하게 묻는 더글라스.
아렌은 장난스레 농담처럼 답했다.
“알면 다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