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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5화 (5/227)

#005화

“…허, 독이라고? 이렇게 맛만 좋은데 말이냐? 그럼 나는 진작 죽었어야지! 감히 괜한 수작으로 황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그 불온한 손목, 그대로 잘라주지!”

테오드릭 황자의 서슬 퍼런 분노가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아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테오드릭은 독이 든 음식인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은 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독을 먹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레온나토스 황자가 먹을 때가 되어서야 막은 것도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흠, 이제 어떡한다?’

지금 아렌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자신의 점술을 테오드릭 황자에게도 공개한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점술로 모면할 수 있지만, 그리하면 황궁의 흑막으로 군림하려던 원래 계획에서 조금 더 멀어지게 된다.

제대로 된 흑막이 되려면, 아렌의 점술이 되도록 드러나지 않는 편이 더 유리하니까.

두 번째는, 점술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잘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가능하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지만 자칫하면 테오드릭의 분노를 더욱 살 수 있었다.

아렌은 고민했다.

‘흐음… 이걸 어떻게 둘러댄다?’

사실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아렌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음식이 바꿔치기 된 것은 확정. 그렇다면 첫 번째 삶에서 있었던 레온 황자의 식중독도, 실은 사고가 아닌 사건이었던 것이 된다.

그게 밝혀지기만 하면 이 모든 건방진 행동들도 결국 아렌의 공으로 돌아가게 된다.

‘…좋아. 조금 이르지만 점술가임을 밝히자.’

“사실-”

마음을 정한 아렌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형님. 아렌의 말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제12 황자 레온이 아렌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런.’

레온나토스 황자는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엔 좋을지라도, 되려 테오드릭 황자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갑자기 일이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물론 내 말이 사실로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지만.’

진짜 걱정은, 레온 황자가 왜 일개 시종인 아렌을 그토록 감싸고 도느냐는 의문을 주위에서 하게 되는 것.

‘그것만은 막아야 해.’

“아닙니다, 전하. 이건 단지 제 독단으로….”

“무슨 소리인가. 넌 내 가신이다. 그리고 가신의 일은, 곧 주인의 일이기도 하지.”

“…….”

이미 늦었다.

제9 황자 테오드릭은 아렌과 레온의 사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말했다.

“…제길. 레온 저 녀석이 허튼 말을 한 적은 없으니. 여봐라!”

테오드릭 브륀할트, 제9 황자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직 몸이 다 자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매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테오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깊었다.

잠시 후, 왕궁의 조리장이 허리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전하.”

“여기 이 비둘기 볶음이, 레온나토스 황자에겐 독이라 하더군. 난 한 접시나 먹었지만 멀쩡한데 말이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 당장 확인하라.”

불쌍한 조리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도, 독이 들었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음식이 나오기 직전까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그러니 당장 확인하라 말하지 않느냐. 변명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

조리장은 자신 있게 내놓은 음식이 괜한 투정을 듣는 것 같았다.

조리장은 조금 굳은 얼굴로 다가와 비둘기 볶음을 한 점 먹었다.

그리고, 당당했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이건.”

“상한 건가?”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연회장에 잘 어울리는, 잘 만들어진 일품입니다.”

“허, 그것 봐라. 이깟 미천한 시종 따위가 알리 있겠느냐?”

하지만 테오드릭 황자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조리장의 말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음식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뭐라?”

“확실합니다. 전 이 음식에 토란과 잣을 섞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맛은 더 좋아졌지만, 이게 독이 들어간 재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제가 만든 음식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 그렇다 치자. 누가 독을 탔다면 곧바로 반응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나 말고도 연회장에 음식을 먹은 사람이 차고 넘친다. 이게 독이 된다니-”

“어떤 식재료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합니다.”

아렌은 조금 고개를 숙인 채 또박또박 말했다.

“아몬드나 새우, 메밀 등 도저히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이 있습니다. 단지 맛이 없다 수준을 넘어, 과히 섭취하면 두드러기가 생기고 목이 부어오르지요. 심하면 숨을 쉬지 못해 죽기도 합니다.”

“…고작 그런 음식들이 말이냐? 모두 일상적으로 잘 먹는 것들 아니냐.”

“이 음식의 경우, 토란이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인원에겐 단지 맛 좋은 재료일 뿐이지만, 레온 황자님께는 독이 되는 음식입니다. 극소량으로 시험해 보시면 드러날 것입니다만, 극도로 신중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

자연스러운 소음이 가득한 연회장 안에서, 두 황자 주변만 고요해졌다.

다혈질의 테오드릭 황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치자. 그렇다면 넌, 그 사실을 어찌 알았나. 우리는 물론 레오 본인도 모르고 있던 사실 같은데.”

“…그것은, 제 혈육이 레온나토스 황자님과 같은 증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일어나는 질환이라면서. 그런 우연이 겹친단 말이냐?”

테오드릭이 추궁했다.

테오드릭은 흔히 몸을 움직이는데만 관심있지, 머리를 쓰는 데는 둔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배움이 얕고 지식이 부족할 뿐, 두뇌회전이 느리지는 않았다.

“네놈에게 더 물어볼 것이 많으나.”

테오드릭은 주변을 살폈다. 아직 연회는 한창. 게다가 대부분의 음식이 반 이상 줄어 있었다.

아렌의 말대로라면 이번 일은 오직 레온나토스만을 겨냥한 사건.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조리장. 추후 위병과 조사관을 보내겠다. 그때 성심껏 대답하고, 범인을 잡는데 협력하도록.”

“물론 성심껏 협력하겠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했던 조리장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종, 아렌이라고 했나?”

“네, 테오드릭 황자 전하.”

“더 물을 것들이 많다. 연회는 이쯤 됐으니 따라오도록.”

“잠깐만요, 형님! 아렌은 제 시종입니다. 정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레온이 반대하고 나섰다.

“뭐 어떠냐. 잠깐 빌린다는데. 몸 성히 돌려줄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주인으로서, 신하는 한 몸과 같습니다.”

“그렇지. 수족. 어차피 시종은 우리의 충성스러운 수족일 뿐 아니냐?”

“형님은 수족을 잘라 누군가에게 빌려줄 수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수족 중 하나고, 언제든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지.”

“…전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미천한 시종 아렌을 사이에 두고, 두 황자가 서로 노려봤다.

둘의 눈싸움은 한참을 이어졌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먼저 푼 건, 테오였다.

“녀석, 마냥 유약한 줄만 알았는데, 제법 강단이 생겼구나.”

“저도 언제까지 어린애로 있을 수는 없는 법이죠.”

“하지만, 시종을 잠깐 빌려가는 건 확정이다.”

“형님! 하지만….”

“몸 성히 돌려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제9 황자와 제12 황자.

각자 다른 비를 통해 나온 자식이지만, 꼭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뚜렷한 무골을 보인 제9 황자 테오는 어엿한 황태자 후보 중 하나이고, 명석하지만 아직 어리고 유약하다 평가받는 레온은 한참이나 뒷 순번이었으니까.

당장 가진 발언권의 차이가 너무 났다.

레온은 마음에 든 가신을 빼앗기면서도 변변한 저항을 못 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이나는 한편, 레온은 난생처음 황궁에서의 지위를 올리고픈 욕망이 생겼다.

‘내가, 황궁에서의 서열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레온나토스는 몇번이고 당부했다.

“절대, 절대 아렌을 해코지하시면 안 됩니다.”

*****

테오드릭 황자의 방.

테오드릭 황자에게 불려오고도 한참 동안, 아렌은 침묵 속에서 방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해가 저물어 순찰병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일이 끝난 신하들은 이미 옛적에 잠을 자러 갔을 시간.

테오 황자의 방은 사치스럽게 곳곳에 등불과 양초를 세워둬 마치 새벽처럼 환했다.

테오 황자는 아렌을 방에 앉혀 두고 마치 관찰하듯 얼굴을 바라봤을 뿐.

긴 침묵 끝에, 테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레온 황자를 높이 평가한다. 나도 아직 어리지만 레온은 고작 열 살에 불과해. 그런데도 그토록 명석하다니, 분명 나라를 위해 필요한 재능이다.”

“…….”

‘그야 당연히 알고 있지.’

“세간의 평가대로, 솔직히 난 그리 머리가 좋지 않아. 그렇기에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레온을 더 높이 평가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녀석이기에 더 불안한 거다. 뛰어난 재능은, 항상 불온한 자들의 표적이 되곤 하니까.”

“…….”

“묻겠다. 넌 레온의 편이냐?”

테오 황자가 물었다.

‘그야. 레온 황자가 승승장구해야 그 뒤에서 내 영향력도 올라갈 테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렌이라 했나? 만약 네가 레온나토스를 능멸하려 한다면, 어찌 되는지 알겠나?”

“네, 물론입니다.”

“그래. 네 목을 칠 것이다.”

“…헉!”

테오의 말은 별것 아닌 위협이었다. 새로운 것 없는 상투적인 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직후 아렌의 몸은 척추를 중심으로 몸의 말단까지 쫘악 소름이 돋았다.

그건, 선명한 기억으로 새겨진 공포였다.

“뭐야, 왜 그러나. 방금까지 그렇게 의연했던 녀석이.”

“아, 아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조금 뒷걸음치며 목을 감싸 쥔 아렌.

지금도 목의 단면에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렌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테오드릭은 손을 내저었다.

“그래,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 좋다.”

‘…이렇게 간단히?’

“네. 레온나토스 전하를 목숨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흥, 믿어주지. 레온 그 녀석이 믿는 가신인데.”

고개를 숙이면서도, 흘깃 테오의 얼굴을 본 아렌.

‘…거짓말이다.’

말하는 순간 황자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는 건 자신의 불안한 시선을 감춘 것이다.

코웃음으로 말의 시작 부분을 얼버무린 건, 강직한 성격인 만큼 거짓말이 서투르고 거부감이 있기에 그것을 얼버무리고자 함이다.

테오 황자는, 아렌을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했던 테오의 방에서 칠흑처럼 깜깜한 복도로 나왔다.

군데군데 등불로 불을 켜긴 했지만, 계속 밝은 곳에 적응했던 눈에는 아쉽기만 한 불빛이었다.

‘…그럼 어디.’

그리고, 아렌은 어두운 복도를 구불구불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위병들을 만났지만, 레온의 가신에 테오의 부름을 받아 늦게까지 있었다는 말로 간단히 지나갈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황궁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함이지 안쪽의 신하들은 경계 대상이 아니다.

지금 아렌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야 아렌이 얼마나 멀리 돌아가는지 모를 테지만, 줄곧 뒤를 밟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아렌은 엄청 수상히 보일 것이다.

‘…만약, 안 나온다면 낭패인데.’

조금은 초조하게, 아렌이 황궁 안쪽 정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라? 또 만났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이런 곳에서 만나네요.”

“내 이름 기억해?”

“…네안, 맞죠?”

아렌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전에 아렌의 몸을 씻겨준, 그리고 식량창고 앞에서 만났던 그 시녀였다.

“늦은 밤인데 어딜 다니는 거니? 그것도 혼자서.”

“조금 볼일이 있어서요. 지금 돌아가는 길이에요.”

“혹시, 길이라도 잃은 거야? 같이 가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네안은 아렌을 향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밤도 늦었는데, 누나랑 잠깐 좋은 거 할래?”

달빛 아래서 시녀 네안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전 아직 어린걸요?”

“어머. 이런 건 빨리 배울수록 좋은 거란다?”

웃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시녀.

하지만.

‘…역시나.’

미간 사이는 굳었고 올라간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 바깥으로 드러나는 명백한 살의.

네안이 아렌의 손님이었다면 돌아가신 할머니의 할머니 과거까지 탈탈 털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투명했다.

살의를 가진 적이 다가오는데도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던 아렌은, 충분히 거리가 좁혀졌을 때 재빨리 뒤로 뛰었다.

“치잇!”

급박히 달려오는 네안.

하지만 고작 열 살짜리의 뜀박질. 성인의 달리기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네안은 곧바로 아렌을 따라잡았고, 품속에서 꺼낸 곧은 단검은 곧장 아렌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까앙!

그리고, 그 칼날을 막은 건 비단옷 소매 아래에 갖춰 입은 금속제 완갑이었다.

“…테오드릭 황자?”

“시종 주제에 노리는 적도 있다니, 제법이구나.”

아렌을 보내준 뒤, 몰래 그 뒤를 밟고 있던 제9 황자, 테오드릭이었다.

‘휴, 당연히 여기쯤 있어 줘야지.’

아렌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발칙하게도, 제국의 차기 황제 후보를 고작 자신의 보호막으로 이용한 아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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