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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9화 (9/227)

#009화

아렌의 기습적인 말에 아라흐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요? 복채가 있다고? 이거 순 날강도 아녜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핫, 설마!”

와락, 자신의 몸을 감싸고 뒤로 물러서는 아라흐네.

“설마 욕실에 무작정 들어온 것도 내 몸을 노리고?”

“…….”

‘꼬맹이가 못 하는 말이 없네.’

황당한 아렌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아렌도 몸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어떤 오해인지 대충은 알겠지만, 그런 일은 없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전 단지, 약간의 협력관계가 되면 그걸로 족하니까요.”

“…협력?”

“네. 당신께 정보를 드리죠.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무도 모르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그쪽 정보는, 점술이겠죠? 복채는 이쪽에서 제공하는 정보고? 하지만 그건 마치….”

“마치, 간자 같나요?”

“…….”

아라흐네는 망설였다. 아무리 아렌의 점이 용하다고 해도, 아렌이 말하는 일은 황궁에서라면 자칫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렌은 아라흐네의 걱정을 사전에 막았다.

“물론 저도, 그쪽에 너무 깊은 정보를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곤란하게 하는 건 제 본의가 아니거든요. 이쪽에 제공해도 괜찮다 싶은 정보, 그거면 족해요.”

“흠… 그리고 이쪽이 준 정보만큼 점을 볼 수 있고요?”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번은 제가 제멋대로 본 점괘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도 점을 보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가져와라.

그리고 질문을 던진 아렌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잘 들어맞는 점괘는 마약과도 같지.’

불확실한 미래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안심감은 마약에 비견될 정도로 중독성이 심하다.

처음엔 간단한 정보만 넘겨줄지 몰라도, 아렌의 점에 빠져들게 되면 온갖 귀중한 정보들을 하나씩 풀게 되겠지.

아라흐네는 자신의 미래도 모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어차피 이건, 며칠 내로 알려질 내용이니까 지금 말해도 상관없겠죠.”

큼흠, 아라흐네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했다.

“곧, 황궁 내 큰 행사가 있을 거예요. 무슨 행사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요.”

“큰 행사라. 제 점괘대로군요.”

실은 아라흐네도 사냥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것까지 말하는 건 너무 많이 누설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아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좋은 활약을 한 황자는, 선물을 받죠.”

“무슨 선물이죠?”

“그건…”

잠시 망설이던 아라흐네는, 이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이번에 새로이 신설되는 제8 기사단이요.”

어차피 며칠 안에 밝혀질 내용이니, 그녀는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물론 원래라면 황궁의 내원 바깥으로 유출될 리 없는 고급 정보들이었겠지만 2회차 인생을 살고 있는 아렌에겐 모두 다시 떠오르는 뻔한 정보들 뿐.

하지만, 아렌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 무리한 제안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소한 일도, 차기 황제를 뽑기 위한 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곧 있을 사냥대회에서 가장 돋보인 황자는 황제가 새로 꾸린 기사단을 하사받게 된다.

국가나 황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황자에게만 충성하는 무력 집단.

황자의 세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레온 황자도, 슬슬 세력을 갖춰가야겠지.’

*****

테오드릭 황자와 막 대련을 끝낸 레온나토스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렌은 수건으로 레온의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하.”

“수고는 무슨. 지금껏 검을 소홀히 한 대가인데. 더 고생해야지.”

지금껏 검을 소홀히 했다지만, 레온나토스는 고작 열 살이었다.

아렌은 조심스레 물었다.

“검술 말고도 다른 무예는 많지 않습니까. 활이나 창 같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검을 멀리했는데 다른 것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나.”

물론, 아렌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방금 말은 앞으로 꺼낼 말의 복선.

‘그렇겠지. 역시 사냥대회에서 별다른 활약은 기대 못 하겠어. 결국 남들처럼 대리 엽사를 구하는 수밖에 없나?’

당연히 황자들 중에도 사냥이 서툰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 사냥대회에서 활약 못 하는 건 당연하고, 그것이 황제가 되는데 결격사유가 되는 건 아니다.

사냥이 황제의 덕목은 아니니까.

군주는 자고로 남을 부리는 자. 그 아래에 우수한 엽사가 있다면, 그것 또한 군주의 역량이었다.

황권에 도전하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벌써 율법가와 기사, 상인을 곁에 두는 황자마저 있을 정도.

레온 황자는 너무 욕심이 없기에 그런 것에 특히 더 둔한 편이었다.

“혹 앞으로도 배우셔야 한다면, 곁에 근위기사를 고용하시는 건 어떨까 하여 여쭤봤습니다.”

“근위기사? 내겐 이미 폐하께서 붙여준 호위기사가 있다만. 혹시 나만을 섬기는 기사를 뜻한다면 그건 너무…”

레온나토스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황제가 붙여준 호위기사는 물론 믿음직하지만 어디까지나 충성의 대상은 황제 그 자신뿐.

아렌이 말한 근위기사는 황제가 아닌, 제12황자 레온나토스만을 섬기는 자를 의미했다.

극단적으로 레온나토스와 황제의 입장이 상충한다면 레온의 근위기사가 서야 할 곳은 레온나토스의 옆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황자 개인의 근위기사가 된다는 뜻은 그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위에 별다른 욕심이 없는 자의 근위기사가 된다는 건 곧, 앞으로의 출셋길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였으니까.

요청을 하는 쪽도, 받아들이는 쪽도 무안해질 수 있었다.

언젠가는 레온에게 필요한 존재였지만, 지금 당장은 레온나토스가 원하지 않을 거라 아렌도 짐작하고 있었다.

‘흠, 역시 시기상조였나.’

“역시 그렇겠지요.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그렇다면 다른 수를….”

“아니, 좋다.”

“…네?”

“마침, 개인지도를 해줄 실력 있는 자를 구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군. 주변에서 쓸만한 자를 추천받도록 하마.”

어째서인지, 황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영문은 모르지만 이걸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제가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호오. 네 추천이라. 너도 쓸만한 기사를 아느냐?”

“그건, 아직은 모릅니다만.”

“아아, 무슨 말일지 알 것 같다.”

레온은 아렌의 주머니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카드 뭉치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점술을 쓸 셈인가.”

“네.”

아렌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고로 날개 달린 짐승은 날고, 지느러미 달린 짐승은 헤엄쳐야 하는 법이니까요.”

*****

레온나토스는 잠시 방에서 쉰다고 하고, 아렌은 점술을 본다는 명목으로 황자의 방에서 나왔다.

“방금 조언은 잘했어.”

어느새 따라 나온 멜로익이 아렌에게 말했다.

“잘했다니, 뭐가?”

“전하의 근위기사 말야. 황제 폐하께서도 호위는 붙여주시지만, 앞으로 갈수록 황제 폐하가 아니라 황자 전하께 충성하는 자들이 더 필요해질테니까… 어라?”

말을 하다 말고 킁킁, 코를 쫑긋이는 멜로익.

“어쩐지, 뭔가 좋은 냄새가 난다? 유황 냄새랑… 여자애 냄새?”

“냄새는 무슨.”

‘…무슨 개코도 아니고.’

“그보다, 필요한 말이었다면 나한테만 닦달하지 말고 필요하면 너도 그렇게 간언하지 그래?”

“암살 시종은 절대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걸? 지금은 이례적으로 너에게 들켰을 뿐이지만. 그나저나 황자님은 그렇다 치고, 기사는 어떻게 설득할 거야?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레온나토스 전하를 믿고 몸을 맡길 쓸만한 기사가 있을까?”

확실히 그건 어려운 문제였다.

우수한 기사는 출세를 꿈꾼다. 당연히 다음 황위에 가망 없는 황자의 밑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한직을 원하는 기사는 게으르다. 그들이라면 가망 없는 황자의 밑으로 기꺼이 들어올 테지만, 그런 자를 굳이 찾아 등용할 필요는 없다.

그 절충을 찾는 일이 까다롭겠지만, 아렌에겐 이미 생각이 있었다.

“실은, 벌써 생각해둔 사람은 있어.”

“…역시, 점이든 뭐든 미리 점찍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누군데?”

“모를 수도 있어. 외궁 경비병 더글라스라고.”

넓디넓은 황궁 전체를 지키는 경비병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의 이름이 모두 알려지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멜로익은 이름을 듣고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술주정뱅이를? 제정신이야?”

*****

경비병 더글라스.

성의 보안을 맡은 경비병은 일반병사보다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지만, 더글라스에겐 경비병보다도 다른 별명이 더 어울렸다.

‘술주정꾼 더글라스’

비록 근무 중 술을 마시진 않지만, 근무가 끝나자마자 침대가 아니라 술통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더글라스는 지독한 술고래였다.

취기가 진탕 오른 얼굴의 코끝은 항상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술에 진탕 취한 뒤 근무시간에 지각한 적도 여러 번.

그 정도 근무태도면 당장에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더글라스는 잘릴 뻔하면서도 지독하게도 잘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

더글라스는 타고난 검사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검술 좀 잘하는 녀석으로 알려졌을 뿐이겠지만.’

아렌이 열일곱이 되던 해.

황제는 전 황궁의 무사를 대상으로 한 검술대회를 열었다.

황자 자신이 출전할 수도 있었고, 그 대리인은 물론 황궁의 누구든 참가 자격이 주어진 대회.

그곳에서 이긴 자에겐 황궁제일검이라는 영예가 주어진다. 황궁제일검이 누군가의 수하라면 그를 거느린 자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황자들 역시 거느린 온갖 고수들을 내세웠고, 몇몇 무재가 돋보이는 황자는 직접 참가도 했지만 정작 거기서 우승한 건 어떤 황자와도 연결되지 않은 무연고의 경비병, 더글라스.

물욕도 명예욕도 없던 더글라스가 대회에 참가한 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부상, 50년 묵은 증류주 한 통 때문이었다.

‘그 후 몸값이 치솟고, 결국 제4 황자 밑으로 들어가게 됐지만.’

아무도 주목하고 있지 않은 지금이 그를 선점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물론, 아렌과는 별 접점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른다는 게 흠이었지만.

아렌은 황궁의 외원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키고 있는 더글라스를 만났다.

현재 스물일곱인 더글라스는,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이미 코끝이 빨갰다. 어젯밤에도 진탕 마시고 왔다는 뜻이다.

시종 꼬마의 시선을 느낀 더글라스는 손사래를 쳤다.

“뭐냐, 꼬마야. 저리 안 가냐?”

“실은, 제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더글라스님.”

“네가, 나한테? 그거 별일이군.”

“혹시, 레온나토스 황자 전하의 근위기사를 맡으실 생각은 없습니까.”

황자의 아래로 들어갈 수있다는 제안.

처음부터 콧대 높은 기사라면 모를까, 경비병이라면 두말없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병사인 나에게, 기사를 하라? 퍽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들고 온 모양인데, 원래 달콤한 술이 숙취가 더 센 법이거든?”

“듣기로 검술이 익히 강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칼? 나만큼 쓰는 녀석은 널리고 널렸는데 뭐. 어차피 신분이 있어야 기사가 되고, 연줄이 있어야 붙잡고 올라간단 말이지.”

“평민 출신의 기사도 많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지체 높으신 분들 밑에 깔아주는 용도로. 일없으니 그만 돌아가.”

더글라스는 더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더이상 노력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유형의 사람.

이런 사람을 자극하는 건 간단하다.

“아쉽네요. 그렇게 지레 포기하시다니. 술만 줄이면 더 높이 갈 수도 있을 텐데요.”

“…어이, 꼬마야. 지금 황자 전하를 섬긴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왜 자신을 망칠 정도의 술을 매일 마시죠? 혹시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잊고 싶은 건가요?”

“이게 슬슬, 뚫린 입이라고-”

“아, 그런가요.”

더글라스는 ‘안 좋은 추억’이라는 대목에서 반응했고, 아렌은 거기서부터 심리를 파고 들어갔다.

질문이라는 낚싯대로 심리를 헤집고, 물고기처럼 걸려든 반응을 끄집어낸다.

“혹시 실연이었나요? 음,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군요. 사별? 맞네요. 하지만 그것도 직접적 이유는 아니에요. 상실? 잃어버렸다, 맞죠? 혹시….”

“이봐, 보자 보자 하니까!”

“사별한 아내분의 유품을, 잃어버린 거군요.”

“…….”

“더글라스 님은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요. 맞죠?”

“…….”

더글라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거기엔 분노도 섞여 있었지만,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그럴 수밖에.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사실을, 오늘 처음 본 시종 꼬마의 질문 몇 번에 낱낱이 파헤쳐져 버렸으니까.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 술주정꾼 더글라스와의 별다른 접점은 없었다.

하지만, 아렌은 거기서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갔다.

“제가 찾아드리죠.”

“…뭐라고?”

“아내분의 유품을 제가 찾아드리면, 황자님의 근위기사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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