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다시, 살아났다고?’
목이 잘릴 때만 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지금도 목의 잘린 단면의 서늘함이 생생했다.
어떻게, 대체 무슨 이유로 다시 얻게 된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아렌이 가진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다시 얻게 된 삶에 아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이, 시종장에겐 고깝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뭘 농땡이 부리고 있어!”
산더미처럼 쌓인 양파를 앞에 놓고, 손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눈물만 줄줄 흘리며 웃고 있는 아이를 향해 시종장은 매섭게 회초리를 날렸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버드나무 나뭇가지로 만든 회초리가 아렌의 맨살에 붉은 선을 그렸다.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맨살은 금방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분명 아플 텐데도 아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아픔조차도,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목이 잘리는 감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어? 이 새끼 봐라?”
부아가 치민 시종장의 회초리가 더 매서워졌다.
당장 되살아난 기쁨에 비하면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슬슬 성가셔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씁, 방해하기는.’
고작해야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였다. 맞는다고 죽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아픔이라도 아렌의 생각을 방해하는 데 충분했다.
‘그래, 괜히 눈 밖에 날 필요도 없겠지.’
20년 동안 황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아렌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시종장을 구슬리는 건 치즈를 자르기보다 쉬웠다.
“아악!”
시종자의 팔이 가장 세게 휘둘러졌을 때를 골라 일부러 몸을 움직여 얼굴을 맞은 아렌.
눈을 맞은 것처럼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시종장에게, 의도보다 과한 체벌이라 여기게 해 죄책감을 심어준 것.
“어어? 이 자식이 그러니 왜 함부로 움직여!?”
“죄송합니다! 당연히 더 맞아야지요! 잘못을 저질렀으니 죄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다시 때려주십시오.”
“…어어, 이 자식 봐라?”
비틀거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은 아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계속 체벌을 받아야 할 이유를 차단한다.
이런 행동이 도리에 불에 기름 붓는 행위인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시종장은 분명, 아이를 학대하며 즐거워하는 악질은 아니었다.
“…흠, 흠! 이 자식이 네 잘못은 아는 모양이구나.”
시종장의 눈가 주름이 깊어지고 입술은 더 다물렸다. 시종장의 표정에 관용의 감정이 묻어나왔다.
“물론입니다. 잠시 눈이 매워 정신이 팔린 상태였습니다. 해이해진 정신을 고쳐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래, 알면 되었다. 다시 양파나 까도록. 험, 험!”
순간 급발진해 회초리를 휘두른 자신이 무안해졌는지, 자리를 떠나는 시종장.
그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아렌은 씩 웃었다.
‘…흥, 이정도야 간단하지.’
배움도 외모도, 출신조차도 보잘것없는 미천한 아이가, 오직 눈치 하나만으로 황궁의 상층부까지 기어 올라갔다.
아렌에게 시종장 하나쯤 멋대로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
“어이, 거기.”
“어, 어?”
“지금이 언제지?”
“…뭐라고?”
“몇 년, 몇 월 며칠이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종장에 비굴하게 숙이던 꼬마가, 흠씬 두들겨 맞고도 눈물 한 방울 찔끔거리지 않는 데에 시종 꼬마는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
“…5월 35일?”
“연도는?”
“…브륀할트력 542년.”
“흠, 역시.”
아렌은 정확히 10살 무렵, 20년 전으로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옆의 꼬마는 더 영문 모를 상태가 되었다.
오늘 날짜를 모를 수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이번 연도를 모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기에.
아이는 더는 아렌에게 연관되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자, 그럼 어떻게 한다?”
지금 아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이대로 최대한 황궁에서 벗어나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것.
계속 황궁에 있다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또다시 죽임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팔려 와 황궁의 시종이 된 이상, 보내달라고 흔쾌히 보내주지는 않겠지.’
둘째. 한번 아렌 자신이 밟아왔던 길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먼젓번에도 아렌은 황실 사람들의 신뢰로 실로 간단하게 황궁의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시작한다고 해서, 더 어려울 리는 없다. 도리어 간단하면 또 모를까.
“…….”
하지만, 저도 모르게 아렌은 목을 쓰다듬었다. 목에서는 여전히 실금처럼, 서늘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건 씻는다고, 때를 벗긴다고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영혼에 각인되기라도 한 듯 끈덕지게 남아 있는 감각은, 아렌에게 남은 근본적인 공포였다.
‘…분명, 여기서 며칠 뒤쯤이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아렌은 습관처럼 손에 낀 흑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평생 끼고 있었던 반지인 만큼, 그걸 만지고 있을 때만큼은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실금이 있었나?’
없었다. 평생 끼고 있었고, 관리해온 어머니의 흑옥반지. 반지에는 30살 무렵에도 없던, 자그마한 실금이 하나 생겨 있었다.
이 실금을 못 보고 20년이나 살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대답은 하나였다.
“…그래, 이제 또다시 살아나지는 못한다 이거지?”
어떤 영험한 물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렌을 다시 과거로 돌려준 대신 반지가 깨어진 모양.
아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4일 후.
시종장이 황궁 최하층에 있는 아이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오늘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곁에 둘 시종을 원하셔서다. 아무래도 나이대가 비슷한 녀석들이 좋겠지. 혹시, 원하는 자가 있나?”
시종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우수수 손을 들었다.
그야 당연하다.
황실의 전속 시종이 되는 것만으로 덥고 습한 조리실 밑바닥을 나갈 수 있고, 대우도 훨씬 나아지니까.
특히 황족 중 누군가의 호의라도 입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결별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아렌이 첫 번째 삶에서 똑똑히 겪었기 때문에 싫을 정도로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 아렌도 지금 손을 들었었다.
손을 든 수십 명의 아이들 중 운좋게 선택된 것. 그것이 아렌의 모든 행운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갈 순 없지.’
모두가 손을 든 가운데 아렌은 손을 들지 않았다.
아직 마음을 정한 건 아니지만, 되살아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따금 목의 단면이 서늘했으니까.
자신이 목이 잘린 미래와 비슷한 경로로 가는 것을 무의식중에 꺼리고 있었다.
‘자, 빨리 아무나 행운의 주인공이 되라고.’
달라진 이번 미래에 누가 행운의 주인공이 될지, 아렌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속 시종 후보를 고르는 시종장의 눈이 뒷짐 진 아렌에 향했다.
회초리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의연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시종장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디, 저 녀석 봐라? 분명 자기도 탐이 나는 자리일 텐데, 다른 녀석들한테 양보한다고?’
먼젓번에 조금 과하게 때린 것도 있겠다, 시종장의 마음이 기울었다.
“…거기, 너. 혼자만 손 안 들고 있군. 분명 욕심나는 자리였을 텐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양보해? 황자 전하 곁에는 너 같은 녀석이 적격이지.”
“…….”
시종장은 손도 들지 않은 아렌을 뽑았다.
아무래도, 운명은 그리 쉽게 거스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아무리 황궁에서 일한다지만, 황궁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말 할 수 없었다.
황자와 만나기 전, 아렌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전신 곳곳에 새 단장을 했다.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온수에 몸을 담갔다 일어서니, 온몸에서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 번도 온수에 목욕해본 적 없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시녀들은 아렌이 다른 아이들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내심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수건은 어디 있죠?”
“…어, 저기 있단다.”
하지만 아렌은 무덤덤했다.
첫 번째 삶에서 난생처음 온수에 몸을 담갔을 때 아렌은 거의 눈물 흘릴 뻔했지만, 지금의 아렌에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보드라운 수건으로 몸을 닦고, 익숙하게 향유를 몸에 바르는 아렌을 보고 도와주러 온 시녀들이 더 놀랐다.
“여기 이 옷을 입으면 되나요?”
“그래, 하지만 처음엔 입기 힘들 거야. 우리가 도와줄-”
시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렌은 옷을 순서에 맞게 차려입었다.
속옷과 바지, 바지와 상의를 연결하는 끈, 그리고 상의와 조끼 순으로.
“이렇게 입는 것 맞죠?”
“…그래, 맞아.”
아렌으로선 뜻하지 않게 황자 앞에 다시 서게 되었지만, 일을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예전과는 다른 미래를 원했으니까.
예전에는, 최대한 황자가 내심 원하는 방향으로 점괘를 말했었다.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말하는 아렌의 점괘는 항상 황자를 흡족하게 했다.
황자의 호감을 사는 건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반대로 해야 했다.
‘…그럼, 가볼까?’
아렌은 황자의 방에 들어섰다.
저번 생에서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지금 아렌은 덤덤히, 한 20년 왕자를 섬긴 사람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황실의 시종 아렌이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개를 들라.”
아렌은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오랜 세월 봐왔던, 아렌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레온나토스 황자가 앉아 있었다.
반곱슬인 금발에 완고한 성품이 엿보이는 푸른 눈.
고작 열 살의 나이였지만, 소년에겐 이미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년.
레온나토스 황자, 레온은 눈앞에 있는 또래 아이에게 눈을 빛냈다.
“앞으로 네게 여러 수고를 끼치게 될 거다. 그때는 부디 잘 부탁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특별히 용무가 없다. 앞으로 계속 볼 사이니 이 기회에 너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데. 뭔가 특기는 없나?”
‘그렇지. 그렇게 물어올 줄 알았어.’
변명이 길지만 실은 놀이 상대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때 아렌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사실 전, 점을 볼 줄 압니다. 간단한 카드만 있다면요.”
“오오, 그런가! 여흥 삼아 한번 해 보면 재미있겠군!”
화색이 되는 레온 황자.
그 모습을 보고 아렌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 아파왔다.
레온 황자의 주변에는 친하게 지낼만한 또래가 극단적으로 적었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황족이라는 지위에 끌린 날파리들 뿐.
마음을 터놓을 상대라곤 비슷한 나이의, 점을 볼 줄 아는 시종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황자의 마음을 이용한 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발칙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렌 역시 황자를 친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건드려 호가호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불안할 때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렌은 이제 첫 번째 삶과 다른 선택을 할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황자의 마음에 드는 대답만 골라 했다면, 지금은 반대로 황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만 해서 그의 호의를 빠르게 잃는 것.
그것이 아렌에게 예정된 미래를 피하는 길이라 생각했으니까.
팔락팔락.
아렌은 황자가 가져온 카드를 하나씩 넘겼다.
카드의 문양은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그럴듯한 언변으로 상대를 믿게 하면 그만이므로.
“‘물을 엎지른 수도사’. 황자님은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 속엔 연약한 구석이 있군요. 그걸 들키기 싫어 하시고요.”
“아니, 어떻게 알았지?”
“‘엎어진 코인’.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싫어하시는군요. 그들에 배신당하는 것도요.”
“이럴 수가, 완전히 족집게야!”
“‘엉킨 올가미’ 카드가 나왔군요. 이건 스스로에 주어진 속박을 싫어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요.”
“이젠 놀랍지도 않군!”
아렌이 한 말들은 대충 아무에게나 해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말들이었다.
어차피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상, 자신이 하는 점괘 따위 반쪽짜리에 불과하니 이런 식으로 점괘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밖에.
곧이어 아렌이 본론을 꺼내려 할 찰나였다.
‘-잠깐만 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잖아.’
아렌의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황궁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일따위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간 바람 잘 날 없던 황궁의 굵직한 사건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사실들만 기억한다 해도, ‘미래 일을 알지 못하는 반쪽짜리 점술가’가 아니게 된다.
첫 번째 삶에서 지나온 길을 다시 지나오는 게 아니라, 더 쉽고 편한 지름길로 빨리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어이, 점을 보다 왜 그러나?”
레온 황자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저 순진한 얼굴을 보니, 절로 부아가 치민 아렌이었다.
20년 후, 자신이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제12 황자는 알고 있을까?
적어도, 아렌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이라는 것도.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지.’
한번 죽었다는 충격,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는 안도.
거기에 가려져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감각이, 심지 아래서부터 부글부글 끓어 올라왔다.
그건, 황자를 살해하고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 죽게 만든 흑막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황실을 뒤에서 주무르는 흑막이라고? 재밌군’
항상 아렌에게 따라다니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음모론.
대응할 가치가 없기에 그동안 무시해왔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목이 잘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죄송합니다. 다음 카드는 이렇습니다.”
아렌은 카드 더미 맨 윗장을 능숙하게 다른 카드로 바꿔치기했다.
황자에게 다음 카드를 뒤집어주며, 아렌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되어주지. 진짜 흑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