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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3화 (3/227)

#003화

아렌은 차례대로 카드를 뒤집었다.

물론 카드 더미 가장 위에 있는 카드가 아니라, 아렌이 특정하고 뽑은 카드였다.

방랑족은 어딜 가든 험한 손버릇으로 악명높았고, 그건 방랑족 출신인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카드점을 보는 것 이상으로 손님들의 주머니를 스리슬쩍 하는 건 팁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마하니, 이 기술을 점괘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어떤 카드를 뽑든, 그 카드에 맞게 이야기를 지어내면 그만이었다.

좋은 카드를 뽑으면 그대로 좋고, 나쁜 카드를 뽑으면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으니 좋다는 식.

하지만 뽑을 카드를 바꾼다는 건, 아렌 나름의 각오기도 했다.

나오는 점괘를 멋대로 조종하듯, 황족들을 뒤에서 부리는 흑막이 되겠다는 선언.

아렌이 뽑은 카드는 밭을 가는 물소.

“보아하니 황자님은, 몸을 단련하는 것보다 지식을 가꾸는 것을 더 선호하시는군요.”

“음, 그렇네. 사실 내 흥미는 몸의 근육보다 머리에 지식을 쌓는데 더 쏠려 있지.”

“그렇군요. 하지만, 지식이라는 내용물은 육체라는 튼튼한 그릇에 담겨있어야 비로소 더 빛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점괘가 그리 나왔나?”

레온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예전부터, 황자는 힘든 훈련을 질색했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레온에게 힘든 훈련 따위 대충 하고, 그 대신 잘하는 공부에 더 매진하라는 점괘를 말했었다.

황자는 아주 만족스러워했고, 20년동안 몸은 약하지만 아주 박식한 황자로 자랐다.

‘내가 전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점괘를 말하는 날이 올 줄은.’

지금은 황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점괘가 아니었다.

황자, 그리고 자신에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점괘.

지금의 황제 브륀할트 8세는 철저한 실력주의로 자신의 후계자를 뽑겠다고 천명했다.

제1황자 라이안이 황태자인 것은 황실의 장자여서가 아니라 그가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은 알고 있었다.

단지 싫어할 뿐, 레온 황자가 무술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레온 황자의 환심을 사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그보다 중요한 건 제12 황자 레온의 황실 내 입지를 조금이라도 더 넓히는 것이다.

천성이 의심 많고 신중한 제1 황자는 처음부터 아렌을 못마땅해했고, 그건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자신을 비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이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게 최대한 늦어야겠지.’

첫 번째 생에서 레온은 아렌의 존재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황제와 황녀에게 아렌을 소개했고, 그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두며 아렌의 입지는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반감과 우려, 시기가 섞여 있었다.

‘레온 황자에게 내 점괘가 용하다는 건 믿게 하되, 내 정체는 숨기게끔 하는 정도가 딱 좋겠지. 그편이 내가 움직이기도 더 좋을 테고.’

황족을 후견으로 둔 채 20년이나 황궁에서 지낸 짬밥이 멀리 가진 않는다.

이전 아렌을 둘러싼 소문이 그러했듯, 아렌은 정말 황실의 흑막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흑막은, 드러나서는 안 된다.

“으음… 자네 점술이 꽤 맞는다는 건 알겠네.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역시, 그런 점술이 나왔다는 것만으로 수업 방향을 정하는 건 좀…”

황자가 난색을 표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점괘였다면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겠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의 점괘인 만큼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제 점괘는 단지 여흥일 뿐, 이것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 지으시면 오히려 제가 면목이 없어지지요.”

“그, 그래. 내가 할 말이 바로 그거네.”

“그렇지요. 하고 싶은 수업만 골라서 하는 것, 그것도 분명 선택지 중 하나일 테니까요.”

“…뭐라고?”

꿈틀, 레온 황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렌의 말은 은근한 성토였다.

‘너는 황자가 되어서 하기 싫은 것은 피하는 거냐’라는.

레온의 표정을 읽은 아렌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심기를 거스르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결례, 사죄드리겠습니다. 레온나토스 전하.”

“…….”

황자는 말이 없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렌에겐 지금 레온의 표정이 어떤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레온 황자의 반응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제가 확실히 나은 미래로 인도해드리지요, 그저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레온 전하.’

*****

아렌이 레온 황자와 처음 만난 후 며칠간, 황자는 한 번도 아렌을 부르지 않았다.

잠시 황자의 전속 시종이었던 아렌은 어느새 다시 궁궐의 최하층에서 감자를 깎는 처지가 되었다.

‘역시, 황자의 노여움을 강하게 산 건가?’

이대로 황자가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아렌은 계획을 다시 짜야만 했다.

물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렌이 다음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쯤.

“아렌, 다시 올라가 봐라. 황자 전하께서 찾으신다.”

“네, 그러겠습니다.”

‘…역시.’

아렌은 한 번 더 황궁의 최상층, 레온의 거처에 방문했다.

며칠 만에 보는 황자는, 어딘지 지쳐 보였다.

총명한 듯 또렷했던 눈 아래에는 거뭇한 기미가 껴 있었고 걷어 올린 팔에는 무수한 멍자국이 남아있었다.

“아, 자네 왔는가?”

하지만, 고작 열 살인 레온 황자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자네 말대로, 해 보지도 않고 괜히 겁을 먹은 것 같아.”

오히려 황자는 만족한 기색이었다. 팔에 무수히 많은 멍자국이 생겼음에도.

“교관은 대련에서 내게 멍을 내자 곧바로 엎드리던데,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의외로 괜찮더군. 몸이 지쳤을 때 오히려 공부도 더 잘 되는 것 같고 말야. 이것도 다 네 점괘대로다.”

“그 모든 것은, 황자 전하의 노력의 결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네 점괘가 등을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모르고 있었겠지. 그간 바빠서 널 못 챙겨준 것, 미안하구나.”

레온은 일어서 아렌에게 다가왔다.

“이제 넌, 누가 뭐래도 내 전속 시종이다. 곧 거처도 바꿔주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아렌은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황자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는데도 이전과 결과가 비슷하다니.’

전에도 그랬다. 전속 시종을 고르는 자리에서 아렌은 손을 들지 않았지만, 시종장은 기다렸다는 듯 아렌을 선택했다.

어쩌면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아렌이 아무리 바꾸려 해도 그리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속단은 일러.’

어중간한 차이가 아니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는 확연한 차이라면 어떨까.

“그런데, 그 이후로 다른 점을 본 건 없느냐?”

레온 황자가 은근하게 물었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아렌은 품속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실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아렌은 카드를 섞은 다음 바닥에 놓고, 맨 위의 한 장을 뽑았다.

물론 무작위로 보이지만 실은 아렌이 조작한 카드였다.

카드는, ‘엎어진 식탁’ 카드였다.

“몇 번이나 반복해도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혹시 이른 시일 안에 연회가 있지는 않습니까?”

“연회라! 네 점은 정말로 놀랍구나.”

레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아렌은 앞으로 며칠 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연회장 식중독 사건.’

황실이 주최해 열린 연회에서, 레온나토스 황자는 상한 음식을 먹고 며칠이나 앓아눕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식중독인 줄 알았지만, 실은 아니었고 이후 레온 황자는 식단에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열이 펄펄 끓고 사경을 헤맬 정도로 크게 데이게 되지. 당연히 내가 막겠지만.’

레온나토스 황자가 무사해야 아렌의 지위 역시 덩달아 올라가니 레온 황자 앞을 막는 사건들을 치우는 건 미래를 아는 아렌의 몫이었다.

레온은 황급히 물었다.

“그래. 네 말대로 조만간 연회가 있을 예정이지. 그래서?”

“…그다음 카드는, ‘해골과 독’ 카드입니다. 대부분 ‘죽음에까지 이르는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때론 단순히 독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어쩌면…”

“나쁜 카드인가?”

“네. 흉, 입니다.”

아렌의 말을 들은 레온 황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연회장의 음식에 독이 들어간다? 감히 제국의 연회장에서?”

고작 열 살이지만, 그 얼굴은 차후 제국을 다스릴 후보의 얼굴로는 썩 잘 어울렸다.

“어디까지나 나쁜 점괘가 나온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독, 인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단지 맞지 않는 음식이었을 뿐이지만.’

“그래. 물론 네 점괘를 믿지만, 완전히 맹신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내 가신들에게 말해 연회장의 음식들을 더 철저히 살피라고 말해두지. 그럼 되겠나?”

“보잘것없는 제 말에 귀 기울여주신 점, 백은이 난망하옵니다.”

아렌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레온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굉장히, 격식을 차린 말이구나. 어디선가 예의를 배운 것이냐?”

“그럴 리가요. 기분 탓이겠지요.”

“…….”

*****

연회의 음식 준비는, 이틀 전부터 시작한다.

먼저 만들어놔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요리부터 먼저 만들어놓은 후 가장 신선해야 하는 요리가 가장 나중에.

하지만 이틀 전에 만들어놓은 요리가 맛이 있을 리 없다.

수분은 완전히 날아가 딱딱하게 굳고, 상하지 않도록 온갖 향신료를 퍼부어 실제로 상했더라도 맛으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연회장에서 문제가 된 요리는 비둘기 살코기 볶음.

연회장에 있던 전원이 모두 조금씩 먹었던 요리로, 여느 고기 요리가 그렇듯 저 요리도 당연히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요리를 먹었는데도 레온나토스 혼자만 중태에 빠졌다.

‘어쨌든, 원인을 알면 막기도 쉬운 법이지.’

레온 황자에게 좀 더 명확히 귀띔해 주면 훨씬 쉽게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막는 건 능사가 아니다.

최선은 일어나기 직전의 사건을, 아렌의 활약으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정도로 보여야 했다.

황궁의 음식고는 돌벽으로 단단히 감싸져 항상 서늘함이 감돌았고, 그 안에는 이미 완성된 다른 음식들과 함께 비둘기 볶음이 큰 바구니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음식고 안에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 거기 누구니?”

몰래 숨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거긴 이미 누군가 있었다.

“어라? 넌 분명 레온나토스 전하의 시종이었던-”

“-아렌입니다.”

아렌이 레온을 처음 만날 때, 아렌의 옷을 갈아입혀 준 시녀였다.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여기 왠일이지?”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요.”

“확인할 거? 네가?”

“이거, 연회에 나갈 음식인가요?”

“그래, 맞긴 한데… 아!”

알것 같다는 듯 시녀는 배시시 웃었다.

“아항, 너도 몰래 한 점 하러 왔구나?”

“…네?”

“맞지? 정답이지? 연회에 나갈 음식에 몰래 손대려 하다니, 떽! 이 누나가 아니었으면 크게 혼났을걸?”

새로이 황자의 전속 시종이 된 꼬마는, 분명 생전 처음일 텐데도 온수 목욕과 새 옷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 능청스러움이, 시녀는 마음에 들었다.

“난 네안이라고 해. 가다가 지나치면 아는 체하고? 다음엔 누나랑도 같이 먹자. 넌 꽤 의젓한 게, 애늙은이같아서 오히려 귀엽거든.”

‘귀엽다고, 내가?’

근 20년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아렌의 기분은 꽤나 묘했다.

“그럼, 난 간다?”

그리곤 정말 물러나는 시녀, 네안.

조금 황당한 심정의 아렌이었다.

‘…음식 관리가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불만을 말할 순 없다. 경계가 허술하지 않은 덕에 아렌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아렌은 곧바로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비둘기 볶음을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고기 말고, 다른 재료들도 확인하면서.

우물우물.

요리는, 별문제 없이 맛있었다.

그거야 문제 될 것 없다.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도 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으니까.

문제는 아렌 황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그’ 재료였다.

“…재료에서 빠졌나? 설마 아렌 황자에게 한번 충고한 것만으로?”

어쩌면 레온 황자가 음식을 좀 더 엄격히 관리하겠다는 말이, 다른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회귀 전에는 한번 사경을 헤맨 뒤에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걸로, 레온 황자의 위험도 사라졌지만 동시에 아렌 자신이 공을 세울 기회 역시 사라졌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렌은 조금 질긴 감이 있는 비둘기 볶음을 우물우물 씹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러다, 느닷없이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아렌의 움직임을 멈췄다.

단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뒤돌아선 아렌에겐 보이지 않지만, 등 뒤에 닿은 건 곧고 날카로운 칼날. 언제든 찔러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황자님께 점괘를 흘린 후 연회장에 나갈 요리에 접근해? 스스로 독을 타 자작극을 벌일 셈이었나? 무슨 목적으로 황자님께 접근한 거지?”

목소리는 가늘고 고왔다. 변성기가 찾아오지 않은 어린 나이거나 여자, 혹은 둘 다이거나.

흔들림 없는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아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그립기까지 한 아렌이었다.

‘오랜만이군. 암살 시종 멜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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