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죽였어?”
이제 열 살 남짓의 시종 꼬마가, 손조차 대기 버거운 황제의 하사품을 죽여버렸다.
쓰러진 돌멘의 가마 주위엔 한동안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 하하….”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사냥개가 흘린 침과 피로 범벅이 된 돌멘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허탈한 웃음과 함께 돌멘이 외쳤다.
“하하! 봐라!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죽였다!”
그 말은 저주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주변의 가신들은 멀찍이 물러났다. 물러서지 않은 건 씁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더글라스 뿐.
잠시동안 기분 나쁜 정적이 가마 주변을 맴돌았다.
다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깬 건, 어디선가 들려온 어린아이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어떻단 말이지?”
“…뭐라고?”
아렌을 두둔한 건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였다.
레온은 주변의 궁인들에게도 똑똑히 들으라는 듯 목소리 높여 말했다.
“내 가신 아렌이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죽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지시했으니 곧 내 뜻이나 다름없다. 너희들이 바로 그 증인이다!”
“…어째서지?”
돌멘은 레온나토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돌멘은 어디까지나 가신의 허물을 통해, 레온나토스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발뺌하면 발뺌하는 대로, 두둔하면 두둔하는 대로 돌멘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설마하니, 가신의 죄까지 자신이 모조리 뒤집어쓸 줄이야.
“설마하니, 별것 아닌 일이라 생각하는 거냐? 그건 큰 착각이야! 폐하의 하사품에 손을 댄 건 결코 가볍지-”
“너야말로 착각하고 있어, 돌멘. 아렌은 단지 널 구해 줬을 뿐이다. 폐하의 하사품을 죽인 건 그 이후에나 따질 일이야.”
“…레온나토스. 그 말은 꼭 책임져야 할 거다. 설마하니 황권을 노리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당한 건 아니겠지.”
“흠, 글쎄.”
레온나토스는 가마 위 널브러진 사냥개의 사체를 쳐다봤다.
손끝으로 죽은 개의 뺨을 슬쩍 벌리니, 평평하게 갈려 있는 이빨이 그대로 드러났다.
레온나토스는 다시 개의 뺨을 놓았다.
“폐하께서 추궁하신다면 죄는 달게 받도록 하지.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렌, 너도 그리 생각한 거겠지?”
“레온 전하의 혜안이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가마 위에서 쓰러진 채, 레온과 아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인 돌멘.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돌멘의 가마꾼 둘이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가마 역시 다른 병사가 도와주면 돌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
물론, 가마꾼을 부축하는 인원에 가마를 들 인원까지 합하면 호위는 취약해지지만 레온나토스는 숲 바깥까지 돌멘을 배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돌멘, 사냥개를 죽인 사실은 나도 직접 보고토록 하지. 우린 계속 사냥하겠지만, 그쪽은 곧바로 돌아가는 걸 추천하겠어. 그럼… 아, 참!”
바로 헤어지려던 레온나토스는, 돌멘에 접근한 후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내게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는 걸, 넌 어떻게 알았지? 분명 함구령이 내려졌는데.”
“그, 그건….”
“이것 역시 폐하께 같이 보고하겠다. 그때 넌, 납득이 가는 대답을 해야 할 거야.”
돌멘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다른 이들은 레온나토스가 속삭이는 말을 듣지 못했고, 그 말을 들은 건 바로 곁에 있던 아렌 정도였다.
‘역시, 레온나토스도 눈치챘나.’
황제의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원래라면 알 리 없는 정보를 돌멘이 알고 있다는 걸 레온나토스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렌이 저 입장이었다면 지금 곧바로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효과적인 타이밍에 공개하는 게 더욱 상대를 옥죌 수 있고, 대처할 길도 막기 때문에.
분명 레온나토스는 영민하기는 하나, 군주가 될 자에겐 교활함 역시 필요했다.
‘그건, 내가 도와주지. 레온나토스.’
“방금은 절 두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무슨, 주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다만,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건지 물어도 되겠나?”
“…….”
레온나토스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 대략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아렌은 레온이 하사받은, 쇠사슬에 묶인 엽견의 입을 들추었다.
그 사냥개 역시 이빨이 날카롭지 않도록 뭉툭하게 갈려 있었다. 송곳니는 아예 뽑혀 있었다.
“먼저, 돌멘 전하의 사냥개 역시 이것과 마찬가지로 이빨이 뭉툭했습니다. 물리면 분명 아플 테지만, 치명적이지는 않겠지요.”
“그래. 나도 아렌 네 덕에 뒤늦게나마 알아차렸다.”
“안전을 위한다면 훈련이 잘되었거나, 너무 크지 않은 엽견을 준비하면 될 일입니다. 둘 다 사납고 거대한 엽견의 이빨을 전부 갈아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죠.”
이 사냥개를 준비한 건 황제이니, 이 번거로운 일을 지시한 것 또한 황제다.
그렇다면, 목적의 윤곽이 점점 잡힌다.
“폐하께서는 아마 사냥 직전에 사납고 거추장스러운 엽견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양질의 가신이 충분히 많은 황자분들의 경우엔 그다지 버겁지 않게 엽견을 다루었을 테니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겠죠.”
설령 개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된다 해도, 피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빨을 갈아낸 건 황제 자신의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겠지.
“저희 앞에서 돌멘 황자의 사냥개는 사냥에 쓸 수도 없고 주인에게 달려들기만 하는 애물단지였습니다. 황제 폐하의 애정 어린 선물이었다면 큰 불경을 저지른 것입니다만, 단순히 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설령 황제의 선물이라 해도, 위협이 된다면 가차 없이 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아렌의 뜻이었다.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면 출제자의 의도를 대강 알 수 있다.
아렌은 자신의 답이 오답이 아님을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폐하께서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네. 폐하의 선물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 또한 황제 폐하가 원하던 해답 중 하나였을 테니까요.”
“…….”
황자에게 개의 이빨을 갈아내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통찰력이 있는가.
황자에게 유사시 거대한 맹견을 제압해낼 무력이 있는가.
황자에게, 설령 황제의 하사품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죽일 만큼의 결단력이 있는가.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그게 폐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땐 주인을 파는 수밖에 없죠. 레온나토스 전하가 시킨 거라 발뺌하는 수밖에요.”
“하하하!”
상쾌하게 웃는 레온나토스. 아렌도 따라 빙그레 웃었고, 둘을 바라보던 더글라스는 조용히 한숨 쉬었다.
“…도무지 열 살들의 대화가 아냐….”
“뭐라고 했나, 더글라스?”
“아, 아닙니다, 전하! 그, 그보다 저 사냥개는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사냥개?”
더글라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주인을 공격하는데 거리낌 없는 맹견입니다. 이빨을 갈아내었다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사냥개가 같은 성정인지는 모르지만, 돌멘의 사냥개는 풀려나자마자 늑대를 향해 용맹하게 뛰었다. 바로 곁에 안전하고 무방비한 사람들이 몇이나 있었는데 말이야. 개를 훈련시키는 게 힘들기는 하겠지. 하지만 시도라도 하고 싶구나.”
레온은 천으로 주둥이를 가린 사냥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태어나 흉폭하게 자라, 이빨까지 모두 다듬어진 사냥개의 삶이란 기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 그렇지.”
홱, 아렌을 돌아본 레온.
“이 녀석을 잘 키울 수 있을지, 점을 봐주겠나?”
“…….”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점을 보다니.’
아마, 점에 중독된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미 키우겠다 결심한 상태에서 반쯤 재미 삼아 점을 보게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재미 삼아’ 점을 자주 보는 것 또한 의존으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음, 왜 그러지? 카드가 없나?”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아렌은 카드를 꺼냈다.
물론, 아렌은 이 개가 차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렌은 미래에 대해 전혀 모르던 첫 번째 삶에서도 자신의 안목과 세 치 혀만으로 황가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이다.
‘…레온 황자가 개를 키우고 싶어 하는 건 맞아.’
그렇다면 그 의사는 최대한 존중하되,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둔다.
아렌은 카드를 뒤집었다.
“…제대로 자라준다면 앞으로도 전하의 든든한 벗이 되어줄 겁니다. 하지만 거기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겠군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상 잘 키우면 잘 될 거라는 식의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그런 들으나 마나 한 말에도 레온은 만족했다.
“결국 나 하기에 달렸다는 말이군. 그거면 충분해.”
*****
-삐익!
효시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숲 위를 날았다.
숲의 어둠은 빠르다. 밤이 되기 전 사냥대회를 마친다는 표시였고, 그때까지 숲에 있던 레온 황자는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수확은, 사슴 한 마리에 토끼 두 마리.
황자 스스로 잡은 건 토끼 한 마리가 전부였지만, 사냥 초행에 토끼 한 마리면 이미 대성공이나 다름없다.
레온나토스 황자도 만족했다.
“역시 대단하군, 더글라스. 자네 덕분에 체면치레는 하겠어.”
“전하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첫 사냥에 이미 성과를 올리시다니요.”
“무슨 소릴. 이곳이 관리되는 사냥터이기에 쉽게 걸려든 것뿐인데.”
“그게 바로 재능이지요.”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는 주거니 받거니 했다.
사냥감을 쫓아 하염없이 들어온 만큼, 레온나토스 일행은 어느덧 숲 깊은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주변엔 다른 황자의 인기척도 없었고, 레온나토스는 대회인 것도 잊고 사냥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물론, 은빛 사슴을 잡을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보람찼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놓쳐버린 사냥감에 대한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고 보니, 적갈색 늑대도 충분히 영물급이었는데. 그 늑대를 잡았다면 대회에 높은 득점이지 않을까?’
아렌은 멍하니 생각했다.
사냥에 쏟고 있던 집중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고, 동시에 그동안 뒷전으로 미뤄뒀던 어렴풋한 의문이 아렌의 속에서 막 고개를 치켜올렸다.
“…….”
“아렌, 왜 그러지?”
“…늑대가 있었습니다.”
“늑대? 그래, 있었지. 돌멘을 덮친 늑대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이곳은 황제의 숲입니다. 대륙 전역에서 여기보다 관리 잘되는 숲은 없지요.”
“……!”
아렌의 지적에 레온나토스도 곧바로 눈치챘다.
아렌의 말대로 이곳은 황제의 명으로 직접 관리되는 사냥터다.
그리고, 일부러 맹수를 풀어놓는 사냥터는 없다.
“특히나 오늘은 황자님들의 사냥대회가 열리는 날이죠. 그런데 영물급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누군가의 의도가 작용했다, 이 말인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황제는 아닐 것이다.
사냥개의 경우엔 아렌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선물 자체가 황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한 황제의 안배라는 사실을.
하지만 늑대의 경우, 이빨을 갈아내거나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었다. 레온나토스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돌멘이 피를 봤을지도 모르는 상황.
더글라스는 둘의 대화에서 신경을 끊었다. 들어봤자 잘 이해되지도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변하지 않으니 신경 끄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황제 폐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늑대를 숲에 풀어놓았다는 말인가?”
“역시 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냥터에 늑대가 풀린 것이라면 무엇이 목적이었을까.
“…돌멘.”
레온나토스가 중얼거렸다.
늑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돌멘 일행을 공격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제가 알기로, 돌멘 전하는 진지하게 황권을 노리실 성정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돌멘 전하를 아는 사람에게 열 명이 물어도 열이면 열 같은 대답을 하겠지요. 그런데도, 이번 사냥대회에 제법 열심이지 않습니까. 다른 황자들처럼 대리 엽사를 불러 쉽게 넘어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황권에 도전하지 않고, 유력한 황자를 지지하는 데 그치는 황자들도 많다. 지금 황가의 내원 시종장, 브레만 역시 그런 경우였다.
연회장에서 레온나토스를 노린 게 돌멘이라 해도, 오롯이 그 혼자의 의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실패한 과잉 충성은, 때론 부담이기도 하죠.”
“…….”
늑대가 우연히 돌멘을 노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에 의해 돌멘을 노리도록 설계되었다면.
“…돌멘은 바로 돌아갔겠지? 역시 우리가 바래다줬어야 했어!”
“아마 무사하실 겁니다. 곧바로 돌아가셨다면요. 그리고 우리의 호의가 있었어도 거절했을 테니,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
“그때 난, 돌멘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도 전하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을지 모르는 이복형제.
사냥대회를 포기하면서까지 편의를 봐주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겠지. 누구든 그럴 것이다.
“돌아가야겠다. 가능한 빠르게.”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
레온나토스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돌멘의 아니꼽지만 멀쩡한 얼굴을 봐야만 그 불안감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엔 대체로 들어맞는 법칙이 있는 법이다.
가령, ‘불안한 예감은 적중한다’라는.
*****
사냥개가 사납게 짖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 숲속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기분 탓인지 바람에 실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피 냄새입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더글라스가 얼굴을 굳힘과 동시에,
아우우!
높고 긴 늑대의 울음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여기서 멀지 않아!”
레온나토스가 속도를 냈다.
이윽고 소리가 난 곳을 찾아갔을 때, 그곳의 광경을 보고 아렌은 기시감을 느꼈다.
바로 조금 전, 비슷한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숲 안쪽에는 내팽개쳐진 가마와, 아연실색한 가마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조금 달랐다.
제13 황자 돌멘은, 가마 위에서 목이 찢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돌멘의 목을 찢은 건 거대한 적갈색 늑대.
그리고 적갈색 늑대 역시도, 등이 완전히 갈라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다른 늑대무리들도 마찬가지.
늑대의 등을 가른 인물은, 하얀 장발을 아무렇게나 산발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가늘게 찢어진 눈이 자신을 향하자, 레온나토스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굳이 이 광경 때문이 아니라도, 레온나토스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
“…가웨인 형님.”
“레온나토스냐.”
비록 배다른 형제지만, 동생의 시체를 앞에 두고 태연한 황자.
‘제4 황자, 가웨인.’
검귀, 미치광이라는 평을 듣는 제국의 제4 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