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아렌은 날이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황궁에 도착했고, 더글라스는 결국 교대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와봤자 잘되면 파직, 자칫하면 채찍형이니 아마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쉽게 포섭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역시 마음대로는 안되는군.’
하지만 아렌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인재들을 아렌은 더 알고 있었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황궁의 날이 저물었고, 아렌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레온 황자와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어떤가, 아렌. 내게 추천할 만한 자가 있는가?”
“실은, 조금 더 알아보고 있습니다.”
“너무 서두를 필요 없네. 실은 주변에서도 몇 추천을 받긴 했는데, 때마침 지금 호위기사인 페드릭 경이 근위기사 직을 지원하더군.”
‘…페드릭 경이?’
레온나토스의 뒤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가슴을 탕, 치며 말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진정 황위를 노리신다면, 이 페드릭이 힘이 되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본바 전하께서는 능히 그럴 능력과 자격이 되시니까요.”
젊은 기사 페드릭이 한 말은 꽤 정확했지만, 아렌은 고민했다.
‘흠, 페드릭 경이라. 별로 기억에 없는데.’
아렌은 20년 뒤까지의 미래를 알고 있다.
물론 지금은 아렌이 알고 있는 미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었지만, 아렌이 알고 있는 미래에 두각을 드러낸 자라면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아렌이지만, 페드릭 경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물론 그가 흙 속에 파묻혀있던 비운의 진주였을 수도 있겠지만, 방금 확실한 흙 속의 진주를 놓치고 온 이상 썩 탐이 나는 인재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긴 한가? 사냥대회에 몸을 지킬 무사 하나쯤은 필요하고. 나중에 쳐내더라도 지금은… 응?’
“…무슨 소란이지?”
경비병 여럿이 좁은 복도를 막아 세우고 있었다.
누군가를 들여보내지 않기 위함인 듯했지만, 정작 경비병 여럿이 달려들어 막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이었다.
‘…더글라스?!’
여전히 경비병의 복장을 한 채, 경비병들을 밀쳐내며 다가오는 더글라스.
온몸이 거름 투성이인 더글라스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복도에 질척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경비들이 창날을 세우지 않은 건 더글라스가 단검조차 없는 비무장이었기 때문이고, 설령 창날을 세웠더라도 더글라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더글라스가 한번 밀칠 때마다 앞을 막아선 경비들은 우스울 정도로 쉽게 공중을 날았으니까.
페드릭 경은 반사적으로 레온나토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합니다, 전하. 자리를 피하시지요.”
“…아니. 어떤 적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구나.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
“…온몸에 분뇨를 묻힌 자를 말입니까?”
더글라스는 경비병 다섯을 우습게 제압하며 다가오고 있었고, 경비들은 이제 옛 동료에게 진심으로 창날을 드리워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더글라스가 아렌을 발견했다.
“-아렌!”
“…아렌? 저자가 아렌 자네를 아나?”
“…조금 압니다.”
더글라스는 경비 다섯을 뿌리치고 아렌을 향해 달려왔고, 그 앞을 페드릭 경이 막았다.
“멈춰라. 궁 내에서도 유명한 주정뱅이가, 이젠 똥칠까지 하고 왔군. 감히 황자 전하 앞에서, 무엄하다.”
페드릭으로선 자신의 유능함을 알릴 기회였다. 뒤늦게 달려온 경비들에겐 눈짓으로 관여하지 말라 한 뒤, 더글라스에게 다시 고압적인 시선을 보냈다.
“이제 귀까지 먹었나? 얼른 자리를 뜨라고 말했다!”
“거기 있었다.”
“…뭐라고?”
더글라스는 한 번도 페드릭 경에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분뇨 투성이 경비병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아렌에게 고정된 채였다.
“아렌 네 말대로 거름통 안에 있었다. 정작 훔친 주제에 무서워서 팔지도 못하다니, 그런 병신이 따로 없지. 이웃이랍시고 그런 도둑새끼랑 웃으며 지낸 나도 병신이고.”
더글라스는 페드릭 경을 사이에 둔 채, 아렌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사의 서임식을 방불케 하는 모습.
분뇨 투성임에도, 더글라스의 자세는 어딘가 경건함이 있었다.
“나 더글라스는, 시종 아렌이 섬기는 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를 섬기겠다. 아니, 섬기게 해다오.”
“…….”
“…….”
아렌도, 그 뒤에 있는 레온나토스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더글라스와 가장 가까이 있던 페드릭이었다.
“…이 새끼가, 미천한 경비 주제에 건방지게 기사 서임을 흉내 내?”
온몸에 거름을 묻힌 채 궁에 들어와, 자신에겐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다. 더글라스가 마음에 들 리 없는 페드릭이다.
더글라스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려던 페드릭. 그러다 그의 어깨에 묻은 분뇨를 보고 생각을 바꿔 발을 들어 올렸다.
장화 밑창으로 더글라스의 어깨를 가볍게 밀칠 생각으로.
하지만 페드릭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더글라스는 장화 뒷굽을 잡고 위로 쭉 들어 올렸다.
번쩍, 페드릭의 한쪽 다리가 우습게 치켜 올라갔다.
꽈당,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은 페드릭.
그리고 더글라스는 여전히 페드릭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검술과 창술, 궁술 모두 기본만 겨우 하는 미천한 몸입니다만 제 목숨보다 귀한 것을 황자 전하의 시종이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요청대로, 제 목숨을 전하께 바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기본만 한다고?’
기가 막히는 심정의 레온나토스였다.
레온은 알고 있었다. 황족을 바로 가까이에서 지키는 호위기사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하는지.
비록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페드릭을 맨손으로 저리 쉽게 쓰러뜨린 자의 실력이 겨우 기본만 할 리는 없었다.
“…이 새끼가 감히!”
스르릉.
황자 앞에서 추태를 보인 페드릭 경은 분에 못 이겨 곧바로 검을 뽑았다.
레온나토스는 뒤로 물러났고, 시녀로 따라 온 암살 시종 멜로익은 몸을 굳힌 채 품속에 숨겨둔 단검을 꽉 쥐었다.
궁 안에서 장검을 소지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예외를 제하면 황족과 그 호위, 근위기사 뿐.
언제든 눈먼 칼은 매섭다. 꼭 칼을 뽑아야 하는 상대가 아닌 이상, 황자 앞에서 먼저 칼을 뽑는 건 호위로서는 낙제점이다.
그것도, 엎드려있는 상대가 맨손이라면 더더욱.
“그 더러운 몸뚱이를 꿰어주지!”
“잠깐, 페드릭 경! 너무 지나친-”
지나친 손속은 쓰지 마라, 고 레온나토스가 소리치려 했지만, 페드릭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비록 널찍한 복도였지만 주변엔 황자와 다른 시종들도 있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았고, 자연히 페드릭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궤적에도 한계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페드릭의 검 궤적은 단순한 일직선이 되었고, 더글라스는 미래라도 보고 온 듯한 움직임으로 페드릭에 달라붙었다.
더글라스를 향해 찔러진 검은 몸을 바짝 숙인 더글라스의 등 뒤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대로 낮게 접근한 더글라스가 와락, 페드릭의 허벅지를 끌어안은 채 일어섰다.
“-우와악!”
몸이 번쩍 들린 페드릭은, 공중에서 몸이 뒤집혀 곧바로 목덜미부터 돌바닥에 처박혔다.
-꾸웅!
바닥으로 추락한 페드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숨조차 헐떡이지 않은 채 고요히 말했다.
“…감히, 호위기사씩이나 되는 자가 전하 곁에서 함부로 검을 뽑다니.”
“…….”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제 온몸에 오물을 묻힌 경비병을 얕잡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까지다, 더글라스!”
“…경비대장님?”
어느새 나타난, 창과 활로 완전무장한 경비병 스물이 더글라스를 완전히 에워쌌고, 황궁 경비대장의 낯빛은 꺼멓게 죽어 있었다.
자신의 부하가 사라졌다 싶더니, 느닷없이 황궁 한가운데서 추태와 난동을 부리면 그럴 만도 했다.
“더글라스. 그토록 술을 처마시더니 드디어 돌아버린 거냐? 감히 황자 전하 앞에서!”
“대장님.”
“당장 투항해라! 이미 선을 심하게 넘었어! 그러지 않으면 고슴도치가 될 거다!”
창의 벽 뒤에서 병사들이 활 시위를 당겼고, 더글라스는 거기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아렌을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잠깐 눈이 돌아간 모양이군. 대장님께도 적지 않게 신세를 졌고, 이 이상 말썽을 부리는 건 도리가 아니겠지. 너도 곤란하게만 만든 모양이구나.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 아렌.”
마지막으로, 더글라스는 레온나토스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럼 황자 전하. 평강하십시오.”
“…….”
병사들이 다가와 더글라스의 오물 투성이 몸을 바닥에 억눌렀다.
이미 사안이 사안이라 오물따위에 겁먹은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은 채, 더글라스는 경비들의 제압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때였다.
“이 자로 하겠다.”
“…황자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껏 잠자코 있던 레온은 좌중에 똑똑히 들리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는 전직 황궁 경비병이었던 더글라스를 내 근위기사로 임명하겠다!”
레온나토스의 말이 무슨 속뜻을 가진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경비대장은 허리를 숙였다.
“하오나 전하. 이놈은 평민 출신으로 경비병에서도 파직된 자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또한, 주정뱅이에 근무태도도 좋지 않고 오늘도 이렇게 큰 소란을….”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레온나토스가 일갈했다.
제12 황자의 분노. 보기 드문, 아니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한 장면에 사람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주정뱅이라서, 평민이라서, 경비병이라서. 몸에 분변을 묻혀서! 짐의 근위기사가 될 수 없다, 그 말인가? 그렇게 추리고 추리면 짐 곁에는 누가 있어야 하는가. 그런 채는 누가 만든 것인가. 어째서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채가 짐보다도 먼저 인재를 걸러낸단 말인가!”
“…….”
“그렇게 따진다면 짐 또한 황태자가 될 수는 없겠구나. 형님들에 비해 어리고 무예도 약하며 날 지지하는 자들도 적으니까 말이다!”
“…….”
“대답하라! 방금 전까지 여러 잣대를 들이밀며 즐겁다는 듯 떠들지 않았느냐!”
“그,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레온나토스는 황권을 천명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하지만 딱히 원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바로 얼마 전, 레온나토스를 노린 암살시도가 있었다. 암살을 시도한 쪽은 자신만의 어떤 의도가 있어 레온나토스를 노린 것이겠지.
레온나토스 스스로 명확히 자각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외야의 사정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레온에게 꽤나 불쾌한 것이었다.
“이미 난 마음을 굳혔다. 내 가신에게 입은 은을 내게 보답한다니, 기사로서 이보다 나은 마음가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감히, 황자의 근위기사에게 위력을 가하겠다는 말인가? 그건 곧 내게 위력을 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냐 말이다!”
“저, 전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열 살 배기 황자의 서슬 시퍼런 일갈이 좌중을 내리쳤다.
그 말에 대꾸할 수 있는 자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전하!”
더글라스를 끌어내기 위한 경비들과 주변에 모여들었던 궁인들, 경비대장까지 모두 복도에 납작 엎드렸다.
아렌도, 시녀들과 암살 시종 멜로익도 역시 황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처음부터 바닥에 제압되어 있던 더글라스 역시 마찬가지.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오직 레온나토스 뿐이었다.
레온나토스는, 손에 묻는 오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글라스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나,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는 무사 더글라스를 짐의 근위기사로 임명한다. 경은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전하!”
더글라스의 맹세가 이어지고, 그 외의 모두가 숙이고 있는 사이.
아렌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았어!’
아렌과 레온나토스를 둘러싼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