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시녀 네안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황자님? 여긴 어떻게…”
“것 참 이상하군. 분명 난 의심스러운 시종을 미행하고 있었는데, 왜 그 시종이 노려지고 있는 거지?”
“그건-”
스르릉, 테오드릭 황자는 옆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신중히 대답해야 할 거다. 레온나토스의 시종을 죽이려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냐. 내가 이해력이 조금 떨어지니, 상세하고 자세한 대답이었으면 좋겠군.”
저벅.
황자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네안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뭐냐, 아까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가고. 자, 아직 어린 황족의 목숨이 여기 있다. 네가 노리던 것이 아니었나?”
팔을 활짝 벌린 테오드릭 제9 황자.
고작 13세의 나이지만, 이미 성인인 네안보다도 키가 컸다. 거기에 잘 단련된 근육까지.
테오드릭의 자신감은 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네안은 단념했다.
지금 보이는 건 테오드릭 황자 하나뿐이지만, 황자 혼자 혈혈단신으로 여기에 왔을 리 없다.
황자 자신이 아렌을 미행한 것처럼, 테오드릭도 모르는 비밀 호위들이 뒤따라왔을 테니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곳.
황궁은 그런 곳이다.
까득, 네안이 이를 꽉 악물었다.
“테오드릭 황자님은 아직 목표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군요.”
‘…아직?’
네안의 말을 곱씹으며 아렌은 뒤로 물러났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오냐. 죽이진 않으마. 네게 들을 게 많으니.”
검을 뽑는 테오드릭. 가드가 금으로 조각된 화려한 장검이었지만, 단순한 장식검은 아니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황궁에서 장검을 소지할 수 있는 건, 황족과 그들을 지키는 근위병들 뿐.
반면 네안이 가진 건 자신의 손바닥 만한 단검뿐이다.
‘…그리고, 아마 테오드릭 황자가 손을 쓰지 않아도….’
각오한 듯, 네안은 달려왔다. 테오드릭은 검을 자신의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방어와 동시에, 언제든 제압할 수 있도록.
키 작은 관목으로 이뤄진 미로의 길을 단숨에 좁혀온 네안.
하지만 그 질주는 의외의 상태에게 막혔다.
-푹.
관목의 미로로 된 풀숲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순식간에 뛰쳐나와 네안에게 폭 안겼다.
사각에서 예상 밖의 충격을 받은 네안은 그대로 자신에게 안긴 인물과 뒤섞여 바닥을 몇 바퀴나 데굴데굴 굴렀다.
어둠 속에서도, 아렌은 뛰쳐나온 인물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저건, 멜로익?’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암살 시종, 멜로익이었다.
네안과 뒤섞여 한참이나 데굴데굴 구른 멜로익은, 이후 천천히 일어섰다. 단검을 쥔 손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흥건히 묻어 있었다.
멜로익에 기습적으로 배를 찔린 네안은, 하지만 상처가 깊지는 않은지 쓰러진 후에도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었다.
또 다른 불청객의 출현에 테오드릭은 눈을 찌푸렸다.
“…넌 또 누구지? 설마, 네가 내 암살 시종인가?”
잠시 옷에 묻은 먼지를 무심하게 툭툭 털던 짧은 흑발의 소녀, 멜로익은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습니다, 테오드릭 황자 전하. 전 레온나토스 황자의 암살 시종, 멜로익이라 합니다.”
“…레온의 암살 시종이라.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그런데 네가 왜 움직였지? 내 암살 시종은 움직이지 않고?”
“저 정도쯤은, 전하의 위협이 아니라 판단한 것이겠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움직인 것은, 혹시나 시종 아렌이 휘말릴까 해서입니다.”
“이 정도는 내 위협이 아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만, 그럼 넌 왜 고작 시종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거지?”
“제 정체를 이미 아렌에게 들킨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지금은 시종아렌을 살려두는 것이 곧 레온 전하를 위함이라 생각한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건, 네 독단이냐?”
“…그렇습니다.”
멜로익은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의 요리가 바꿔치기 당했다는 의혹이 생겼을 때.
아렌은 저장고에서 마주친 시녀 네안을 가장 먼저 의심했다.
그리고 그 직후 창고에 들른 건, 마찬가지로 시녀로 위장하고 있는 암살 시종 멜로익.
거기서 아렌이 누군가와 마주쳤다면, 범인은 탄로 날까 두려워 가장 먼저 아렌을 노릴 것이라고 멜로익 또한 생각했던 것이다.
“허, 레온에 이어 그 암살 시종까지 아렌을 감싼다라. 저 시종은 꽤나 신뢰받는 모양이군.”
“송구스럽습니다. 실은 신뢰가 아니라 감시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
멜로익이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고, 아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저 녀석을 산 채로 잡을 생각이었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니냐?”
“복부를 찔렀습니다만, 짧게 잡아 내장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에 멜로익이 돌아봤다.
얕게 찔린 채 바닥에 부들거리던 시녀 네안은 어느덧 입으로 피거품을 물며 경직되고 있었다.
“혀를 씹은 모양이군. 되었다. 저런 정신력이면 어차피 심문하는 도중에도 혀를 씹었을 터이니.”
테오드릭은 이미 놓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관심을 둔 건 무언가 특이한 레온나토스의 새 시종 아렌,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누군가의 암살 시종 멜로익이었다.
“하면 너는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레온의 암살 시종에서 빠지는 것이냐?”
“…비록 제 정체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아는 이는 적습니다. 더 널리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활동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나더러 함구해 달라?”
“이것이 무례한 청이라면-”
“설마.”
피식, 테오는 웃었다.
“기꺼이 그래 주지. 여기서 날 구해준 건 얼굴도 본 적 없는 내 암살 시종. 난 너를 본 적 없으니 당연히 네 정체도 모른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앞으로도 곁에서 레온을 지켜주도록.”
“망극한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 아렌.”
테오의 지명에 아렌은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테오드릭 황자 전하.”
“네놈, 그렇게 빨빨 돌아다니다 목숨이 노려지기나 하고. 내가 아니었으면 어쩔 생각이었냔 말이다.”
“구명의 은, 백골난망입니다.”
아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야, 당신에게 구해지기 위해서였지.’
테오 황자는 매사 직접 움직여야 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오랫동안 황가 사람들을 지켜본 아렌에게는 불 보듯 뻔한 미래였다. 테오 황자가 직접 미행할 확률은 상당했다.
설마 황자가 직접 미행하진 않더라도 십중팔구 사람을 붙여뒀을 테니 살 확률은 높았을 테지만, 직접 테오 황자에게 구해진 이상 자신에게 붙은 의심은 상당 부분 걷혔다고 봐도 좋았다.
“나 참, 방금 죽을 뻔했는데도 뻔뻔하구나. 레온이 맘에 들어 할 만하다. 유약한 주제에 이상한 구석에서 담이 센 점도 닮았어.”
그리고 그건, 테오 황자가 선호하는 신하의 유형은 아닐 것이다.
테오 황자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자보다,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인재를 더 선호할 것이다. 부족한 지혜를 보충해줄 지혜 보따리는 하나 정도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오늘 일은 차후 레온에게 다시 일러두마. 물론, 우리끼리 말을 맞췄던 대로 말이다.”
“감사합니다, 테오드릭 황자전하.”
‘그리고, 앞으로도 신세를 많이 지도록 하지요.’
레온나토스에 이어 테오드릭과도 인연이 깊어질 것임을, 아렌은 직감했다.
황궁에서 살육이 일어났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
테오드릭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가신들을 불렀고, 그가 뒷수습으로 남아 있는 동안 아렌과 멜로익은 얌전히 정원에서 물러났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둘.
아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괜찮아? 나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 버렸는데.”
“괜찮아. 레온 전하를 지키는 암살 시종은 나 하나만이 아니니까. 나 하나 어떻게 된다고 레온 전하가 위험해지진 않아.”
하지만 그건 레온 황자를 지키는 입장으로서 생각한 것이다.
정체가 드러난 비밀 호위의 목숨 따위,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으니까. 레온 황자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제거될 대상이 멜로익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레온 황자님은 괜찮겠지만, 너는?”
“어머, 설마 내 걱정해 주는 거야? 하지만 걱정 방향이 잘못된 것 같은데?”
멜로익은 아렌의 심장께를 툭툭 찔렀다.
“벌써 널 노리는 사람이 생겼어.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아니.”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네안은 음식을 직접 바꿔치기한 말단일 뿐, 황궁의 연회에 상한 음식을 들이려는 세력은 따로 있을 것이다.
네안이 아렌을 노린 건 단지, 아렌이 목격자여서일 뿐.
정작 목격자인 네안이 죽어버렸으니, 더이상 아렌을 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멜로익이 물었다.
“이제 어쩔 거야? 이대로 방 앞까지 바래다줘?”
“아니. 조금 늦었지만, 레온 전하께 가자.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드려야 하니까.”
*****
밤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레온 황자는 아직 침소에 들지 않고 있었다.
“…흉수가 널 노렸다고? 그리고 테오 형님과 형님의 암살 시종이 널 구해줬고.”
“그렇습니다. 암살자는 저와 몇 번 안면이 있던 시녀였습니다.”
“…그런데, 왜 널 죽이려 했지? 나나 테오 형님이 아니라 굳이 널 말야.”
“왜냐하면, 제가 음식이 있던 창고에 갔던 날 저보다 그 시녀가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제가 그녀의 이름을 불게 되면 추궁을 당할 테고, 추궁을 견디는 것보다 제 입을 막는 게 더 빠른 방법이라 여긴 것이겠지요.”
실제로 시녀 네안은 치료받으면 살 수 있는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혀를 씹어 죽었다.
네안이 지키려던 건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그 뒤의 배후였다.
레온이 말했다.
“실은 네가 형님께 불려간 후, 아주 약간의 토란을 먹었다. 곧바로 반응이 와 얼른 뱉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네 말대로, 토란은 내게 독이었더군. 지금껏 몰랐던 것이 놀라웠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있었지? 역시 가족이 같은 증상이었나?”
“아닙니다. 원래 음식과 다른 식재료는 토란뿐이었습니다. 토란이 누군가에게 독일 수 있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고, 이번 연회에서 황자 전하가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점술을 통해 알았기에 그것들을 조합해 유추한 것뿐입니다.”
“용한 줄은 알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구나. 그런데, 음식을 바꿔치기한 흉수들은 내게 토란이 독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것은.”
아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 물론 널 추궁하는 것은 아니다. 네 점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
“…송구합니다.”
아렌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대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자신의 기억에 남을 만큼 큰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아렌 역시 모른다.
점술을 빙자해 사람들의 마음속 진심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완전히 적중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레온 황자를 노린 자들은 황자가 토란에 상극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첫 번째 삶에서 레온나토스 황자가 앓아누웠을 때는, 단순한 사고로 여겨졌다.
황궁의 사람들도 레온나토스가 토란에 상극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게 레온 황자를 노린 범행이라는 게 밝혀졌다.
확실한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레온나토스 황자의 태도가 이전과 꽤 많이 달라지리란 사실이었다.
‘레온 황자만의 세력을 갖추는 건 좀 더 나중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서두르는 게 좋을지도.’
똑똑.
그때 레온 황자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레온나토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러들었고, 멜로익은 순간 숨겨놓은 단검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복도 밖은 근위병에 의해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지만 오늘 그런 일이 있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렌이 자진해서 나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건, 아렌보다도 어려 보이는 시녀.
그리고 그 시녀를 본 아렌의 심장은 단숨에 얼어붙었다.
“저, 테오드릭 황자 전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
“…저어?”
“…….”
“아렌? 밖에 누구지?”
“…아, 죄송합니다. 들어오시지요.”
레온 황자의 말에 아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으로 아장아장 들어온 시녀는 꾸벅, 레온에게 예를 표한 뒤 고급스러운 천에 싸인 물건을 바쳤다.
“이것은 테오드릭 황자 전하께서 보낸 선물입니다. 이것으로 자신, 혹은 신하의 몸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래? 형님이…”
시녀가 건넨 건 투박하지만 잘 마감된 단검이었다.
단검을 건넨 시녀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어리고 황자의 면전이지만, 긴장한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역시, 제법이로군.’
아렌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어린 시녀는 총총거리며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아렌은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렌. 왜 그러나. 아는 사람인가?”
“…아닙니다.”
비록 그녀의 어린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아렌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 시녀는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의 아내였고, 동시에 배신해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였으니까.
‘…아라흐네.’
잘렸던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렌은 아라흐네가 나간 방문을 한동안 계속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