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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8화 (8/227)

#008화

욕탕 안은 수증기로 자욱했다.

아라흐네는 유백색의 탕에 몸을 푹 담궈 몸을 감추기 급급했다.

하지만 아렌은 멀뚱멀뚱 아라흐네의 벗은 몸을 별 의미 없이 바라봤다.

아라흐네의 몸은, 흡사 아직 다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았다.

물론 아렌은 아라흐네의 미래, 꽃이 만개했을 때의 모습을 알고 있지만.

“뭘 빤히 보는 거예요! 얼른 안 나가?!”

“아, 실례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용건이라 이런 식으로 무례를-”

“지금 예의 갖출 때냐고요! 눈을 감든지 빨리 나가요!”

“일단 나가면, 제 말을 들어줄 건가요?”

지금 잘못한 것은 아렌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라흐네.

아렌은 오히려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조건을 붙였다.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은 아라흐네로서는 덜컥 수락할 수밖에 없는 조건.

“일단 옷 입으면 무슨 말이든 들어는 볼 테니까, 얼른!”

“약속하신 겁니다. 그럼.”

아렌은 탕을 나가 입구를 향해 뒤돌아 서 있었다.

잠시 후, 작은 몸이 탕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씨익씨익 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아라흐네.

뒤돌아 있으면서, 아렌은 생각했다.

‘아라흐네는 처음엔 검은 면사포를 쓰고 있지 않았어.’

표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암호를 해독하듯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그냥 예사로 본다고 절로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검은 면사포를 쓰지 않았던 결혼 초, 아라흐네는 분명 아렌을 배신할 낌새가 없었다.

‘날 배신한 건 아마, 도중 검은 면사포를 쓰게 된 이후일 거야.’

아라흐네만이 아렌을 죽인 원흉은 아니겠지만, 거기 일조했다는 건 씻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걸 깨끗하게 용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의 아라흐네가 그 잘못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따라서 아렌은 아라흐네를 사양 없이 이용함으로써 그 죗값을 갈음할 생각이었다.

“저기요, 그래서 왜 절 보자고 하신 거예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면서까지?”

아렌이 돌아선 사이 옷을 갈아입은 아라흐네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혹감과 분노와 부끄러움이 섞인 아라흐네는, 밤중 테오드릭의 단검을 가져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렌은 문득 결혼 초 아라흐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서방님은, ‘황제의 눈’에 대해 알고 있나요?]

[그야. 황궁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지. 황궁 곳곳에 존재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걸 황제께 직접 보고하는 자들이잖아?]

[실은 제가, 황제의 눈 출신이었답니다.]

[…그거, 그렇게 쉽게 알려줘도 되는 건가?]

[지금은 황제의 눈이 아니니까요. 물론 그 출신이었다는 것도 알려져서 좋을 건 없지만, 제 서방님이잖아요?]

[하긴, 이렇게 비밀을 하나씩 밝히는 것도 서로 금슬을 위해 좋겠지.]

[서방님은 제게 말해줄 게 없나요?]

[물론, 내게도 비밀이 하나 있지.]

[서방님의, 비밀이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점술은 사실 점술이 아니라-]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아득해졌던 아렌의 정신이 다시 지금으로 돌아왔다.

‘그때 말해 준 비밀은, 잘 써먹어 주지.’

*****

황궁의 연무장에서, 두 황자의 검술 훈련이 한창이었다.

아직 어린아이 티가 역력한 레온나토스와, 덩치만은 이미 성인만한 테오드릭.

레온나토스의 후들거리는 팔이 목검을 떨어뜨렸다.

“후우… 졌습니다. 형님께 못 당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아니, 오히려 놀란 건 나다, 레온. 그냥 책상붙이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빠르게 늘었어.”

하지만 온몸이 땀 범벅인 레온나토스에 비해, 테오드릭은 이마에 땀방울 송글송글 몆혔을 뿐이다.

테오드릭은 찌뿌둥한 허리를 쭉 펴며 연무장을 살폈다.

마상 창 시합도 열 만한 넓은 연무장. 그 주위로 시종들은 한참이나 물러나 있었다.

설사 흉수가 있다 하더라도 저 먼 거리에서 활로 저격할 수 밖에 없는 환경.

그리고 저격할만한 장소들은 모두 황궁의 근위병들이 미리 선점하고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작은 목소리라면, 황자 두 명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테오드릭은 작심한 듯 말했다.

“실은 내게 고민이 있다.”

“형님에게 고민이요?”

“너도 알고 있겠지. 각 황자들은 시시각각 누가 더 황태자에 걸맞은 인물인지 평가받고 있다는 것.”

“‘황제의 눈’이라 알려진 자들의 주된 역할도 그것이죠.”

모든 황자는 열 살 즈음이 되면 자신만을 섬기는 가신을 직접 뽑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암묵적인 황권 경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모름지기 권력자란 신하의 역량을 가늠하고 충성을 얻어야 하므로.

물론 모든 황자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황태자 경쟁에 뛰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자신은 그를 보조하거나.

누군가의 황제를 지지하고 자신은 그를 보조하거나.

현 황제 브륀할트 8세의 형, 내원 시종장 브레만 브륀할트가 그 예였다.

“레온나토스. 난 황권 경쟁에 뛰어들 거다.”

테오드릭은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비록 머리는 부족할지 모르나, 주변의 조언을 듣고 받아드릴 자세는 되어 있다고 자부한다.”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형님이라면 능히 좋은 군주가 되시겠지요.”

“그러는 넌 어떠냐.”

“…네?”

“아직도 왕권에 생각이 없다면, 날 도와주지 않겠나.”

“저는….”

원래라면 저 말에 시원하게 대답했을테지만, 레온은 망설였다.

평소 레온나토스는 황권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자신은 단지, 축복받은 환경 속에서 편히 책만 읽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으니까.

황권에 뛰어드는 것은 물론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도 레온나토스의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 레온의 그런 성향은 연회장에서 먹은 음식으로 사경을 헤맨 다음 더 굳어졌다.

하지만 아렌이 뒤바꾼 역사에서, 레온은 토란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았다.

도리어 그 자리에서 테오드릭의 강권을 거절하지 못해 궁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이 태동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이 큰 것은 아니지만.

레온의 생각이 조금 바뀐 이유에는, 새로 들인 시종 아렌의 일도 컸다.

‘…아렌. 넌 정녕 날 황태자로 만들고 싶은 거냐.’

아렌의 진위를 모르는 건 사실이다. 그 진위를 확신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그는 레온이 고른 첫 가신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온은 그리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온의 맥빠지는 대답.

“흠, 그러냐.”

하지만, 테오드릭은 그리 기분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으니 도리어 안심되는구나.”

“…형님?”

“네가 검술 훈련을 한다고 들었을 때, 전과 심경이 달라진 건가 생각했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현재에 안주한다는 인상이었지만, 이번엔 스스로 부족한 것에 먼저 달려들었으니까.”

“…….”

“어쩌면, 난 너와도 경쟁하게 될지 모르겠군.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해도 너무 척을 지진 않았으면 한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네가 황위에 오른 모습도 썩 어울릴 것 같거든.”

“…과찬이십니다. 테오 형님.”

“네가 이리 바뀐 것도 아렌, 그 시종이 온 이후였었나?”

“…….”

테오드릭이 대충 내뱉은 말은, 정곡을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

아렌을 향해 볼을 부풀리고 불퉁스럽게 있는 아라흐네.

아렌은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황제의 눈이었다면, 지금도 이미 그럴 가능성이 있지.’

설령 지금 황제의 눈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그렇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미리 연을 만들어둬서 나쁠 게 없다.

“이봐요. 슬슬 말해 주시죠? 이런 무례까지 저지르면서, 굳이 들이닥친 이유는 뭐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됩니다.”

“네?”

아렌은 슬슬 운을 띄웠다.

“테오드릭 전하의 심부름으로 처음 뵀었죠. 그때, 문득 얼굴의 상이 좋지 않아서 말이죠.”

“…뭐예요, 그게. 제가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아라흐네가 귀여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사실 얼굴의 생김새로도 점을 볼 수 있거든요.”

“점이요?”

“네. 실은 궁에 들어오기 전에 점을 조금 배웠거든요. 제가 유랑족 출신인지라.”

“…….”

아라흐네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윗선이나 황제에 보고할만한 사안인지 가늠하는 것일까.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아, 알았다고요.”

“설령 테오드릭 전하나 다른 사람, 가령 황제 폐하께라도 말이죠.”

움찔.

아라흐네의 귀 아래가 미세하게 떨렸다. 대부분은 놓칠만한 반응이었지만, 아렌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역시.’

“허, 걱정이 지나치시네요. 황제 폐하께라니요. 아무나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닌데.”

“역시 그런가요? 그럼 괜한 걱정이었겠네요. 아라흐네 양에겐 전령의 사주가 있어서, 왠지 황제 폐하께도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아렌이 아라흐네의 이름을 자연스레 불렀지만, 아라흐네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점쟁이라더니 묘하게 그 근처를 말하는데. 이 사람, 사실은 정말 용한 것 아냐?’

“큼, 흠! 그래서, 제 점을 봐서 어떤데요?”

“이건, 조금 더 제대로 된 장소에서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실은 아라흐네 양, 조만간 큰 화를 당할지도 몰라요.”

“…화라구요?”

아라흐네의 표정이 굳었다.

점을 믿든 믿지 않든,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데 아무렇지 않아할 사람은 없다.

“그거, 맞는 거예요? 애초에 전 당신이 점술가라는 것도 못 믿겠는데요?”

“저야, 그쪽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요. 그래도 기껏 점괘를 봤는데 무시해서 다치면 제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잠깐만 해 볼까요?”

아렌은 미리 가져온 카드를 간단히 섞은 뒤 몇 장 뽑았다.

물론, 뽑은 카드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아라흐네의 비밀 따위, 수도 없이 댈 수 있었으니까.

“‘뒤집힌 천칭’이라… 혹시 대칭이어야 할 게 맞지 않아 불편하지 않나요? 가령 한쪽 팔이 조금 짧다든가….”

“……!”

“‘끝나지 않는 백야’. 오래전부터 밤잠을 설쳤군요. 최근에 받은 직책이 있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한 거겠죠.”

“……!!”

“‘부서진 종탑’. 이건 해석하기 살짝 애매한데, 자신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게 할 수 있군요. 높은 곳에 있는 지엄한 분은 어질지만, 동시에 무자비하시죠. 그래서 불안하고요.”

“……!!”

아라흐네는 이제 완전히 아렌의 점술에 빠져있었다.

그건, 방금 전 욕실에서 있었던 해프닝도 한몫했다.

목욕하는 도중 무작정 쳐들어온 아렌에 아라흐네는 분노했다.

분노는 곧 감정의 동요.

그리고 동요한 감정은 쉽게 다른 감정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이 경우, 분노는 경외로 치환되었다. 용한 점술가는 때때로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도 하니까.

“어때요, 방금 한 점괘가 다 맞나요?”

“…그렇다 치자고요.”

“아까도 말했듯 제 점술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기분이 들었나요? 그게 아니라면 말 안할….”

“알았으니까 빨리하라고요! 제 점괘에 흉이 나왔다고요?”

‘보아하니, 정말 말 안 하겠군.’

황제의 눈은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위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라는 말에는 사실 어폐가 있다.

위에 거짓을 고하는 것이야 당연히 안 되겠지만, 딱히 보고하지 않아도 될 시시콜콜한 일들은 자연히 걸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렌의 점술 역시 아라흐네가 ‘보고하지 않아도 될 시시콜콜한 것’이라 받아들이기만 하면 딱히 임무에 위배되지 않고 함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렌은 아라흐네의 표정에서 짜증과 동시에, 위에는 함구하겠다는 뜻을 느꼈다.

아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만간, 황궁에 큰 행사가 열릴 거라는 점괘가 있었습니다. 맞나요?”

“…글쎄요.”

아렌은 조만간 기습적으로 사냥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원 외부의 사람들은, 설령 황자라도 지금 시점에선 모르는 게 당연한 정보였다.

아라흐네는 딴청을 피웠지만, 실은 알고 있다는 게 반응에서 드러났다.

황제의 눈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모를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만약 가까운 시일 내 황궁에서 행사가 일어난다면, 거기서 화를 입을 수 있어요. 점괘대로라면요.”

“…그걸 일부러 말해 주러 온 거니, 피할 방법도 있다는 거겠죠?”

“네. 푸른색을 가까이하고 붉은색을 멀리해야 합니다. 네발 달린 짐승에서 멀어져야 하고요. 쇠붙이와도 상극입니다. 이것들만 지키면 화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붉은색, 네발 달린 짐승, 쇠붙이…”

아라흐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렌이 말한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

‘물론, 사냥대회에서 저 세 개를 모두 피하긴 힘들겠지만.’

첫 번째 삶에서 레온 황자가 연회에서 음식을 먹고 탈이 나고 얼마 뒤, 황제는 즉흥적으로 사냥대회를 열었다.

앓아누운 레온 황자는 불참한 가운데 황자들은 각자 직접, 혹은 대리 사냥꾼을 내세워 사냥에 나섰다.

사실 아렌이 아는 한 아라흐네는 이때 화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아렌의 점괘대로 불길한 징도를 열심히 피해다닌 아라흐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아렌의 말이 신통하다 여기겠지.

그리고 붉은색과 네발짐승, 철을 멀리하면 웬만한 화는 다 피할 수 있다.

불이나 피, 말과 맹수, 창과 화살 등.

아렌이 모른 척 말한 불길한 것들은 모두 사냥대회를 연상케 하는 것들이었고, 아라흐네로선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점괘 감사합니다. 복채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감사하네요.”

“뭘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요 뭐. 그리고.”

아렌은 은근히 웃으며 말했다.

“전, 복채가 없다고 말하진 않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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