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7화 (17/227)

#017화

내원 시종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호오, 보통내기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어린 녀석이 제법이군.”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 내원 시종장과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 내원의, 모든 가신들을 관리하는 시종장.

사람을 가려내는 눈썰미는 황궁 안에서 제일이라 봐도 무방했고, 한번 그의 눈에 뜨인 이상 괜한 연기로 몸을 낮춰봤자 역효과만 살 뿐이다.

‘내 목이 달아날지 아닐지는 여기서 결정되겠지.’

“방금 네 질문에 답하자면, 난 언제나 황제 폐하의 편이지만, 모든 일에 일일이 폐하의 허락을 받는 건 아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

즉, 자신의 독단이지만 황제에게 거리낄 것도 없다는 말.

하지만 아렌이 황제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 처지니 시종장의 말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아렌은 고개를 숙였다.

“시종장님께서 제게 해 주신 제안은 너무도 황송합니다만, 전 절 발탁해주신 레온나토스 전하께 아직 은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레온 전하를 위한 길이라 하더라도, 전하께 숨기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흠, 그 이유뿐인가?”

“…….”

아렌은 분위기를 읽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라, 이건가?’

“그리고, 레온 전하께선 능히 제왕에 오르실 분이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흐음, 확률이 낮긴 하지만, 이길만한 패이기는 하다, 이건가. 훨씬 솔직하군.”

시종장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아렌은 거절했다.

아쉬울 수도 있지만, 아렌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 목이 잘린 몸이다. 평온하고 미적지근한 길을 갈거면 얼마든지 다른 길도 있었어.’

“하지만, 역시 아쉽군. 자네 정도로 영민하다면 내원에서도 꽤 괜찮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텐데. 나이도 어리니 부족한 부분은 지금부터 교육하면 될 테고.”

“…좋게 봐주셔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렌은 이미 판단이 섰다.

아무리 떡잎부터 다르다지만 고작 열 살짜리 시동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미사여구가 많았다.

‘…날 의심하고 있나? 레온나토스 옆에서 떼어놓고, 곁에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

지금으로선, 내원 시종장의 진의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할 때였다.

시종장의 제안도 거절했으니, 아렌은 물러날 시기만 엿보고 있었다.

“아, 그렇지.”

문득 생각난 듯 시종장이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어리지만 현명한 시종에게 선물을 하나 해야겠지.”

“선물, 말씀입니까.”

“그래, 선물.”

하지만 내원 시종장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내원 시종장이 말한 선물은, 그가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알다시피 난 내원 안에 있는 모든 시종과 가신들을 관리한다. 하지만 내원에서 ‘밖’으로 나가 있는 가신들은 다르지.”

“그 말뜻은….”

“수많은 예외들이 있지만 그중 ‘황제의 귀’와 ‘암살 시종’이 대표적인 예겠군. 나조차 누가 황제의 귀이고 암살 시종인지, 알지 못한다. 그건 극비여야만 가치가 있고, 따라서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시니까.”

“…….”

‘그 말을 하필이면 왜, 지금 나한테?’

너무 공교로웠다.

‘황제의 귀’와 ‘암살 시종’.

각각 멜로익과 아라흐네, 둘 다 아렌이 접촉하고 반쯤 포섭한 자들이었다.

“암살 시종은 대상의 호위를 명 받는 순간, 폐하와의 연락도 끊어진 채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어떤 추가 지휘도 받지 않고 단독으로 수십 년씩이나 활동하니, 때론 두 암살 시종이 바로 곁에서 활동해도 서로가 암살 시종이었는지는 모를 거야.”

“…….”

“그건 ‘황제의 귀’ 역시 마찬가지지. 궁 안에서 정보는 그것만으로 권력이니까. 누군가 중간에 가로채면 안 되니 누가 황제의 귀인지는 극비 중의 극비란 말일세. 그리고, 그럴 이유가 없는 시종이 내원에 들락날락하면 당연히 주목받겠지.”

‘…설마-’

내원 시종장의 미소는 미지근한 물에 먹물 한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서서히 뭉근하게 번져나갔다.

“내가 자네라면 이런 때에야말로 괜한 오해 사지 않게 조심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내원 시종장의 나가도 좋다는 말에, 아렌은 평정심을 쥐어 짜내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외원으로 이어진 거대한 문을 나오면서 아렌은 생각했다.

‘…한 방 먹었군.’

시종장이 한 말은 명백히 아렌을 저격한 말들이었다.

암살 시종과 황제의 귀와 접촉한 것도, 시종장이 어떤 경로로든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어린 시종을 혼자 내원으로 부르다니, 황제의 귀로 의심을 사기에 딱 좋군. 이목도 꽤나 끌렸을 테고.’

이래선 앞으로 아렌의 움직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뭔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알고 있는 건 황제의 눈과 암살 시종과 접촉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정도. 그럼에도 굳이 불러 확인한다는 것은, 내가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당히 하라, 이건가?’

그리고, 이렇게 이목이 쏠린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아렌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금방 발각될 위험도 컸다.

‘만약 황자를 점술로 현혹하고, 더 나아가 조종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서걱.

기시감과 함께, 아렌은 서늘한 뒷목을 쓰다듬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서른에 목이 잘렸는데, 고작 열 살에 목이 잘릴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부터 점술이 밝혀졌는데도 아렌이 첫 번째 삶에서 오랫동안 무사할 수 있었던 건, 황실이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했기 때문에.

물론 물밑에서 어떤 음모와 투쟁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이 서른이 되기 전 죽은 황자는 없었다.

‘…레온나토스를 구한 게, 이렇게 영향이 크다고?’

아렌은 단지 사소한 부분부터 조금씩 만져가며 레온나토스의 입지를 다져가고 싶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급류에 올라탄 기분이다.

“그럴 바에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지금 움직이면 의심을 산다고?”

아렌의 의복 아래로 식은땀이 점점 스며 나왔다.

기분 나쁜 후덥지근한 공기가 점점 옥죄어오는 듯한 불쾌한 감각.

외통수에라도 몰린 기분이었다.

지금 아렌이 움직인다면 내원 시종장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당장은 안전할지 몰라도 예전의 삶의 반복이다.

‘…그럴 순 없지.’

아렌은 흑옥 반지를 쓰다듬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뜨뜻미지근하게 살다가 누구의 짓인지도 모를 누명으로 목이 잘렸다.

아렌이 되살아난 후, 몇 번이고 되새김질한 다짐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이제는,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휘두르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

“아라흐네. 먼저 와 있었네?”

황궁의 으슥한 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아라흐네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라흐네를 만나자마자 아렌은 스리슬쩍 말을 놓았지만, 기가 완전히 죽은 아라흐네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먼젓번의 사냥대회에서 아렌은 철과 붉은색을 피하라고 말했고, 그렇지 않으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거라 했다.

그 말은, 결과적으로 들어맞았다.

“…역시 불길한 사냥이었잖아요! 그걸 황자님도 미리 알았더라면…”

비록 사냥대회는 황자 돌멘이 죽고 그 시종들까지 무참히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아라흐네는 별 탈 없이 무사했다.

아렌의 말대로 철과 붉은색, 네발짐승을 멀리하든 안 하든 아라흐네가 휘말릴 일은 없었겠지만, 미신을 철저히 지킨 사람은 자연스레 자신의 안전이 미신 덕이라 믿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을 애매모호한 점괘에 끼워 넣게 마련.

“돌멘 전하는 늑대에 돌아가셨고, 돌멘 전하의 시종들은 가웨인 전하의 칼에 맞아 죽었죠. 현장은 온통 피바다였다고 하고요. 모두 점괘 대로에요!”

동서고금 막론하고 통용되는 점술의 본질이었다.

“괜찮았으면, 이번에도 ‘복채’를 주겠어?”

아렌이 아라흐네에게 받는 ‘복채’는 곧 정보를 뜻했다.

점술로서 아라흐네의 고민 상담과 그럴듯한 해결책을 주면, 아라흐네는 황궁 곳곳의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라흐네로서는 언제고 복채를 안 주면 그만. 하지만 그 순간 아렌의 신묘한 점괘는 더는 들을 수 없게 된다.

사냥대회의 여파로 더욱더 점술에 빠져든 아라흐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시종장, 당신도 제법이긴 하지만. 나도 폼으로 20년이나 황가를 주무른 건 아니거든?’

아렌은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여러 구석으로 정보를 그러모았고, 황자가 죽고 황실 전체가 숨죽인 지금 아렌의 행동은 더욱 튀어 보였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아라흐네는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너무 자주 불러내는 거 아니에요? 들키면 끝장인 거는 알고 있죠?”

“그야, 안 들키면 되는 것 아냐?”

“…됐고, 제 운세는요?”

“일주일간 행운의 색깔은 노란색. 파란색은 멀리하고, 찬 음식보다는 따듯한 음식을 먹어.”

“…그거뿐이에요?”

“이걸로 부족해? 싫으면-”

“아니, 아니에요!”

황궁 내의 극적인 사건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아라흐네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것뿐.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나저나, 사냥개를 조련한 곳은 왜 묻는 거예요? 나 참…”

투덜대면서도 아라흐네는 황제의 귀로서, 자신에게 절로 흘러들어온 정보 중 일부를 말한다.

용건만 간단히 한 후 이대로 돌아가려는 때.

“요즘, 위험한 거 알죠?”

“그야 알지.”

지금 아라흐네와 아렌이 하는 일은 극형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고, 만약 아라흐네가 붙잡히면 아렌은 딱 잡아 뗄 생각이었다.

아라흐네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

조금 딱하긴 하지만,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을 배신한 건 아라흐네였으니 복수 대신 이 정도로 험하게 다루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특히나 아렌 당신한테는 최근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어요. 주인 명령도 아닌데 필요 없는 정보를 그러모은다고.”

레온나토스가 며칠간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궁 내에 유명하다.

“아, 소문이 드디어 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혹시 걸리더라도, 내 이름은 대지 않기에요?”

“걱정 마, 댈 이름은 따로 있으니까.”

아라흐네의 걱정은, 자신의 신변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렌은 대답 대신 말했다.

“너야말로 괜찮아? 지금 밟고 있는 거, 파란색 타일인데.”

“히익!”

*****

독서를 좋아하기에 밤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던 레온나토스의 방은, 대낮인데도 창을 장막으로 가려 어두컴컴했다.

레온나토스는 벌써 며칠째 동면하듯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렌이 침대로 다가갔다.

“전하.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

레온나토스의 대꾸는 없었다. 아렌은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전하를 노리고 음식에 토란을 섞은 자는 분명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목숨까지 노린 것이든, 혹은 조금 견제해 황권 경쟁에서 배제하려던 것이든, 무언가 목적이 있었겠지요.”

“…….”

실제로 첫 번째 삶에서 레온 황자는 심한 식중독을 겪은 후, 더욱 내향적으로 되어 황권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아렌의 개입으로 그 미래를 빗겨낸 듯했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다시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전하께서 이대로 방에 틀어박혀 계시는 건 분명 편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전하를 해하려 한 자의 의도대로 되는 것입니다. 돌멘 황자가 아니라, 돌멘 황자를 이용해 전하를 해치려 한 누군가 말입니다. 그 누군가는 분명 속으로 쾌재를 부르겠지요.”

“…….”

이번에도 레온나토스의 응답은 없었다.

설령 자신을 죽이려 한 자가 돌멘이라 해도, 그의 죽음까지는 바라지 않았을 터.

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상 방기한 레온나토스는, 그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는 듯했다.

“오늘 들은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냥개를 훈련시킨 건 태양교이고-”

“…….”

아렌은 레온나토스에게 그간 자신이 그러모은 정보들을 모두 보고했다.

물론 레온나토스가 시킨 것도 아니고,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렌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상세히 모두 보고했다.

“…….”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레온나토스의 방을 나오면서도, 아렌은 자신이 서두르고 있다고 느꼈다.

조급함을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황궁 내의 기류가, 자신이 아는 바와 너무도 달라진 탓이다.

죽지 않아도 될 자가 죽었고, 아렌을 주목하는 자들도 한둘이 아니다.

‘…아직인가?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아렌은 레온의 방을 나오고도 그 문 앞에서 잠시 서성였다.

겉으로는 자신의 주군이 걱정 되서, 문 앞을 한시도 비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더글라스가 못 보겠다는 듯 말했다.

“…곧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실 거다. 그때까지 너도 좀 쉬고 있어. 괜히 어디 쏘다니지 말고.”

“말씀 감사합니다.”

아렌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는 건 소문에 어두운 더글라스까지도 알고 있었다.

“아니,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괜히 의심이나 사지 말고 할 일없으면 차라리 훈련이나…”

“아, 누가 오네요.”

“인마, 내 말 제대로-”

더글라스의 말이 끊겼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그도 느꼈기 때문이다.

‘…왔군.’

저벅, 저벅.

복도 끝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경비병 무리.

바로 얼마 전까지 더글라스가 입고 있던 경비병용 제복이지만, 투구에는 은도금한 가면이 달려있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황궁 내원 직속의 병사들, 은면병(銀面兵)이었다.

황궁 내원을 철통같이 지켜야 할 자들이 외원으로 나온 이유는 하나.

열두 명의 은면병이 지키고 있는 자는, 황자들의 백부이자 내원 시종장인 브레만이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생각대로만 된다면 아렌을 둘러싼 제약이 상당 부분 사라진다.

하지만 만약 잘못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

아렌은 금이간 흑옥반지를 쓰다듬었다.

‘이미 동전은 던져졌다. 모 아니면 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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