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아렌 네 말은, 돌멘이 살해당했다 이 말이냐?”
“왜 그리 생경하게 들으십니까. 황자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지 않으십니까?”
“…….”
일개 시종에서 비서관 자리까지 올라갔다. 아렌의 태도는 더욱 거침없어졌다.
“전하를 겨냥한 독살이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멘 전하가 돌아가셨습니다. 심지어 돌멘 전하는 범인 후보 중 한 분이셨죠.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칩니다.”
그건, 아렌에겐 더욱 극명하게 다가왔다.
아렌은 원래의 역사를 알고 있다. 레온나토스가 토란을 먹고 사경을 헤매던 때, 돌멘은 사냥대회에서 죽지 않았으니까.
서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모두 원래 역사와 다르게 일어났다면, 우연이라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있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돌멘 황자의 죽음은 또다시 보이지 않는 연결을 통해 다른 쪽에서 나타날 것이다.
“…정황상 그리 생각되기 쉽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굳이 정황을 확실히 파악한 후 움직여야 할 필요는 없지요. 바로 그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니까.”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대화에, 더글라스가 머뭇머뭇 끼어들었다.
“…저기, 돌멘 전하께선 늑대에 물려 돌아가신 게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살해가 될 수 있습니까?”
더글라스의 질문에 레온과 아렌이 답했다.
“사인은 증거가 아니다. 돌멘을 죽인 것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지 않다면 사인은 당연히 조작했어야 할 테니까.”
“…혹은 늑대무리 자체가 살해 수단일 수도 있죠.”
아렌이 첨언했다.
물론, 늑대 자체가 살해 수단이었다 해도 가웨인이 혐의를 벗는 것은 아니다.
“그게 어느 쪽이든 용납할 수 없다.”
레온나토스는 차갑게 말했다.
“선대 분들의 황권 경쟁이 대단했다고는 들었지만, 내게는 먼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돌멘을 이용해 날 죽이려 하고, 실패하니 돌멘을 죽인다?”
레온나토스는 차갑고 조용하게 분노했다.
물론 황권 경쟁 중 경쟁자를 살해하는 건 왕왕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막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
대놓고 벌어지는 일이 아니거니와, 널리 일어난다고 쉬이 용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레온나토스를 보며 아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직은 순진한가. 나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하지만 그편이 아렌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엔 더 나았다.
더글라스가 물었다.
“그럼, 레온 전하께서는 누구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지금부터 의심의 방향을 좁힐 필요는 없지만. 당장 의심스러운 자는 가웨인 형님과, 내원 시종장이신 백부님이다.”
“…내원 시종장 각하 말씀입니가? 하지만 그분이 한 황자를 밀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거기에 답한 건 아렌이었다.
“그것도 모르지요. 어쩌면, 시종장께서도 다른 황자를 몰래 지지하고 있을지도요.”
가웨인은 돌멘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증인이 될만한 돌멘의 가신들을 전부 베어버렸다.
내원 시종장은 가웨인에 비해 혐의가 약하나, 아렌이 이것저것 정보를 모으는 것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무언가가 걸리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 답 나온 것 아닌가요?”
더글라스는 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저희에겐 족집게 같은 아렌의 점이 있지 않습니까! 후보도 두 명이겠다 누가 더 범인에 가까운지만 점쳐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
아렌으로선 피하고 싶은 방향이었다.
자신도 답을 모르고, 얼버무릴 수도 없는 류의 질문.
점이 완벽하지 않다고 둘러낼 수도 있겠지만, 그 변명들이 쌓이면 ‘신통방통한 점술가’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평범한 점술가만 남게 된다.
“흠, 나쁘지 않군. 이쪽이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패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레온나토스까지 거기에 동조했고, 아렌은 조심스레 반박했다.
“…하오나 전하. 점술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겠지. 하지만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조사하는지는 가능해.”
“네. 하오나, 지금은 더 급한 것이 있습니다.”
기왕 레온나토스의 비서관이 되었다. 화제를 돌림과 동시에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을 주지시킨다.
“필요한 것?”
“바로 병사들입니다. 황궁에서 내려준 자들이 아니라, 전하에게만 충성하는 자들 말입니다.”
내원 시종장이 은면병을 대동하고 압박해왔을 때, 아렌의 앞을 막아 세운 건 더글라스 뿐이었다.
황자의 방문 앞에도 몇 명의 경비병이 있었지만, 감히 내원 시종장의 은면병을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뿐.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경비병은 황궁에 충성하고, 황궁에서 내원 시종장은 레온나토스보다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다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레온나토스는 자신만의 병사가 없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더글라스도 찬성했다.
“그것은 저도 동감입니다. 곧바로 쓸만한 자들이 모이지는 않겠지만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게 준비해야죠.”
가신 둘이 찬성하자 레온나토스 역시 근위병을 뽑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실력만 있다고 아무나 황자의 곁에 둘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새로 들어온 근위병의 본심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다른 황자나 세력이 심어둔 첩자일 수도 있다. 그럴 땐 내부의 적으로 두고두고 우환이 될 터.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자신 있는 아렌이었다.
“그리고, 선발된 인원들을 제가 하나하나 점을 보는 겁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테지요.”
“…과연. 그것은 든든하구나. 그런데 아렌. 점괘로 범인을 추리는 데는 쓸 수 없지만 믿을 수 있는 병사는 가려낼 수 있나. 그 차이가 어디에 있나.”
레온나토스의 예리한 지적이었다.
“점술의 대상이 제 물음에 얼마나 진지하느냐의 차이지요. 가웨인 전하나 내원 시종장 각하 두 분 다 제가 점 볼 수 없는 위치지 않습니까.”
사실은, 아렌이 내원 시종장이나 가웨인을 앞에 두고 수많은 질문을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다면 누가 범인인지 가려낼 수 있을지 모른다.
신통력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표정변화나 지표 등을 통해서.
그러지 못하기에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아니, 잠깐만. 정말 그런가?’
똑똑.
“간단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전하.”
먼저 조리실로 달려갔던 멜로익이 간이 슴슴하게 간이 된 고기죽을 들고 왔다. 오랫동안 굶주린 위장을 자극하지 않고 감싸줄 것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조금 피곤하군. 조금 먹고 쉬어야겠어.”
“네. 지금은 푹 쉬시지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레온나토스가 일어나 요기를 하는 동안 아렌과 더글라스는 방에서 나왔다.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금방 기력을 되찾겠지.’
“더글라스. 조만간 저랑 어디 같이 좀 갈까요?”
“응? 가다니, 어딜?”
아렌은 씩, 웃었다.
“그런 데 있어요. 좋은 곳.”
*****
얼마 뒤 사실상 황권 도전을 천명한 레온나토스 황자가, 자신의 근위병 스물을 뽑는다고 공표했다.
황도 전역에 공고문이 붙었고, 황궁 안에서도 레온나토스 주변에 이목이 쏠렸다.
물론 아직 어린데 서두른다,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그리고 그 어린 황자의 근위기사와 열 살짜리 비서관이, 나란히 황궁의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기, 아렌.”
“왜 그러시죠?”
“네가 가자니 따라는 가고 있다만. 슬슬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연무장에는 왜 가냐 말이지.”
“그야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순 없으니까요.”
“…….”
아렌의 말은 지나치게 짧았기에 더글라스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더글라스는 끙끙대면서도, 아렌을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우리가 참새라 이 말이지. 그럼 뭐가 방앗간이냐?”
“틀렸습니다.”
“이익, 틀렸다니, 뭐가!”
“저희가, 정확히는 더글라스 경이 방앗간이거든요.”
“…그럼 참새는 대체-”
더글라스의 목소리는 도중에 끊어졌다.
어느새 도착한 연무장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근위기사 더글라스 경.”
“…가웨인 전하. 평강하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훈련 중이었는지 웃통을 벗은 채 땀에 흠뻑 젖은, 흰 장발을 산발한 황자, 가웨인이었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 미처 말하지 못했네. 아버지가 붙여준 호위기사를, 검 없이 메다꽂았다면서. 대단하군.”
“그땐 정신없이 마구잡이로 한지라, 반쯤은 우연입니다.”
“그럼 반쯤은 실력이란 말이지. 우연으로 황자의 호위기사를 메다꽂을 수는 없는 법이니. 어떤가. 마침 이런 곳에서 마주쳤는데, 한번 검이라도 나눠보지 않겠나?”
참새가, 방앗간에 꼬였다.
“…영광입니다.”
‘이래서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거군. 아렌 녀석.’
더글라스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더글라스에게 조금이라도 귀띔이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자연스럽지는 못 했을 터였다.
비록 더글라스와 가웨인 사이의 대련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더글라스로서도 나쁠 것 없었다.
가웨인은 황족이지만, 동시에 차후 검성에도 오를 거라 일컬어지는 재능의 소유자.
황궁에서도 가웨인보다 강한 자는 손에 꼽으니만큼 더글라스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절호의 기회였다.
둘이 다소 기쁜 듯 목검을 가지고 연무장 중앙으로 향할 때.
아렌은 연무장 외곽에 앉았다.
‘가웨인에게 점을 보게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걸 시킬 수는 있지.’
대련.
고수끼리는 서로 대련할 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마치 오랫동안 알던 사이와 대화한 기분을 받는다고 한다.
그건, 아렌에게 그리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
아렌 역시 목소리로 된 언어 외에도 표정이나 몸짓, 시선 등으로 상대를 알아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련이 몸으로 하는 대화라면 그것을 관찰하는 아렌이 얻어낼 것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마 슬슬 올 텐데.’
둘 사이의 대련이 시작되려는 찰나.
“여기, 실례해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아렌의 허락에 긴 머리를 땋아 올린 30대 초반의 여성이 아렌 옆에 앉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제4 황자 가웨인의 비서관, 시온.
‘왔군.’
“감사합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레온나토스 전하의 비서장이 되셨다고요.”
“제 역량에 비해 너무도 과분한 직책을 주셨죠. 부담이 큽니다.”
“글쎄요. 나이가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죠. 제가 가웨인 전하께 임명되었던 때도 갓 스무 살이 넘었을 때니까요.”
시온은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에는 어딘가 핥는 듯한 끈적끈적한 구석이 있었다.
사람을 탐색하는 듯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
역시 유력한 황권 주자 가웨인의 가신다웠다.
시온이 말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생각이 깊으신 분이죠. 스스로의 생각을 보좌하는 것보다는, 곁에서 발맞춰갈 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곁에 영민하고 마음맞는 동갑내기 시종이 있다면 그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역시 제법인데. 정답에 가까워.’
“그리고, 이곳에 굳이 찾아온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가웨인 전하를 의심하고 계신 거죠?”
“…….”
차라리 아렌의 나이를 보고 방심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온은 아렌을 조금도 깔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여기서 사실대로 가웨인을 의심한다고 말하면 사교적 결례가 되고, 의심하지 않는다 하면 거짓에 거짓을 이어나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와서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겠죠?”
말하면서도, 아렌은 시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더글라스를 보고 달려든 가웨인 역시 참새.
하지만, 방앗간을 보고 달려든 더 큰 참새는 따로 있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분명 인사하러 올 줄 알았지.’
가웨인을 눈앞에 두고 이것저것 캐묻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웨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는 시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온과 아렌의 시선이 교차했다.
우수한 비서관 시온이었지만, 자신이 아렌을 관찰하는 이상으로 반대로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