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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화 (4/227)

#004화

암살 시종.

평소에는 평범한 시종인 척 대상의 주변을 맴돌며, 필요할 때 나서 황족을 보호하는 비밀호위.

왜 이름에 ‘호위’나 ‘근위’가 아닌 ‘암살’이 들어가냐면, 그들은 오직 주인을 노리는 적을 죽이는 것만으로 주인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이나 방패, 칼이 아니었다. 한번 날아가 표적에 박히면 그만인 화살이 더 걸맞은 비유.

물론 목적을 달성한 화살이 부러지든 내팽개쳐지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암살 시종은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구성되어 있다는 소문이었고 그 숫자가 몇인지, 누가 암살 시종인지는 오직 황제 그 자신만이 알고 있다.

그런 암살 시종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곧, 아렌 자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긴, 나도 이 녀석이 암살 시종이라는 건 녀석이 죽고 나서야 알았으니까.’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게 뒷배 따윈 없어.”

하지만, 단검의 끝이 파고드는 힘은 더 거세져, 옷을 뚫고 아렌의 등 피부를 살짝 찔렀다.

“죽여달라고 아주 칼춤을 추는군. 그렇게 시치미 떼면, 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줄 아나? 말해. 널 사주한 게 누구지? 제1 황자? 미스린 공작? 그도 아니면, 설마 라두크에서?”

“사주? 난 사주 받은 적 없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사주를 봐준다면 또 모를까. 어때? 암살 시종 멜로익.”

“…….”

아무도 오지 않는 식량창고에 조금 서늘함이 감돌았다. 애초에 서늘하게 지어진 공간이긴 하지만, 방금 느껴진 그 서늘함은 분명 멜로익의 반응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아주 뻔뻔하게 말하는데. 내가 암살 시종인 건 어떻게 알았지? 내 이름은 또 어떻고. 방금 말로 더 확신할 뿐이야. 하지만, 뒷배를 말하기 싫다면. 그냥 여기서 죽어.”

등을 겨눈 단검에 힘이 실릴 때.

죽음 직전에 놓인 아렌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았다.

“그야, 정령이 알려줬으니까.”

멈칫.

아렌의 피부를 찢고 근육까지 파고들던 단검의 끈이 멈췄다.

“…정령? 지금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10대 초반의 암살 시종 겸 하녀, 멜로익은 미신을 잘 믿는 성격이었다.

지금이야 멜로익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억누르고 있을 뿐.

첫 번째 삶에서도 레온 황자의 암살 시종이었던 멜로익은 아렌을 따라다니며 몇 번이고 점을 봐달라며 귀찮게 굴곤 했으니까.

그러는 도중 아렌도 멜로익과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렌이 스무 살이 될 즈음 해서 멜로익은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 왕궁에서 시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큰일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정황만으로도 멜로익이 암살 시종이었다는 정황은 충분했다. 드러나지 않은 어딘가에서, 암살자와 함께 동귀어진해 사라진 것이겠지.

그리고, 아렌에게는 멜로익이 오직 자신에게만 알려준 극비 정보들이 있었다.

“…항상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정령은 웃어주고 있군. 부모님은 널 궁에 팔아버렸지만, 넌 그걸 원망하고 있지 않아.”

“흥, 뭔가 했더니, 고작 그 정도야? 어차피 사전 조사를 했겠지. 내가 암살 시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면 말야.”

“헤어진 오빠의 이름은 멜론드.”

“……!”

“멜로익 넌 단것을 좋아하고,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딸기 케이크….”

“…….”

“…는, 밖으로 드러낸 거짓 취향이지. 실은 단건 질색이야. 고향마을의 말린 청어 조림을 가장 좋아하지? 조금 짜고 칼칼하게.”

“…그건 대체 어떻게….”

멜로익은 명백히 당황했다.

실제로 신기가 있는 점술가가 어떤지는 모른다.

적어도, 신기가 없는 점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뒷조사였다.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황궁의 많은 것들에 몰래 뒷조사를 의뢰했고, 거기서 몰래 수집한 자료들은 점괘를 그럴듯하게 보이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뒷조사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는 암살 시종인 멜로익을 속여넘길 수 없다.

방금 말한 내용들은 모두, 멜로익이 아렌에게 직접 전해 준 1급 정보들. 뒷조사 따위로 얻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시골 출신인걸?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정령들은 어디에나 귀를 기울이는 법이지.”

사실 알려준 건 본인이다.

확실한 정보와 아렌의 의연한 태도에, 멜로익의 눈이 흔들렸다.

점술은 분위기가 반이다. 이미 분위기를 압도한 순간 주도권은 아렌에게 있었다.

“…그럼, 사기가 아니라 정말 영험한 점술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고작 열 살 주제에? 뭐 천재라도 되는 거야?”

“…원래 점술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

그러는 멜로익도, 지금 아렌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을 뿐이다.

“그럼 네가 여기 온 건 진짜-”

“점괘에서 나온 건 확실히 흉이었어. 누군가 음식에 독을 탈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상한 음식은 없나 들른 거고.”

“…확실히, 레온나토스 전하께도 그리 말했지. 하지만 그게 정말이었다니…”

멜로익은 미신을 좋아하는 만큼 의심도 많았다. 마치 미식가가 요리에 더 까다로운 것처럼.

첫 번째 삶에서도 아렌에게 몇 번이고 점을 본 후에야 비로소 용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아직도 의심스럽다면, 시험해 봐도 좋아. 점이라는 게 언제나 정답만을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반복해서 본다면 어느 정도 가려질 테니까.”

“…일단은 두고 보겠어.”

멜로익은 천천히 단검을 갈무리했다.

당장은 아렌을 죽이지도, 위에 보고하지도 않겠다는 말.

“괜찮겠어? 날 죽이지 않아도. 네가 암살 시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데?”

암살 시종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된다. 드러나는 순간 황자를 해하려는 세력의 표적이 되고 마니까.

“감수하겠어. 어차피 황자님의 암살 시종은 나 하나만이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네가 그 능력을 황자님을 해하는 방향으로 쓴다면….”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아렌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 미래를 위해서도, 황자는 승승장구해야 하니까.’

아렌과 멜로익은 다시 레온 황자의 궁으로 되돌아갔다.

“아렌.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냐. 그런데… 어? 입가에 뭔가 번들거리는게…”

‘이런, 입을 덜 닦았군.’

“뭐 먹고 오는 길이야? 이제 곧 저녁 시간인데, 그새를 못 참다니.”

“…….”

레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레온의 시선이 아렌과 나란히 있는 멜로익에게도 닿았다.

“멜. 너도 있었군. 너도 아렌과 친해진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아렌이 부엌에 박혀있는 걸 억지로 데려오는 길입니다.”

“…….”

멜로익에 눈을 흘긴 아렌.

이왕 둘러댈 거면 좀 더 잘 둘러대 줬으면 싶었다.

“저런, 그 정도는 용서해 주게, 멜. 나나 아렌이나, 이제 한창 클 때지 않나. 나오는 식사만으로는 부족할 때도 있단 말이네.”

레온은 태평하게 아렌을 변호했다.

그런 황자를 보면서, 아렌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그런데 정말, 식중독 사건은 이제 없는 일이 된 건가? 황자의 말 한마디만으로?’

“아, 그리고 아렌. 자네가 했던 점괘 말인데.”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후 연회에 나갈 음식은 더욱 철저히 하라는 명을 내렸네. 재료들도 전부 다시 검수했고, 음식으로의 접근도 엄금시켰지. 별문제는 없을 걸세.”

“제 보잘것없는 점괘에도 황자님의 세심한 배려, 거듭 감사드립니다.”

아렌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예법에 맞는 행동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잠깐, 이러면 내가 한 점괘가 빗나간 것 아닌가?’

일어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아렌이 예언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자신이 한 점괘가 이렇게 순순히 빗나가는 건, 앞으로 점술에 대한 신뢰를 거듭 쌓아야 하는 아렌에겐 좋지 않은 결과니까.

“응? 왜 그러나, 아렌?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닙니다, 황자님.”

아렌의 안색을 보고 황자가 물었다.

겨우 대답했지만, 아렌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점괘로 미리 경고하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단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모든 건 내일 연회장에서 알게 되겠지.’

****

황궁의 외곽에 세워진 대회장.

한 번에 천명은 족히 모일 수 있는 거대한 공간에, 참석한 귀족들의 숫자만 백여 명이 넘는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지정석이 있는 제국 식이 아니라, 서서 곳곳에 차려진 음식들을 가볍게 즐기는 도국 식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아렌은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시중 역으로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었다.

레온의 암살 시종, 멜로익과 함께.

“어떤가, 아렌. 맛있어 보이는게 많지? 눈치 보지 말고 많이 들게.”

“네, 감사합니다.”

이따금씩 레온은 아렌에게 단순한 주인 이상의 호의를 베풀 때가 많았다.

물론, 그 행동에는 또래 아이로서의 동질감도 있겠지만.

‘대체로, 내 점을 믿을수록 이렇게 된단 말이지.’

점이란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모르는 문제의 답을 구하는 일이다.

그 점술을 믿으면 믿을수록 점술가에게도 더 깊게 의존하게 되고, 믿음은 더욱 공고해지니까.

혹시나 연회 중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신경을 주위에 쏟으며 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오, 레온. 옆에 그 볼품없는 시종은 새로 들여온 아이냐?”

“아, 테오 형님.”

레온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를 향했다. 말을 걸어온 사람의 머리는, 레온보다 머리 둘은 더 컸으니까.

제국의 제9 황자, 테오드릭.

레온의 형이지만, 그래봐야 고작해야 3살 차이.

하지만 열세 살에 불과한 소년이지만 키와 체격은 이미 성인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선천적인 무골에 단련까지 부지런히 한 터라, 테오의 분위기는 소년이라기보다 잘 단련된 무사에 더 가까웠다.

“요즘 검술 훈련을 한다더니, 꽤 살 만한가 보군. 여기저기 다친 곳이 보인다만.”

“아, 괜찮습니다, 형님. 아직 어색하고 미진하지만, 아래에 있을수록 올라갈 곳도 많은 법이죠.”

“흥, 송충이는 뽕잎만 먹고 산다지 않나. 네가 괜한 고생을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무어냐.”

“…누에입니다.”

“뭐가!”

“뽕잎만 먹는 벌레 말입니다. 송충이가 아니라, 누에입니다.”

“…….”

테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렌은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여전하군. 무(武) 외골수, 테오드릭.’

반면 레온은 문(文) 일변도였다. 사람들이 괜히 문무를 겸비한 제1 황자 라이안을 황태자 감으로 치켜세우는 게 아니다.

“…일부러 그런 거다! 네가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그렇지요!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하였군요.”

자신의 무안함을 지우기 위해 주변에 차려진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는 테오.

저건, 비둘기 볶음이었다.

우적, 우적.

이미 어른만 한 몸집이지만 한참 더 성장할 시기인 테오는 하염없이 비둘기 볶음을 위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배가 고픈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온 전하.”

그리고, 아렌도 잠시 거들었다.

개인 접시에 덜어 조심스레 맛을 본 아렌.

그런데.

‘…맛이, 달라?’

상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어제 먹었던 음식보다 맛이 더 좋을 정도다.

하지만 음식을 하루 둔다고 더 맛있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게다가 시간의 차이가 아닌 근본적인 재료가 달랐다.

어제는 없었지만, 오늘은 있는 재료가 있었기 때문에.

이건 양쪽 음식을 다 맛보고, 어느 재료가 탈을 일으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였다.

‘…그렇군.’

“뭣하냐, 레온. 너도 요즘 단련을 하니 고기를 많이 먹고 힘을 길러야지.”

“그렇군요. 저도 아직 힘이 붙어야 하니까요.”

레온이 비둘기 볶음 접시를 집었다.

덥석!

그리고, 아렌이 그 손목을 붙잡았다.

예상밖의 행동에 대노(大怒)한 것은 제9 황자, 테오드릭이었다.

“뭐냐! 넌!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드시면 안 됩니다.”

“…뭐라?”

아렌은 확신을 담아 또렷하게 말했다.

“이 음식은, 레온 황자님께 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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