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평민 출신의 미천한 경비병이, 한순간에 황자의 근위기사로 발탁되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기 힘든 이 사건은, 황궁 내에서도 화제였다.
보통이라면 고를 사람이 없어 고작 경비병이나 골랐냐는, 조롱 섞인 평가가 따라왔을 테지만….
“경비병이 글쎄, 맨손으로 검을 든 호위기사를 쓰러뜨렸대!”
“술주정뱅이 더글라스가 그렇게 강했어? 그 한방으로 근위기사가 되고, 더글라스는 술까지 끊었다는데!”
“술에 취해 똥통에 빠진 경비병이, 인생을 한 방에 역전했네.”
“호위기사는 곧바로 궁을 나간 모양이더라고. 여하튼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어떻게 단번에 옥석을 가려내셨을까?”
“그야,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현명하기로는 황자 중 으뜸이니까.”
“그간 조용히 계셨지만, 드디어 레온나토스 전하도 기지개를 켜신 게지.”
황궁은 결코 소문을 흘리기 적합한 곳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몰래 수군대는 소문이 더 재밌다.
궁인들은 저마다 새로이 두각을 드러낸 레온나토스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세간의 반응과는 달리 정작 그런 소문에는 영 관심이 없는 레온이었다.
레온나토스는 근위기사가 된 더글라스에게 당부했다.
“괜한 기대를 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두겠지만, 난 자네의 출세를 보장해 주지 못해. 그럴 능력이 되느냐는 둘째치고, 부끄럽지만 난 아직도 어찌할지, 내 거취도 정하지 않았단 말일세.”
“전혀 상관없습니다. 전 단지 보은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것 역시 방향이 잘못되었어. 보은이라면 당연히 아렌에게 직접 해야지.”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아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더글라스 경이 바라는 것이 곧,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아렌 너까지.”
물론, 아직 레온나토스 황자의 세력이라 해 봤자 미진하기 짝이 없었다.
유사시 레온나토스 황자만을 따를 가신은 아직은 어린 시종일 뿐인 아렌과 한창 주가가 뛰는 무사이지만 결국 혼자인 더글라스가 전부.
고작 둘 뿐이지만, 레온나토스는 저 둘의 운명을 떠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레온이 처음 아렌을 가신으로 들인 건 단지 자신의 말동무로 삼고 싶었을 뿐.
그런 아렌은 어느덧, 레온나토스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근위기사를 뽑으라고 말한 것도 아렌 너였지. 오늘 공표된 내용, 넌 미리 알고 있었나?”
“그저 점괘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입니다.”
오늘 아침, 황제가 사냥대회 개최를 황궁 전체에 공표했다.
황권에 관심 없는 자들에게야 그저 으레 있는 행사 중 하나일 뿐이지만, 황권을 노리는 황자들에게는 또 다른 시험대였다.
갑자기 열린 사냥대회에 부랴부랴 대리 엽사를 구하는 황자부터, 자신의 실력을 손수 뽐낼 생각에 조용히 웃는 자들까지 반응도 가지각색.
그리고, 제12 황자 레온나토스가 어떤 부류인가 하면…
“사냥대회라. 내게 급히 활을 배우라 한 것은 그 때문인가? 덕분에 정말 기본은 익히기는 했지만. 토끼라도 하나 잡는다면 좋겠구나.”
여전히,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 따위엔 무관심한 레온이었다.
레온나토스는 아렌의 조언대로, 더글라스를 영입한 후 며칠간 궁술만을 익혔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활 실력이 기본만 조금 넘는다고 했지만, 둘 모두 수준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창과 활 모두 사냥에서 주로 쓰이는 도구들.
“형님들의 반응을 보니 사냥대회가 열릴 걸 미리 안 사람은 없는 듯한데, 과연 아렌 네 점괘는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구나.”
“저도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제 아내의 유품을 곧바로 찾을 만큼의 신묘한 실력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더글라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충분히 배움이 빠르십니다. 제 주군이라서가 아니라 무재(武才) 역시 뛰어나심을 바로 알겠더군요. 하지만 전 사냥이 그리 특기가 아닙니다. 창과 활은 부족함 없이 다루긴 하나, 역시 무술과 사냥은 다른 법입니다. 제 실력으로 사냥대회에서 활약하기에는…”
“뭐야,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었나? 걱정할 것 없네. 사냥대회는 가진 실력을 마음껏 뽐내는 자리지, 실력 이상을 무리해서 보이는 자리가 아니니까. 경쟁이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 아닌가?”
비록 사냥과 무예가 완전히 같은 영역은 아니지만, 레온나토스의 궁술은 실로 빠르게 늘었다. 운이 좋다면 초행인 사냥에서도 토끼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긴장 따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레온나토스였다.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번 사냥대회에서 바로 성과를 낼 필요는 없으니까. 별다른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아렌은 이번 사냥대회가 무탈이 열리고, 또 마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냥대회에 앞서 더글라스를 근위기사로 뽑은 것은, 으슥한 숲속 한가운데에선 실력과 충성심 모두 믿을 수 있는 고수 한 명이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공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느긋하게 가자고.’
그렇게 생각한 아렌이었다.
*****
출렵 당일은 한 점 구름도 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총 열일곱의 황자들 중 열둘이 직접 참가했지만, 직접 오지 못한 자들도 대리 엽사만큼은 보냈다.
사냥이 취미인 귀족들도 더러는 참가했지만 어디까지나 황자들의 사냥에 방해되지 않도록 숲의 외곽만을 돌 뿐. 중심부는 언제나 황자들의 몫이었다.
‘황제의 숲.’ 숲을 가로지르려면 꼬박 하루가 걸려야 그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숲이 황도의 외곽을 따라 널리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모든 짐승은 황제의 사냥감으로서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다.
숲 바깥의 공터엔 거대한 천막이 몇 개씩이나 있었고, 사냥에 참가한 황자들의 성향에 따라 마차나 가마, 직접 말에 탄 황자까지 가지각색.
그리고, 황자가 잡은 사냥감을 점수로 기록할 기록관은 황제의 천막 바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흠, 이런 분위기군.’
황제의 숲은 아렌에게도 생소했다.
지난 삶에서 20년간 레온을 섬겼던 아렌이었지만, 레온을 따라 사냥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 이때의 사냥대회는 암살기도로 혼수상태라 불참, 몸이 나은 후로도 레온 황자는 더욱 소극적으로 되어 외부 활동에 거의 불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껏 용기 내서 처음으로 나간 사냥에서 살해당했지.’
운명도 얄궂은 일이다.
나쁜 기억을 털어내듯 고개를 돌린 아렌은, 그대로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가 닿는 곳에 거대한 흑마에 탄 채, 자신만만하게 서 있는 테오드릭 황자와 그 한참 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라흐네가 보였다.
아라흐네는 아렌이 불길하다고 한 점괘를 어지간히도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겁을 줬나? 저 정도로 믿을 줄은 몰랐는데.’
대부분 흉조를 말한 뒤 대처법을 알려주면, 무탈하게 지나가도 대처법을 잘 지켜서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아라흐네처럼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무탈하게 지나갈 경우, 허탈해함과 동시에 점괘를 더이상 믿지 않는 일이 생기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점괘대로 하기 위해 억지로 사건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다.
‘아라흐네에게는 점괘를 조심해서 일러줘야겠어.’
잠시 대기한 사이. 내원 시종장 브레만이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황제가 주최한 행사이지만, 황제 스스로는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세상 어느 곳에나 있고 황제도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마 공터 곳곳에 세워진 출입 금지 천막 중 한 곳에 황제가 있을 테지만, 그걸 아는 건 내원 시종장을 비롯한 최측근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행사에서 내원 시종장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나 다름없었고, 그 권위는 명목상의 권위보다 아득히 높았다.
내원 시종장 브레만의 등장에 좌중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내원 시종장은 나긋나긋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날씨도 맑고 바람도 적당한 것이, 참으로 길한 날입니다. 대회에 참가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대회를 시작함에 앞서, 황제 폐하께서 황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시종장의 말과 동시에, 시종장 옆의 천막에서 쇠사슬을 잡아끄는 거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천막 밖으로 줄줄이 나온 건, 병사 둘이 잡아끄는 표범만큼 거대한 사냥개였다.
목과 가슴에 두 개의 사슬이 연결되어 있고, 장정 둘이 달려들지 않고선 제어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황실에서 직접 기르고 훈련시킨 용맹한 엽견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보낸 하사품이니만큼, 부디 사냥에서도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온나토스에게도 엽견이 도착했다.
‘…잘 훈련된 거, 맞지?’
“크르르르!”
마디 하나가 손가락 굵기만 한 쇠사슬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근육질의 몸에 주둥이도 짧은 것이, 필시 무는 힘이 대단해 보였다.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 역시 감탄했다.
“이거, 폐하께서 아주 좋은 개를 보내셨구나.”
“이 정도 크기라면 멧돼지와도 겨뤄봄직 한데, 이런 엽견이라면 금화 다섯 닢 가치는 족히 할 겁니다.”
금화 다섯 닢은 일반 가정집의 2달 생활비.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접근할 가격은 아니었다.
확실히 품종이 보통 개는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강해 보이지만, 사냥이 초행인 황자들에겐 너무 버거운 것 아닌가?’
지금도 조련사의 명령은 들을지 몰라도 처음 주인이 된 황자들의 명령을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차라리 다루기 쉽다면 조금 말썽이어도 바로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굳이 이런 사냥개를 준비한 건…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건가?’
내원 시종장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 사냥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한 황자에겐, 황제 폐하의 이름 아래 새로이 창설될 제8 기사단이 주어집니다.”
“와아아아아!”
황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환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훨씬 활기를 띠게 된 사냥대회.
“호오, 기사단이라. 대단하구나.”
황권을 노리는 황자가 기사단을 가지는 것의 의미를, 레온나토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순수하게 감탄하기만 했다.
사냥대회의 부상이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아렌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레온나토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레온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필요하다고 해도 얻을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얻지 못하는 편이 낫기도 하고.’
이번 사냥대회에선 책상붙이였던 레온나토스가 첫 사냥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것만 확인해도 충분했다.
-팡!
시약이 폭발하는 파열음과 함께, 황제의 숲 안으로 거침없이 달리는 말과 마차, 사냥개들.
그중 선두에 선 건 건장한 가신을 열 이상이나 거느린, 기골이 장대한 청년 황자들이었다.
황자로서의 순번도 앞쪽인, 이미 언제 국정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황자들.
황제가 언제 황위를 양도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무슨 변덕으로 내일 당장 황위를 계승하려 한다면 오늘의 1순위가 곧 차기 황제 자리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이번 사냥대회에 얼마만큼의 점수를 매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청년 황자들이 이 대회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청년 황자들이 앞다퉈 숲으로 들어간 다음.
“이거 참, 형님들도 서두르시는군. 물론 무리는 아니지만 말이다.”
거대한 검은 색 흑마에 탄 제9 황자 테오드릭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이 첫 사냥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떠냐, 레온나토스. 같이 사냥하지 않을 테냐?”
데오드릭이 제안했다.
그건 레온나토스만을 위한 제안은 아니었다.
테오드릭의 충분히 성장한 몸은 거대한 흑마와도 썩 잘 어울렸지만, 그도 고작 열세 살의 나이일 뿐.
아직 어린 두 황자가 이런 자리에서 힘을 합치는 건 흉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님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모처럼 하는 사냥이니만큼 이번엔 몸소 부딪혀보고 싶습니다.”
“허, 역시 그러냐. 욕심이 없는 건 여전하구나. 둘이 힘을 합치면 1등은 무리라도 점수는 꽤나 얻을 수 있을 텐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먼저 숲속으로 들어간 황자들은 모두 스무 명은 훌쩍 넘는 대인원이었다.
사냥에는 사람 숫자가 많다고 꼭 유리한 것이 아니다.
사냥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가 많은 인원을 대동한다는 건, 그만큼 그 휘하에 쓸만한 인재가 많다는 뜻.
반면 테오드릭은 여섯 명의 무사와 호위기사 둘, 그리고 두 명의 시녀가 전부였다. 사냥 직전 하사받은 사냥개도 있었지만, 통제되지도 않고 병사 둘이 온전히 달라붙어야 하기에 전력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형님의 일행 중 전문 엽사로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전문 엽사라니? 사냥을 남의 도움으로 하면 그게 무슨 재미겠나. 모름지기 사냥은 손맛으로 하는 것인데.”
“…….”
‘테오드릭, 황권을 진지하게 노린다고 하지 않았나?’
듣고 있던 아렌이 속으로 딴지를 걸었지만, 모를 일이긴 하다.
황자들이 일류 엽사를 모아 얻어낸 최고점과 황자가 직접 사냥해 얻어낸 중간점수 중, 어느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지는 말이다.
“네 뜻이 그렇다면, 이번은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다음엔 꼭 같이 가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숲속으로 들어가려던 테오드릭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건 괜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레온나토스.”
“말씀하시죠, 형님.”
“…조심해라. 어쩐지 이번 사냥대회는 예감이 좋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테오드릭과 그 가신들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테오드릭의 마지막 말에 더욱 바들바들 떠는 아라흐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다, 라.’
단순한 기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예감, 직감이 뛰어난 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신비한 통찰력 따위가 아니라 무의식중 주변의 수많은 요소들을 분석해,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답을 내놓는 자들.
테오드릭 역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마 별일은 없을 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특히, 레온나토스의 인원은 단촐했다.
아렌과 더글라스, 암살 시종 멜로익과 다른 시녀 하나. 따라온 병사 넷 중 둘은 난폭한 사냥개를 잡아끄느라 실질적인 전력이 되지 못한다.
이윽고 레온나토스도 깊은 숲속으로 말을 몰았다.
분명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을 깊은 숲은, 범의 아가리처럼 시꺼멓게 입을 벌려 황자 일행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