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각 황자는,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제9 황자 테오드릭은 타고난 신체에 무재(武才) 또한 남다르다.
제12 황자 레온나토스는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함이 눈에 띄었고, 제1 황자는 문무 양면으로 나무랄 곳 없는 후계자의 모범같은 자라 가장 황권에 가깝다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브륀할트 8세가 가장 총애하는 황자가 누구나 묻는다면, 열이면 열 제4 황자 가웨인을 꼽을 것이다.
‘검귀 가웨인’
걷는 법을 배움과 거의 동시에 검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가웨인은 한시도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검에 미쳤고, 미칠만한 실력도 있었다.
차후 검성(劍聖)의 자리에까지 오를 거라 확실시되던 재능이, 하필이면 황실의 후계자에게 내려졌다는 것이 축복인지 아쉬운 일인지 고민하던 것도 잠시.
제4 황자 가웨인은, 스물이 되기 전 자신의 궁인 넷을 베어 죽였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숫자만 넷이니 실제론 얼마나 더 죽었을지 모른다.
가웨인은 ‘검귀’보다 ‘미치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일이 더 늘어났고, 그럼에도 가웨인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황제의 총애는 가웨인을 향해있다.’ 그런 소문도 공공연하게 돌 무렵.
가웨인의 나이도 어느새 스물넷이 되었다.
언제든 차기 황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잔혹하지만 강인한 황자 아래에 그와 비슷한 성정의 날카롭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가신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게 저 사람들인가.’
스물이 넘는 창과 활을 든 무사들이 가웨인의 뒤에서 서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이쪽에 타고난 천재 더글라스가 있지만, 가신들끼리의 기세에서는 레온나토스 쪽이 압도적으로 밀린다.
아렌은 무리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가웨인 형님.”
“레온나토스냐.”
“저, 돌멘은-”
“이거 말이냐?”
가웨인은 목이 뜯긴 채 식어 있는 돌멘의 시체를 발로 툭 쳤다.
‘-이거.’
“내가 봤을 땐 이미 늑대가 돌멘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지. 늑대를 베었을 때 돌멘은 이미 죽은 뒤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은 자는 돌멘 뿐만이 아니었다.
더글라스는 이미 이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였다. 딱히 눈여겨볼 필요도 없었다.
“레온 전하. 돌멘 황자의 경비병, 호위 기사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전부 칼에 베여서.”
“아, 내가 죽였다. 섬기는 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한 녀석들을, 살려둘 필요 없잖아?”
태연하게 말하는 가웨인.
‘하지만…’
동생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가웨인은 태연했다.
타고난 냉혈한이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모른다.
그 속내를 헤아려보려 해도 지금으로선 힘들었다.
‘가웨인의 점이라도 봐줄 수 있다면 또 모르는데.’
사람의 심중을 헤아리는 데는 많은 지표들이 필요했다.
표정이나 몸짓, 눈의 방향과 목소리의 높낮이, 심지어 체취와 체온 등등.
그러기 위해선 이쪽의 지속적인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만 했고, 또 답변에 진심일수록 적중률이 컸다.
“아까 효시가 울더군.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가웨인은 자신의 유난히 얇고 긴 장검을 허리에 갈무리했다.
가웨인의 가신들은 널브러진 사체들 중 늑대들만 짐말 위에 올렸다. 늑대 역시 사냥감으로 두려는 모양이었다.
가웨인의 짐말은 몇 마리나 되었고, 그 중 하나의 등에는 은빛 털의 사슴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
녹음 속에서 생명력을 빛내던 은빛 사슴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웠지만, 죽은 채 짐말에 실린 사슴은 아름다움을 피와 함께 땅에 흘려보낸 뒤였다.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사냥대회의 1등은 가웨인 황자의 것이겠지만, 황자 하나가 죽은 이상 그게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형님!”
레온나토스가 외쳤다. 뒤돌아보는 가웨인.
“돌멘은-”
불러세웠지만,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말 없는 레온을 잠깐 쳐다본 가웨인은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가시같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숲의 나무 너머로 해가 낮게 걸린 하늘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제13 황자가, 사냥대회 도중 죽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고, 당연히 그날 있을 시상식도 유야무야되었다.
숲을 관리하던 숲지기가 극형에 처했다는 소식과 함께, 황궁엔 찌릿찌릿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미래가 달라졌어. 어째서?’
아렌이 아는 한, 제13 황자 돌멘은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당연히 별다른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어떤 황자를 몰래 지지하고 있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돌았지만, 그게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밝히려는 사람도 없었다.
딱 그 정도의 인물일 뿐.
그런 돌멘이 이번 삶에선 죽었다.
단지 운이 나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렌은 이런 우연을 믿지 않았다.
‘레온나토스 암살시도의 유력한 용의자가 돌멘인데, 하필 돌멘이 사냥대회에서 죽었다?’
심지어, 돌멘이 늑대에 공격받은 건 두 번이었다. 첫 번째도 레온나토스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것.
‘누군가가, 돌멘을 죽이려 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제4 황자, 가웨인.’
자신의 가신을 넷이나 베어 죽이고, 그럼에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자.
아무리 황자라 해도 황궁 내 법도에 따라 처벌당해 마땅하지만, 가웨인은 처벌을 피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지레짐작했다.
[황제가 가웨인을 총애하고 있다]
그리고, 유력한 황제 후보 아래에는 언제나 사람이 꼬인다.
‘돌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던 건가. 필요 없어지고 도리어 꼬리가 밟힐 것 같으니 얼른 처리해버렸는지도.’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그럴듯할 뿐 아직 진실은 아니다.
아렌은 레온의 침소를 돌아봤다.
사냥대회 이후, 레온나토스는 며칠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레온나토스 전하. 오늘 수련은-”
“쉬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근 수련을 함께하며 꽤 죽이 잘 맞았던 더글라스조차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갔다.
적막한 방안.
레온나토스는 조용히 말했다.
“…아렌.”
“말씀하시지요, 전하.”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레온나토스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역시 그때, 돌멘을 바래다줬어야 했을까?”
“…….”
“돌멘이 날 노린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가마꾼 넷 중 둘이나 다쳤으니, 병사 둘이 가마를 들어야 하는 만큼 방어에 취약해졌다는 것도 난 알고 있었어.”
레온나토스의 목소리는 큰 재채기 한방에 다 날아갈 것처럼 작고 덧없게 들려왔다.
“하지만, 죽었으면 하고 바란 것은 아니었어. 돌멘이 범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 옹졸함 때문에 일어나지 않아도 됐을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냥 따위 그만두고 숲 바깥까지 바래다주기만 했어도…”
“…….”
어두운 황자의 방에서, 아렌은 조금 냉정한 눈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기껏 수련도 하고 사냥대회에도 참석하며 조금 활동적으로 변했는데, 다시 책만 보며 은둔하게 둘 수는 없었다.
“전하. 전 신이 아니기에, 무엇이 진실인지 모릅니다.”
“네 점으로도 말이냐.”
“그렇습니다. 점으론 결코 과거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렌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아렌이 더글라스의 반지를 찾아준 건 기억 낚시라는 유랑인의 기술이었고, 애초에 아렌의 점술은 과거는커녕 미래도 보지 못한다.
“다만, 전하께 하나 말씀드릴 건 있습니다.”
“…뭐지?”
“돌멘 전하를 해한 건 레온나토스 전하가 아니라 늑대라는 점이지요.”
“…늑대.”
“네. 늑대입니다.”
아렌이 말하는 ‘늑대’가, 단지 동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건 총명한 레온나토스도 눈치챘을 것이다.
“정말 돌멘 황자가 전하를 해하려 했던 자라면, 이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자가 만약-”
똑똑.
그때, 누군가 레온의 방문을 두드렸다.
겉으로는 시녀지만 실은 레온 황자의 비밀호위인, 암살 시종 멜로익이었다.
“…무슨 일이지?”
“내원 시종장께서, 시종 아렌을 부르셨습니다.”
“…백부님께서 아렌을?”
“그렇습니다.”
내원 시종장이 내원 바깥의 일개 시종에게 무슨 볼일인지는 모른다.
다만, 보통 일이 아니라고만 짐작할 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너라.”
아렌이 방문을 나올 때까지도 레온 황자는 침대 밖을 나오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멜로익과 나란히 황궁 복도를 걷는 아렌.
이윽고 침묵을 깬 건 암살 시종 멜로익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대단한데?”
“대단하다니, 뭐가?”
“네 점술 말야.”
“점술이 뭐?”
“사냥대회에서, 길과 흉이 애매하다고 하지 않았어? 사냥대회는 불미스럽게 끝났지만, 레온 전하께서는 무사하시지. 가웨인 전하에 이어 두 번째로 현장을 목격했으니 황제 폐하의 귀에도 자연스레 이름이 올라갔을 거고. 확실히 길인지 흉인지 모를 사냥대회긴 해.”
“…황자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런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아렌에게도 사람이 죽었다는 꺼림칙한 감정만 남았을 뿐, 돌멘의 죽음에 필요 이상의 상실감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황궁.
실없는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멜로익도 그런 황궁의 생리에 대해 잘 알았다.
“나도 농담한 거 아냐.”
멜로익은 정색하고 말했다.
“난 황제 폐하께서 심어놓은 암살 시종이지만, 받은 명령은 지엄하고 불변해. 내 임무는 무슨 수를 쓰든 레온나토스 전하를 지키는 것. 이건 변하지 않아.”
마음속 깊이 우러난 충성이 아니라, 단지 명령받았기에 이행하는 충성.
“불변하는 명령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아렌, 넌 어떻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이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듣는 귀가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멜로익도 그걸 모를 리 없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아렌, 넌 레온 황자님을 지지해?”
“그러지 않으면 지금 전하 곁에 있지 않겠지?”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거야?”
“…….”
둘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궁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높은 담벼락과 거대한 문.
앞에 보이는 거대한 문은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조차도 초대받아야만 지날 수 있었다.
아렌이 서자 문지기도 없는 문이 끼이익, 둔중한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그 문을 앞에 두고 아렌은 말했다.
“글쎄. 내가 레온나토스 전하를 섬기고 지지하는 건, 그게 내게 유리하기 때문이지. 가급적 이 구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멜로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렌이 문을 지났고,
-쿵.
아렌을 삼킨 거대한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
아렌이 이번 생에서만 벌써 두 번째 들어온 황궁 내원.
전에는 레온나토스의 수행원으로서 따라왔지만, 이번엔 내원 시종장의 지명으로 단독으로 들어온 자리. 그 위압감은 실로 남달랐다.
황궁 내원의 시종들은 외원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설령 명목상의 지위가 같더라도 내원의 시종은 외원보다 한 단계 더 윗급으로 대우받았으니까.
‘무리도 아니지. 그만큼 제국의 권력 정점에 가까이 있다는 뜻이니까.’
거기에 아렌이 다시 도착했다.
계단처럼 층층이 높아져 가는 단상과 그 정상에 놓인 높고 화사한 의자, 그리고 의자의 상단부를 반쯤 가린 베일.
그 베일 바깥으로 황궁의 내원 시종장이 서 있었다.
아렌은 높이 선 시종장을 향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레온나토스 황자의 시종, 아렌이옵니다.”
“오느라 수고 많았네. 편한 곳에 앉게.”
“…네.”
내원 시종장은 앉으라 권했지만, 주변에 마땅한 의자는 없었다.
아렌은 정해진 일처럼 바닥에 앉았다.
낮은 곳의 바닥에 앉은 아렌과, 높은 단상 위 서 있는 시종장.
둘의 격차는 월등했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시종장의 목소리는 내리꽂히듯 떨어졌다.
“내가 내원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대답해 보게.”
“궁 내원의 시종들을 총괄하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래. 그것도 맞는 답이지. 하지만 더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내원 안에서, 폐하의 손이 미치지 않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게 나의 일이다.”
“…….”
자칫 오만하게 들리는 말. 하나 저 말은 사실이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널 아끼신다고 들었다. 과연, 전하의 마음에 들 만큼 명석해 보이는구나.”
“과찬이십니다.”
“글쎄. 하지만 이미 넌,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지 않나?”
“…….”
아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네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답해야 할 거다.”
내원 시종장은 손가락을 하나 폈다.
“첫째. 지금처럼 계속, 레온나토스 전하 곁을 보필하는 것.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능히 황태자가 될 자질이 있지만, 다른 황자들 역시 녹록치는 않지. 네 보필이 결실을 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거다. 그리고 레온 전하께서 실각하시면 지금의 네 위치도 위태로워지겠지.”
“…….”
“그리고, 이게 두 번째 선택지다.”
내원 시종장은 손가락을 하나 더 펴고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레온나토스 전하의 곁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내원에 보고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회유였다. 황제의 눈, 혹은 그에 준하는 여러 간자를 모집하는 것.
아렌의 갈등을 다독여주듯 시종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것을 배신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애초에 넌 수많은 시동들 중 하나로 뽑혀 레온 전하를 섬기게 된 것 아닌가. 스스로의 결심으로 황자를 섬긴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리되면 전, 안정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불확실한 도박은 아니겠지. 딱히 레온 황자에 나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요즘 궁 안의 기류가 심상치 않지 않나.”
그 말은, 최근 죽은 돌멘 황자도 염두에 둔 말 같았다.
궁 안의 눈과 귀는 많을수록 좋다는 뜻.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이건 황제 폐하의 뜻입니까, 내원 시종장님의 뜻입니까.”
그 말을 들은 내원 시종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