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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8화 (18/227)

#018화

“…내원 시종장 각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예상치 못한 등장에 더글라스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를 보고, 내원 시종장 브레만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황궁을 달궜던 근위기사 더글라스를 향한 정중한 경의였지만, 또한 자신에게 더 큰 권위가 있기에 나오는 행동이기도 했다.

“최근 더글라스 경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더군요. 이번 레온나토스 전하의 근위기사가 된 것,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내원 시종장 각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십니까?”

정중한 물음.

하지만 더글라스는 레온나토스의 방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시종장 쪽에는 열두 명의 은면병(銀面兵)이 있었지만, 전혀 물러서지 않을 기세.

물론 제아무리 더글라스라도 은면병 열둘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싸워서도 안 되고.

“혹 전하의 병문안 오신 것이라면, 아직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편찮으십니다. 다른 분을 만날 상태가 아닌 줄 압니다.”

“괜찮습니다. 다름 아니라, 오늘의 볼일은 여기에 있으니까요.”

내원 시종장의 부드러운 시선이 아렌을 향했다. 그것도 이미 예상한바.

아렌도 지지 않고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시종, 아렌을 잠시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즉답.

그리고 더글라스는 무엄하게도 내원 시종장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제가 아는바, 시종 아렌은 레온나토스 전하의 충실한 가신입니다. 레온나토스 전하의 명이 있지 않은 한, 전 레온나토스 전하를 위해 시종 아렌을 지킬 것입니다.”

“…호오. 근위기사께서도 이 시종꼬마를 꽤나 높이 보시는군요. 언제부터….”

“내원 시종장 각하. 절 데려가는 명목이 무엇입니까.”

시종장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더글라스로 향하는 걸 막기 위해, 아렌이 물었다.

“분명 경고했을 터다, 시종 아렌. 황자 전하께서 편찮으신 동안 네가 할 것은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지, 고망쥐처럼 쏘다니며 정보를 그러모으는 게 아니라고 말야. 네가 누군가에게 정보를 넘겨받는 것을 봤다는 서로 다른 첩보가 몇이나 있었다. 시종 단독으로 할 행동으로는 지나친 월권행위야.”

시종장의 손짓과 함께 은도금된 가면으로 표정을 가린 은면병이 사방에서 다가왔다.

더글라스가 아렌을 뒤로 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다가오지 마십시오. 제 방침은 변함없습니다. 전하께서 일어나시기 전까지, 전 아렌을 지킬 겁니다.”

“괜한 일입니다, 더글라스 경. 제게는 무력을 동원해 아렌을 데려갈 충분한 명분과 권한이 있습니다. 물론,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지. 그 말인즉 이곳에서 서로의 무력이 충돌한다 해도 잘잘못이 가려질 사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의 숫자의 병사라면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버거울 테지요.”

“은면병이 일당백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히려 잘 되었군요. 주변에선 제가 강하다, 세다 하지만 실은 전 제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거든요. 이참에 좋은 시험이 되겠군요.”

‘…이런.’

더글라스와 은면병의 충돌은, 아렌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글라스가 무리한 싸움 끝에 다치기라도 한다면, 아렌이 기껏 구해온 인재가 쓸모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완고했다.

“걱정 마라, 아렌. 넌 내 은인이기도 하니까. 전하의 명이 내려진다면 또 모를까,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호오. 그 시종이, 근위기사의 은인이라?”

‘이런!’

더글라스가 아렌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오히려 내원 시종장의 관심을 끌고 말았다.

아렌이 더 의심을 사게 하는 역효과일 뿐.

시종장의 관심이 거기에 쏠리지 않도록 아렌은 물었다.

“절 소환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소환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면 전과 같이 아렌 혼자 내원으로 불러내면 그만이었다.

아렌 혼자 몸으로 내원에 들어가면, 그 순간 아렌에겐 저항할 방도가 없으니까.

내원 시종장은 어디까지나, 황궁의 법률대로 아렌을 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궁 내원만을 지키는 은면병을 대거 동원해 주위의 시선을 화려하게 잡아끄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내원 시종장은 주위 모두 들으라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하나. 황자를 모셔야 하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밖을 나다녔으니 이는 직무 방기이고. 하나. 독자적으로 황궁 내에서 정보를 모았으니 이는 음모의 소지가 있으며. 하나. 고작 열 살의 나이에 이만한 행동력이라면 그 뒷배가 의심되는바. 비록 죄를 지었다고 확정된 것은 없으나 의심을 사기엔 충분하니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

“…….”

내원 시종장의 주장은 정당했다.

아렌을 지키던 더글라스의 기세가 조금 약해졌다.

‘그쯤 됐어, 더글라스.’

내원 시종장에 잡혀가는 것도 아렌의 계획 중 하나였다.

“…저게 사실이냐?”

말없이 내원 시종장을 향해 몇 걸음 내디딘 아렌은, 문득 뒤돌아보고 말했다.

“전하께서 일어나시면, 늦게라도 내가 붙잡혀갔다고 말해 주겠어요?”

“…괜찮겠냐?”

“하는 수 없잖아요? 더글라스가 저 은면병을 모두 물리치더라도, 그 후에 더 많은 은면병이 몰려올 뿐이에요.”

“…….”

아무리 고수라도 더글라스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인재도 중요하지만 세력도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에 더글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렌이 순순히 오라를 받으려 할 때쯤이었다.

“-대체 누가 날 쥐고 흔들었단 말입니까.”

“…….”

“…….”

조금 잠겨 있지만, 의지가 또렷한 목소리가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 들려왔고, 좌중은 단번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

방문을 열고 나온 건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였다.

비록 오랫동안 누워있었기에 조금 수척해져 있었지만, 그 눈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

황자의 등장에 표정을 숨긴 은면병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고, 내원 시종장 역시 간단한 예로 레온나토스를 맞았다.

“레온나토스 전하. 쾌차하신 것입니까.”

“내원 시종장님.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제 문안으로 들르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외원까지 은면병을 대동하다니요.”

“방 안에서, 다 듣고 계셨습니까?”

“네. 저 들으라는 듯 아주 큰 소리로 말씀하셨으니까요.”

“허허허.”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레온나토스의 총기가 퍽 기특한 듯한 시종장이었다.

하지만, 일은 일.

“하오나 레온 전하. 전하께서 칩거해 계신 동안 저 시종은 무단으로 자신의 권한 이상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요즘같이 뒤숭숭한 때에는 그것만으로도 죄입니다.”

“무단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네?”

아렌은 내원 시종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테오드릭과 내원에 불려갔을 때, 높은 단상 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지도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말씀 그대로, 전 아렌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은 없습니다. 자신의 자의적 행동이었죠. 하지만 아렌은 자신이 모은 정보를 항상 제게 보고했습니다. 저는 그 행동을 말리지 않았고요.”

“…….”

“이건, 제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레온나토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렌이 이곳저곳에서 그러모은 정보들은, 레온나토스가 듣든 듣지 않든 모두 레온에게 보고했다.

분명 자신의 행동에 수사망이 좁혀올 것이고, 문제시될 것이기에.

그때 아렌의 행동을 레온나토스가 알고 있었고 묵인했다면.

그 순간 아렌의 정보수집은 죄가 되지 않는다. 황자의 황권 경쟁의 연장선상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렌은 속으로 웃었다.

‘이번은 내게 좋게 풀렸군, 내원 시종장. 덕분에 당분간은 눈치 안 보고 활동할 수 있겠어.’

“…확실히 말씀대로군요. 하지만 고작 열 살의 아이가 저토록 심계가 깊은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도 열 살입니다, 시종장님.”

“…….”

“또한 심계가 깊은 가신이라면 주군으로선 응당 기꺼워해야 할 일입니다. 고작 가신의 심계에 놀아날 주군이라면 주군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그 또한 그렇군요.”

보기 드문 내원 시종장의 외원 행차.

흔치 않은 일을 보기 위해 주위엔 궁인 여럿이 모여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은면병과 그 뒤쪽, 여러 궁인들을 돌아본 후 말했다.

“이참에 공표하겠습니다.”

“공표요?”

“저,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는 시종 아렌을 정식으로 제 비서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

‘어이, 레온 황자.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냐?’

아렌은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비서관은 말 그대로, 주군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직책.

황제의 비서관 역할을 내원 시종장이 겸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고작 열 살짜리 시종이 비서관직을 맡는다는 건 파격 중 파격이었다.

하지만, 아렌이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비서관이라는 자리는 보통, 황자의 대외활동이 적극적이지 않다면 딱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서관을 뽑는다는 건 곧 황자의 활발한 대외활동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황권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

레온나토스가 자신을 두둔해 줄 것은 예상한 바였지만, 지금 이 전개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렌은 몰래 미소 지었다.

비록 뜻밖이라고는 하나, 나쁜 뜻밖은 아니었으니까.

‘아직은 내가 점술가라는 걸 몰라. 벼락출세한 궁인으로 주목받으면, 점술가라는 사실은 더 숨길 수 있겠지.’

뒤에 숨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앞에 당당히 드러남으로써 더 숨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아렌은 알고 있었다.

*****

내원 시종장이 물러가고, 레온나토스는 다시 비척비척,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기에 온몸에 힘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멜로익이 얼른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하러 뛰어갔고, 레오나토스는 풀썩 자신의 침대에 앉았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어떤가, 아렌. 내가 좀 서둘렀을까?”

“그보다 훌륭한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감격했습니다.”

“내가 왜 서두르면서까지 널 구해줬는지 알겠나?”

“…놀라긴 했습니다, 전하. 갑자기 비서관이라니, 절 어디까지 출세시켜주실 생각이십니까?”

아렌이 조금 농을 섞어 물었다. 황자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흠, 출세라. 그러나 도약이 크면 그만큼 추락도 큰 편이지. 널 구해준 이유는, 네가 유능한 말이 되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능한 말 말씀입니까.”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삶에서 친밀하게 지낸 레온나토스 황자에게 호감이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를 이용해 자신이 황궁의 흑막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그런데, 네가 날 섬기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

“…….”

여기선 입바른 말로 능숙하게 속여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약간의 진심을 보이는 것이 도움 될 때도 있다.

“그건, 전하께서는 능히 높은 곳에 올라가실 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매가 높이 날수록, 매에 붙은 벼룩도 같이 올라가는 법이지요.”

“하하, 벼룩이라.”

레온나토스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참으로 심계 높은 벼룩이구나. 하지만 그 매가 끝내 추락한다면, 벼룩의 끝 역시 비참할 거다.”

“벼룩도 당연히 각오하지 않았을까요?”

선대의 황자들, 현 황제 브륀할트 8세와 형제였던 황자들은 대부분 황도에 없었다.

브륀할트 8세와 황권을 경쟁했던 자들은 모두 유폐에 가깝게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고, 지지했던 황자들 역시 좋은 조건을 받들어 기꺼이 지방이나 황도 가까운 소도시의 관직을 맡고 있다.

내원 시종장 브레만 만은 황족으로서 황제의 곁에 남았지만, 자손을 남기지 않겠다는 증표로 스스로 거세를 했을 정도로.

브륀할트 8세의 경우가 더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처럼 황권 경쟁의 결과에 따라 황자들의 명암 역시 극명하게 나뉜다.

“본디 대부분의 경쟁은 승자가 독식하는 법이죠. 싸워보지도 않고 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어차피 한번 목이 잘려본 몸이었으니까. 아렌은 거칠 것 없었다.

“그럼, 황자의 비서관으로 임명된 아렌은 기념할만한 첫 임무로 무엇을 할 건가? 자율권을 주지.”

아렌이 말했다.

“먼저, 돌멘 황자를 살해한 진범부터 찾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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