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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화 (7/227)

#007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레온나토스와 테오드릭 두 황자는 단상 위를 향해 예를 갖추고 있었다.

흡사 하늘까지 치솟은 듯한 대리석 기둥 사이에서, 황자를 따라온 아렌 역시 머리를 바짝 조아렸다.

기둥 전체에 조각된 화려한 문양은 이곳이 지상이 아니라 천계에라도 온 듯 현혹시키기 충분했다.

황궁의 최중심부, 황궁 내원의 알현장.

그야말로 선택받은 극소수만 발을 들일 수 있는 제국 권력의 중심지였고, 황궁에 20년간이나 있었던 아렌조차 몇 번 온 적 없는 곳이었다.

알현장의 중심에는 계단으로 점점 높아지는 단상과 그 정상에 장막으로 가려진 의자가 있었다.

그곳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종장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대동한 다른 신하들은 모두 단상을 향해 납작 엎드려 있었지만, 황자들은 무릎만 꿇은 채 가볍게 인사할 뿐이었다.

장막 너머의 중년인이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두 분이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다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직책은 고작 시종장에 불과하지만, 장막 너머의 남자에겐 황자들조차도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비록 직책은 고작 시종장이지만 황궁의 최중심부, 내원의 모든 시종을 관리하는 시종장은 다른 신하들과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자에게만 임명하는 자리였고, 그 자리는 대대로 황족이 역임해왔다.

지금의 내원 시종장은 황제 브륀할트 8세의 형, 브레만 브륀할트였다. 황자들이 예를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

내원 시종장이 물었다.

“그런데, 레온 황자님께선, 어찌 음식이 바꿔치기 된 것을 아셨습니까?”

“그건-”

레온의 시선이 잠시 뒤쪽을 향했다.

뒤쪽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 뚝 떼고 엎드려 있는 아렌이 있었다.

“…….”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은 레온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아렌에게 미리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렌이 황궁 내원의 알현장에 바짝 엎드리기 전.

내원 시종장이 황제를 대신해 테오드릭과 레온나토스 둘을 불렀을 때, 레온은 당연히 아렌 역시 알현장에 데려가길 원했다.

가신으로서 황궁의 내원에 발을 디디는 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었지만, 아렌에게는 영 달갑지 않았다.

‘벌써 황궁 내원이라니, 너무 일러. 원래라면 10년은 지나야 겨우 구경할 수 있던 곳인데.’

일찍이 황가의 점술가로서 깊이 스며들어 있던 아렌이었다.

황자들끼리의 권력 암투는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왕 일어났지만, 아렌이 섬기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는 황권을 전혀 탐내지 않았기에 암살당하기 전까진 비교적 평온한 생애를 보냈다.

그 곁에 있던 아렌 역시 쾌적한 삶을 살았지만, 그 결말은 결국 누명, 그리고 참수였다.

목이 잘리던 때의 서늘한 기억에 아렌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시기상조야.’

억울하게 흑막으로 몰려 처형당한 첫번째 삶의 보상이라도 되듯, 언젠가는 진짜 흑막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른 시기에 아렌의 점술이 드러나는 것은 피해야 했다.

주변의 이목이 쏠릴수록 아렌의 운신의 폭이 줄어들게 되니까.

“…레온나토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제 점술에 대해서는 최대한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함구하라? 대체 왜지? 네 점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난 일어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네 점술을 말하지 못하면 네 공조차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공이 다른 이에게 돌아가도 좋은가?”

“전 그걸 공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전 나온 점괘대로 말씀드렸을 뿐. 그걸 신경 써주신 건 황자 전하, 그리고 테오드릭 전하지요.”

“하지만….”

“그리고, 제가 점술을 쓸 수 있다는 게 드러나면 다른 이들도 제게 점을 볼 겁니다.”

“그게 어때서 그러나. 네 점술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득을 볼 텐데-”

“전 많은 사람들보다, 전하에게 먼저 득이 되고 싶습니다. 그로써 지금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도록.”

“…아렌.”

“그리고 점술의 특성상, 너무 많은 이목이 집중되면 도리어 적중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고로 술자에게 긴장되지 않는 환경이 중요하기에. 언젠가는 말하게 되더라도, 당분간은 지금의 상태가 좋을 줄로 압니다.”

아렌의 말은 고마웠지만, 레온의 표정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럴 수밖에.

이미 황자로서 제국에서의 지위가 낮지 않은데, 그보다 더 큰 입지라 함은 차기 황제, 황태자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온은 예로부터 황권 다툼에 별 욕심이 없었다.

“…고맙구나.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황궁에서의 지위에 그리 욕심이 있지는 않다만, 네 뜻을 생각해서 당분간은 함구토록 하지.”

“하해와 같은 배려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아렌은 생각했다.

‘지금은 미적지근하겠지만, 곧 스스로 황위에 오르고 싶게 만들어 드리지요, 전하.’

*****

내원 시종장의 물음에도 레온은 아렌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종장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상태.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투와 별개로 내용은 전혀 나긋나긋하지 않았다.

“분명 레온나토스 전하를 노린 범행이었음에도 레온 전하가 알아차리고, 테오드릭 전하가 흉수의 뒤를 밟았다라. 사이에 빠진 내용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

“가령, 레온 전하는 연회장의 음식이 바뀌었는지 어떻게 알았으며, 테오 전하는 어찌 범인을 특정하여 정원까지 미행했단 말입니까.”

“…그것은-”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테오드릭이 입을 떼려던 것을 레온나토스가 받았다.

테오드릭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머리나 처세로는 레온나토스가 형보다 훨씬 더 듬직했다.

“실은 연회 전날 너무 허기진 터라, 시종을 보내 몰래 음식을 가져오라 시켰습니다. 그 음식을 시종도 먹었고요. 그런데 연회 당일 차려진 음식을 시종이 먼저 먹었고, 그 맛이 묘하게 달라진 것을 알아챘습니다. 조리장에게 확인해 보니 다른 음식으로 바꿔치기 되었고요. 이 소동에 테오드릭 황자도 같이 있었기에 제 시종을 보내어 자초지종을 알렸습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테오드릭?”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테오드릭은 허둥대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 레온나토스의 시종이 묘하게 뻔뻔하고 달변인지라 혹 배후가 있나 싶어 뒤를 밟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종을 노리던 흉수를 만나서-”

“그 시종이 누구입니까.”

“…….”

시종장의 물음에, 두 황자의 한참 뒤에서 엎드린 아렌의 목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아렌의 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내원 시종장이 일말의 관심을 가지고 말았다.

아렌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그대로 엎드려 말했다.

“아렌이라-”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고개를 들고 말하라.”

그제야, 아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온나토스 황자 전하의 시종인 아렌이라 하옵니다.”

“네가 그 시종이냐.”

“그렇습니다. 시종장님.”

“흠, 과연. 테오드릭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장막 너머로, 내원 시종장의 핥는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날카롭거나 위협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거북했다.

상대방을 긴장시키지 않아, 경계를 풀게 해 그자의 더 많은 것들을 가늠하는 그런 눈빛.

한 방울 식은땀이 흐른 아렌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저도 모르게 실금이 간 흑옥 반지를 쓰다듬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시종장이 말했다.

“두 황자의 입장은 잘 알았습니다.”

‘…입장?’

“물러가도 좋습니다. 당분간은 궁의 경계를 더 강화할 테니 두 분도 양지하시지요. 특히 레온나토스 전하. 표적이 되신 만큼 당분간은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황자님께 맞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지 함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백부님.”

두 황자가 알현장을 천천히 나왔고, 황자의 가신들 역시 뒷걸음질로 천천히 물러났다.

황자의 몇 걸음 뒤를 따라가는 아렌은, 무심코 시선을 뒤로 돌렸다.

‘…이크.’

거기엔, 단상 위 홀로 앉은 내원 시종장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하듯, 아렌은 황급히 알현장을 빠져나왔다.

긴장한 건 아렌과 가신뿐만이 아니었다.

알현장을 나오자마자 테오드릭은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후, 역시 백부님 앞에선 긴장하게 된단 말야. 어떨 때는 황제 폐하보다 더.”

황궁 내원의 시종장은 황제와 가장 가까운 시종들을 관리한다. 그리고 황제의 최측근이기에 때로는 어느 황자가 황위에 더 어울리는지 역시 가늠한다. 테오드릭으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다.

반면 레온나토스는 훨씬 태연했다.

황권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기에, 오히려 더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긴장한 기색도 없는 레온나토스는 태평하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아까도 묻고 싶었는데, 정말 형님의 암살 시종을 보셨습니까?”

“…그래, 봤지.”

순간 테오드릭의 시선이 레온 뒤쪽에 있는 멜로익으로 향했지만, 멜로익의 표정은 밀랍으로 만든 가면인 양 태연했다.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군요. 저도 제 암살 시종을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바로 네 뒤에 있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테오드릭.

“…평소엔 유약한 말만 하더니, 이런 데서는 묘하게 담이 크구나.”

“절 노리는 자들 말씀입니까? 물론 조심해야겠지만, 지나친 걱정은 제가 해 봤자 어쩔 수 없지요. 저야 제 암살 시종, 그리고 근위병들을 믿을 수밖에요.”

“그것이 아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소상해 보고하였지만, 본의 아니게 사실과 다르게 고했다면 그것은 황제 폐하에의 기만이 되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테오드릭.

레온나토스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은 형을 안심시켰다.

“황제 폐하는 아마, 우리의 소상한 보고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 안에 약간의 기만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요.”

‘…역시 레온 황자. 본질을 꿰뚫고 있군.’

레온의 말대로였다.

황제는 제국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자. 그리고 황자는 미래의 황제 후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곧이곧대로 하는 황자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강단 있게 움직이는 황자를 더 선호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것이 황제의 위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겠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황자 둘의 사소한 거짓말로 흔들릴만한 황권은 아니다.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라면 다행이겠군. 어쨌든, 당분간은 주변의 호위가 더 삼엄해질 거다.”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요. 겉으론 잘 모르겠지만요.”

“물론 지금도 이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마치 암살 시종들처럼 말이다. 실은, 벌써 몇 명 본 것 같기도 하고.”

“형님이야 저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하시니까요.”

‘황궁에는, 방의 갯수만큼의 비밀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있다.

시녀와 경비병, 정원사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느 곳에 ‘황제의 눈’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먼저 20년 정도를 살아본 아렌조차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황궁의 모든 곳에 눈이 있다, 는 말은 단지 비유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그들도 포섭해야겠지.’

다행히, 아렌은 이 시기의 ‘황제의 눈’을 한명 알고 있었다.

*****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오후.

레온나토스는 테오드릭 황자와 함께 검술 훈련을 받고 있었다.

식중독 미수 사건 이후 둘은 부쩍 같이 훈련받는 빈도가 늘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고 나이도 어린 레온나토스는 테오드릭에 별 저항도 못해 보고 당했지만, 자신의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레온이 테오드릭과 어울리는 동안 아렌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이런 날이 딱 적기지.’

궁 이곳저곳에 뻗어 있는 ‘황제의 눈.’

오늘은 그중 하나를 포섭할 생각이었다.

아렌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어린 여자 시동들만 모인 숙소로 향했다.

평소 남자 고용인이라면 결코 들르지 않는 곳.

입구에서, 아렌은 자신이 아는 ‘황제의 눈’을 불러내었다.

기숙사장은 무슨 목적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뭐야,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를 어쩌나. 지금 그 녀석은 공용 목욕탕에 있는데.”

“…혼자요?”

“그래. 무슨 일이길래?”

일과시간 낮부터 목욕탕이라니.

‘욕실 청소라도 하는 모양인데. 혼자서 다 하다니, 벌이라도 받는 건가?’

하지만 잘됐다. 혼자 조용히 있는 상대라면 따로 불러낼 일은 덜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자, 잠깐만. 지금 거기 간다고?”

“네. 뭔가 문제라도?”

“…아니?”

뭔가 재밌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기숙소장.

잠깐 의아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은 아렌은 곧바로 공용 목욕탕으로 향했다.

기숙사장의 말대로, 욕탕 입구에는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여자가 쓰고 있다는 표식의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아렌은 장막을 걷고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잠깐 들어갈게요.”

“네? 잠깐만요! 여기 제가 쓰고 있는… 꺄악!”

이미 늦었다.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알몸의 아라흐네가 보였다.

아렌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 어차피 청소하는 겸 그 전에 씻고 있었나?’

보통이라면 당황하고 곧바로 욕탕을 나가야 정상이겠지만, 훗날 아라흐네와 결혼하는 아렌은 덤덤할 뿐이었다.

유백색의 탕에 몸을 담근 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만 수면 위로 올린 아라흐네를 보고 아렌은 태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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