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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0화 (10/227)

#010화

“너….”

감히 죽은 아내의 유품을 거론하다니.

죽은 아내의 유품은 말 그대로, 더글라스에겐 역린이었다.

눈앞의 되바라진 꼬마를 당장 치워보려 했지만, 더글라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깐만. 이 자식이 말하는 내용이, 신통하게 맞기는 하단 말이지.’

한번은 믿어본다.

후에 헛다리를 짚었을 때, 그때 화를 내도 늦지는 않으니까.

이미 아내의 유품을 잃어버린 후, 더글라스는 근 1년 동안이나 집과 마을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음에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렌이 유일한, 마지막 동아줄이나 마찬가지.

아렌이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그럼, 받아들이신 겁니까?”

“…어디, 실력이나 보자고.”

“휴, 다행이군요. 그럼 더글라스님의 준비가 되는대로 언제든 연락을….”

“지금 당장은 못하나.”

“…지금 당장이요? 그야 가능은 하지만 지금은 근무 중….”

“따라와라.”

덥석, 아렌의 손목을 붙잡은 더글라스는 길옆으로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황궁에도 길은 있다. 그리고 길과 길 사이에는 딱히 용도도 없이 녹음만 우거진 으슥한 공간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아주 잠깐만 걸어들어왔을 뿐인데, 어느새 아렌과 더글라스는 마치 깊은 숲속 한복판에 뚝 떨어진 듯한 모양새였다.

“…이런 곳이 있었네요?”

“여긴 아는 사람도 몇 명 없어. 전날 많이 마셨을 때, 가끔 짱박힐 때나 쓰는 곳이지. 여기 외에도 몇 군데 더 안다고.”

“…….”

‘얼씨구, 자랑이다.’

하지만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건 아렌에게도 좋은 일이다.

“네. 이곳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래서, 뭘 할 거냐.”

“혹시, ‘기억 낚시’라고 아시나요?”

“…기억 낚시?”

생소한 단어에 더글라스는 눈만 끔뻑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중간하게 알 바에, 아예 깨끗하게 모르는 편이 더 낫다.

“우선, 유품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거죠?”

“그래. 일어나보니 감쪽같이… 하지만 있을 만한 곳은 다 살펴봤다고. 아마 술집에 뒀다가 누가 가져갔거나 어디 진창에라도….”

“일단 눈을 감아주시죠.”

“…….”

무슨 일을 할 건지도 모르지만, 더글라스는 속는셈 치고 눈을 감았다.

아렌은 더글라스의 숨소리에 맞게 속도를 맞춰 속삭이듯 말했다.

“…어둡고 깊은 물웅덩이를 떠올립니다.”

“……?”

“마음속 깊이, 하나, 둘, 셋을 셉니다. 그럴수록 마음의 수면은 잠잠….”

“이봐. 이게 무슨…!”

“아내분의 반지를 찾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

더글라스는 얼른 눈을 감았다.

잃어버린 아내의 유품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아렌은 자연스레 반지라고 말했으니까.

물론 아렌의 넘겨짚기였다.

더글라스가 아직도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고, 항상 소중히 여기는 듯 반짝반짝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유품을 잃어버리고 집과 마을까지 뒤집어엎었다는 건 그만큼 작고, 다른 사람이 탐낼만한 귀중품이라는 의미였다.

높은 확률로 결혼반지라 짐작한 아렌의 예상은 적중했다.

더글라스는 더는 의심하지 않고 눈을 감았고, 아렌은 더글라스의 심지에 박아넣듯 천천히 말했다.

“…검은 수면 위, 촛불이 하나 떠오릅니다. 일렁이는 불꽃은 둘, 셋, 점점 수를 늘려갑니다.”

“…후우…”

더글라스의 호흡이 점차 느려졌다.

사람을 유사 수면 상태에 빠트린 다음,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들을 낚아 올리는 ‘기억 낚시’는, 유랑족 사람들이라면 왕왕 즐기는 것이었다.

초원의 밤은 길다. 유랑족은 긴 밤을 지새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고, 기억 낚시도 좋은 유희거리 중 하나였다.

원래라면 각종 환약과 술 등을 곁들여 이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야 했지만, 더글라스에게는 불필요했다.

‘매일매일 곤죽이 되도록 술을 마시니까.’

유사 수면 상태는 만취 상태와 흡사했다. 항상 술에 절여지다시피 한 더글라스에게는 다른 약물의 도움 없이도 기억 낚시 도입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습-하, 습-하…”

더글라스의 숨소리가 충분히 고요해졌을 때, 아렌은 그의 무의식에 대고 물었다.

“잠잠한 수면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어 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죠?”

“…메이, 메이의 결혼반지…”

“찾을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봤나요?”

“…힘닿는 데까진, 전부…”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방금의 대답은 더글라스가 마음속 깊이 동의하는 진실일 터.

아렌은 더글라스의 기억의 수면 아래로 더 깊이 손을 뻗었다.

“자, 조금 더. 점점 더 깊이 침잠하기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흐릿한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

“반지가 아직 손에 있던 순간으로 내려갔나요?”

“…그래.”

“반지는 어디 있죠?”

“…실에 꿰어서, 목에다가.”

“조금씩, 시간을 뒤로 당깁니다. 반지는 계속 목에 있나요?”

“…그래.”

“목걸이가 당신의 손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으로 갑니다. 그걸 언제 마지막으로 벗죠?”

“…답답해서 목에서 풀어.”

“그때 당신은 취해있었군요. 그리고?”

“…침대 옆, 탁자 위에…”

“하지만 일어났을 때는 거기에 없었죠.”

‘…여기까진가?’

기억 낚시는 만능이 아니다. 기억 속 아주 사소하게 파편으로만 남은 기억도 억지로 끌어올릴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직접 보고 겪은 일이 아닌 한 낚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글라스가 반지를 탁자 위에 뒀고, 그게 기억의 마지막이면 반지를 찾을 가능성은 없다.

아렌은 마지막 수를 쓴다.

“탁자 위에 두고, 누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아니! 당신은 듣고 있었습니다.”

수면 상태에서도 뇌는 깨어 있고 귀는 열려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 할 뿐.

밤중 침입한 누군가가 더글라스의 반지를 훔쳤다면, 더글라스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깊은 밤, 당신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청하지 않은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

“당신은 그걸 들었지만, 깨어나지 못했죠. 하지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려.”

“아는 목소리인가요?”

“…….”

“…….”

잠시간의 침묵. 아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집 건너 사는 오르텐.”

‘좋았어!’

*****

더글라스의 기억을 낚아챈 후, 이제는 다시 의식을 수면 위로 끄집어올릴 때였다.

“자, 당신 머릿속에 있던 촛불은 셋에서 둘, 점점 하나가 됩니다. 그럴수록 의식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

짝! 아렌은 손뼉을 쳤다.

멍한 모습이었던 더글라스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허억!”

“반지가 어디 있는지 알겠어요?”

기억낚시로 한 대답이라도, 본인은 기억하고 있다. 무의식일 뿐 대답한 것은 엄연히 자신이기 때문에.

“…오르텐? 설마, 그 자식이! 하지만 마을을 다 뒤집었을 때는 전혀 찾을 수 없었는데…”

“당연히 찾을 수 없도록 꼭꼭 숨겨뒀겠죠. 그러니-”

“당장 가봐야겠어.”

“…어, 지금이요? 아직 교대 인원도 오지 않았는데-”

애초에 더글라스는 근무를 성실히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잠깐 농땡이를 피우는 것과, 교대도 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뜨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돌아왔을 때 직업이 없어진 건 둘째치고, 어쩌면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더글라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의 조언은 모두 타고난 고수인 더글라스를 영입하기 위한 것.

그로 인해 징계를 받는다면 본말전도다.

그리고, 벌써 오래전 잃어버린 반지라면 찾기 힘든 곳에 꼭꼭 숨겨뒀거나 벌써 현금화를 해뒀을 터.

‘…아니, 팔아치우지는 않았을까. 더글라스도 장물아비는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테고, 마을 사람의 행동반경이야 뻔하니까.’

“하아, 어쩔 수 없죠. 저도 같이 갈게요.”

“…네가 말이냐?!”

“혼자 가서 어쩔 거에요? 멱살 붙잡고 협박이라도 하게요? 하지만 안 먹히면요? 어차피 증거라곤 없는데.”

“그건-”

“제가 가면 도움이 될지 몰라요. 황자님께 허락은 못 얻었으니 날이 저물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할 테지만.”

“…고맙다.”

“뭘요.”

처음엔 단지 영입을 위한 말이었지만, 아렌은 더글라스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렌 역시, 어머니가 준 흑옥반지를 평생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단순한 상징 이상으로, 아렌의 목숨을 한번 되살려줬다.

아렌은 습관적으로 흑옥 반지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익숙한, 만져야만 느낄 수 있는 가느다란 실금의 감촉과 함께.

*****

황궁에서 무단으로 빠져나온 더글라스는, 곧바로 용의자인 오르텐의 집으로 향했다.

꽁지머리에 마른 체격의 오르텐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더글라스를 보자마자 몸을 굳혔다.

“어, 더글라스? 여긴 왜-”

콰악!

오르텐의 멱살을 끌어올린 더글라스.

말라깽이 청년의 두 발이 공중에 붕 떴다.

“켁, 케엑!”

“말해! 네가 메이의 반지를 훔쳤나!”

“무, 무슨 말이야! 내가, 커흑!”

“말하라고!”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오르텐의 멱살을 잡아 흔들던 더글라스가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고, 쓰러진 오르텐은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더글라스를 올려다봤다.

“더글라스! 항상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 무슨 짓이야! 벌써 한참도 더 전에 잃어버려 한번 마을을 뒤엎었잖아! 이제 와서 뭘!”

“그, 그건-”

아내의 유품에 귀중품이니 처음 잃어버렸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수색에 기꺼이 협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색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 허점은 찾으려면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 발견 안 된 것을 몇 번이고 다시 수색해 보기도 힘들 터.

더글라스 역시 아렌의 기억 낚시 하나만을 믿고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집을 한 번 더 수색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이번에도 찾지 못한다면.

더글라스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죠?”

스윽, 아렌이 앞으로 나왔다.

“…더글라스. 이 꼬맹이는 누구야”

“전, 점술가 아렌이라 합니다. 배후령을 볼 수 있지요. 배후령은 때론 이치가 닿지 않는 곳의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니까요.”

“…뭐라고?”

미심쩍은 말투.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렌의 ‘점술’은 던진 말에 상대가 하는 반응을 보면서 답을 유추해나가는 것.

상대방의 반응을 잘 끌어내기 위해선 이름값이든 분위기든 사용해 상대방을 이쪽에 단단히 몰입시켜야 했다.

배후령 운운한 말은 그것을 위해서였다. 대부분 콧방귀를 뀌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아주 티끌만 한 의심도 아렌에겐 더 유효했을 테니까.

“당신이 더글라스의 아내 유품을 훔쳤나요?”

“무슨 헛소리야!”

하지만, 그 말과 동시에 오르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누구든 거짓말을 할 때 약간의 저항감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행동을 한다.

눈을 피하는 것도 그중 하나. 아렌은 더욱 확신했다.

“훔쳤군요. 그건 벌써 팔았나요?”

“훔치지 않았다니까!”

눈을 치켜뜨고 악에 받쳐 소리치는 오르텐.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아렌의 말에 대답을 피한 데서 온, 억지로 짜낸 당당함 때문이었다.

“흠, 벌써 팔았군요.”

“…….”

아렌의 떠보기에 오르텐의 어깨가 조금 이완됐다. 사실은 팔지 않았는데, 아렌의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안심감 때문이었다.

‘역시 아직 반지를 가지고 있군. 다행이야.’

“아, 다시 보니 역시 가지고 있는데요?”

“……!”

“그럼, 어디에 있을까요. 마을 밖? 그게 아니면 집안? 아, 집안이군요. 그럼 창고? 부엌? 밭? 아하. 밭 주변이네요. 그럼….”

이미 오르텐은 아렌에게 완전히 말려 있었다. 아렌을 더 경계하고 긴장하면 할수록, 아렌의 말에 대한 반응 역시 즉각적으로 오니까.

“농작물, 울타리, 거름통, 오두막, 냇가… 아, 거름통 아래로군요?”

“무, 무슨 소리야!”

“더글라스. 오르텐의 밭 거름통 아래는 살펴봤나요?”

“…아니. 거름통 아래까지는…”

웬만한 확신이 없고서는 똥통 아래까지 뒤지질 못 할테니, 확실히 장물을 숨기기엔 적합한 곳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마을 사람들에 단단히 붙잡힌 채 거름통으로 향하는 오르텐.

그 사이 아렌은 돌아섰다.

‘…설령 반지를 찾더라도 다시 황궁으로 복귀는 못하겠지.’

자신이 맡은 구역을 멋대로 이탈한 뒤 교대까지 마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선 곧바로 처벌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 파직으로만 끝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더글라스를 영입하기 위해서 힘을 썼지만, 결과적으론 좋은 일만 하게 된 셈.

잠시 뒤.

오르텐이 끌려간 밭 방향에서 마을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반지와 오르텐이 훔친 다른 물건들 역시 발견된 것이겠지.

‘다행이군, 더글라스.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비록 이번엔 더글라스를 영입하지 못했지만, 황궁 안에 있는 발견되지 않은 원석은 더글라스 외에도 많았으니까.

아렌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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