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정말 여기가, 내 집이라니.”
황궁의 점술가, 아렌은 감개무량한 눈으로 거실을 바라봤다.
안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방 안.
북방 여우 100마리의 모피로 만든 푹신하고 순백색의 소파, 발목까지 푹푹 빠질 만큼 푹신한 양탄자, 그리고 세탁만으로도 평민의 3달 치 월급이 드는 비단옷까지.
“정말,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황실의 점술가로서, 아렌은 황실 사람들의 신뢰를 두루 받고 있었다.
더러는 아렌이 요사한 점괘로 황실을 어지럽히는 요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지.”
“뭐가 그렇게 웃겨요, 서방님?”
아렌이 감상에 잠겨있을 때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다가왔다.
“별것 아냐, 아라흐네. 예전 일을 잠깐 떠올렸을 뿐.”
아직 신혼인 아렌의 아내, 아라흐네는 평소에도 검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아렌이 물었다.
“그거, 집에서도 꼭 쓰고 있어야겠어?”
“하지만 어떡해요. 서방님한테 내 생각 속속들이 보이기는 싫은걸요.”
“이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20년 전, 아렌이 10살이었을 무렵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랑족 출신의 부랑자였다.
가진 것이라곤 점술가인 어머니께 배웠던 간단한 카드점 실력과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 그리고 금전적 가치는 없는 낡은 흑옥 반지뿐.
어머니는 아렌에게 반지를 쥐여주며 말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면 된다고. 그러면 제 한 목숨 건사할 수 있다고.
‘네. 어머니 말 대로였어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아렌은 그렇게 했다.
점술가라 해봤자 특별한 예지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운명은커녕, 내일 날씨조차 모르는 형편.
아렌이 한 것은 단지 점괘인 척하면서 상대방의 기색을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언했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아렌의 점괘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받아들여진 원동력이었다.
“하긴, 역시 서방님은 대단해요.”
아라흐네가 아렌의 가슴에 폭 안기며 말했다.
“그 좋은 눈썰미가 아니셨다면 서방님이 황궁의 점술가가 되지도 못하셨겠죠. 하지만 그런 서방님더러, 왕가를 뒤에서 조종하는 더러운 흑막이라 지칭하는 사람들도 많은걸요?”
“허, 흑막이라. 차라리 정말 그렇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아렌에게 험악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다.
괜한 질투라기보다, 정말 황실을 아끼는 사람들이지만, 아렌이 황실을 뒤에서 쥐락펴락했냐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아렌은 단지, 제국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의 전속 시종이 된 후 점진적으로 그와 친해졌을 뿐.
물론, 그 과정에 아렌의 점술이 큰 영향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의 레온나토스 황자, 레온은 자신의 앞길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아렌이 거기에 거들어 진정 레온이 원하는 방향으로 물꼬를 터 준 것일 뿐.
아렌이 황자와 친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고, 레온은 아렌을 기꺼이 황녀, 황제폐하께 소개시켜줬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아렌의 점괘는 항상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구석이 있었고, 그 후 아렌의 입지는 일사천리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런 아라흐네 역시 왕궁의 시녀 출신.
예전을 떠올리던 아라흐네의 면사포 아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세리엔 황녀님, 역시 서방님을 좋아했을걸요?”
“당신도 그 말이야? 그건 그냥 소문이었을 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가요?”
실제로 황녀 세리엔과 사이가 좋긴 했다. 레온 황자와 같이 있을 때도 어떤 핑계를 대서든 같이 끼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밀감의 발로일 뿐이라 아렌은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리엔 황녀는 몇 년 전 이미 이웃 나라의 공작과 결혼한 상태.
비록 결혼식 때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친한 만큼 그 표정의 의미를 굳이 파헤치지는 않았다.
“서방님도 참, 무심하기도 하셔라. 하긴, 그러니 이런 황궁에서도 무사하셨겠죠?”
“…이런 황궁이라니?”
“그간 무수히도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황궁,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제국의 온갖 권력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아라흐네가 아픈 곳을 물었다.
당연히, 불안하지 않을 리 없다.
도스린 공작부인 독살, 궁중 연회장 단체 식중독 사건, 귀족 자녀 연쇄 실종 등 굵직한 사건들이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것이 제국이고, 또 황궁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흉흉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기에, 더욱 아렌에게 의지하기도 했고.
물론, 아렌에게 예지능력은 없었다.
단지 처세와 눈치만으로 근근이 헤쳐왔을 뿐.
“어쩔 수 없지. 황궁은 원래 그런 곳인걸.”
“그리고 서방님은 단지 점괘를 알려주는 것뿐, 미래를 아는 건 아니니까요.”
“뭘 새삼스럽게.”
“그러니… 바로 앞일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겠죠.”
“……?”
아라흐네의 뜻 모를 말에, 아렌은 저도 모르게 아내의 표정을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검은 면사포에 가려진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때.
“점술가 아렌!”
두꺼운 오동나무 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황실의 근위병들이 들이닥쳤다.
아렌은 목소리를 높였다.
“뭐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 이 무슨 무례냐!”
평소라면 눈도 못 마주쳤을 황실의 근위병.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사냥터에서, 레온나토스 전하가 승하하셨다.”
“…뭐라고?”
“지금 당장 점술가 아렌을 잡아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다.”
“…….”
“분명 네가, 전하께 사냥을 추천했지?”
아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건… 레온 전하가 그걸 원하셨으니까-’
하지만 그걸 변명으로 할 수는 없다.
넋을 놓은 아렌의 양팔을 붙잡은 근위병들.
끌려가는 와중에도 아렌은 자신의 아내, 아라흐네에게 말했다.
“아라흐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테니까.”
“서방님! 이게 대체!”
아렌에 달려드는 아라흐네와 그걸 제지하는 근위병.
잠깐의 몸싸움 와중, 아라흐네의 얼굴을 가린 검은 면사포가 출렁거렸다.
아렌은 아라흐네의 표정을 포착했다.
“…….”
긴장, 두려움, 그리고 생각대로 되어간다는 충실감.
아라흐네의 표정 위에 떠오른, 얼굴 아래의 본심이었다.
‘-거짓말.’
친우처럼 막역했던 제12 황자의 죽음, 거기에 아내의 뜻 모를 배신까지 더해진 아렌은 힘없이 질질 끌려 나갔다.
마치, 목이 꺾인 짐승처럼.
*****
물도 식사도 없이 차가운 독방에 갇혀있길 3일.
독방에서 형장으로 끌려 나왔을 때, 아렌의 몰골은 이미 인간 가장 밑바닥의 모습이었다.
화장실도 없는 독방은 씻을 물은커녕 마실 물도 없었기에, 온몸에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며칠간 빛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끌려 나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
끌려온 아렌의 목과 손은 단두대에 완전히 결박당했다.
그 곁에는, 무기질적으로 죄목을 읊는 처형인만 있을 뿐.
“점술가 아렌. 넌 제국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를 사냥으로 유인해, 암살에 동참한 것을 인정하는가?”
“…아니.”
“점술가 아렌. 넌 황실의 점술가를 자처하며 황족을 현혹하고, 국정을 농단한 것을 인정하는가?”
“아니.”
“점술가 아렌. 넌 황실이 네게 보낸 무한한 신뢰를 저버리고, 역모를 도모한 것을 인정하는가?”
“…….”
그 대목에서, 아렌은 고개를 들었다.
높은 단상 위에서 아렌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들이 보였다.
분노와 슬픔으로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황제, 브륀할트 8세.
차가운 눈으로 아렌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는 제1 황태자.
그리고 이웃 나라에서 급하게 달려온 세리엔 황녀.
황녀의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불어 있었다.
작고 빨간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지?”
“-아닙니다. 정말 제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처형인이 소리쳤다.
“닥쳐라! 설령 음모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네 점괘가 완전히 빗나갔다는 건 틀림없다. 감히 사이한 술수로 황실을 능멸해?”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아렌의 점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지 않기에, 아렌은 미래를 확답하는 식의 점괘 풀이를 하지 않았다.
점괘가 빗나갔을 때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 황자가 워낙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기에, 이번에는 그쪽으로 등을 떠밀어줬을 뿐.
그리고 자신이 황자에게 사냥을 권유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에게도, 는 아니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 아라흐네.
그 아라흐네 역시 검은 면사포를 쓴 채 민중들과 같이 아렌의 처형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라흐네. 네가 황자를 시해한 자들과 관련 있는 거냐?’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황실의 수면 아래로 온갖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설마 그 손아귀가 자신의 바로 곁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렌은 어머니의 말대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하면 위기를 모면한다는 말씀대로.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건 경멸과 증오, 다시 경멸뿐이었다.
그리고 아렌이 어떤 감언이설을 해봤자, 집행인은 단두대의 칼날을 내려치겠지.
“자, 잠깐만. 내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소. 조금만 더 시간을-”
“더는 듣기 싫군. 내려라.”
황제의 말과 동시에 덜걱,
작두를 단단히 고정해둔 고정쇠가 빠졌다.
곧이어 어린아이 무게는 족히 될 법한 강철 날이 뚝 떨어졌다.
-서걱.
시원하다, 라고 느낄 만큼 거침없는 감각과 함께 아렌의 시야가 데굴데굴 굴렀다.
아렌의 잘린 머리통에는 아직 약간의 의식이 남아있었다.
아렌 머리통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의 목 없는 몸통.
그 깨끗한 단면에서 물감처럼 붉은 피가 심장박동에 따라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여전히 아렌의 뇌는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잠시뿐.
시간이 지나 모든 피가 빠져나오면, 아렌의 뇌도 속절없이 멈춰버리고 말겠지.
점점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아렌은 멍하니 머리가 결손 된 몸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목의 단면은 잘린 목을 갖다 대면 다시 붙을 것처럼 깨끗했고, 긴장으로 꽉 쥔 주먹은 두 번 다시 펴지지 않을 것처럼 꽉 다물려 있었다.
그 오른쪽 주먹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끼고 있던 어머니의 유품, 낡은 흑옥반지가 여전히 어두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머리의 피가 충분히 빠져나왔을 때쯤, 아렌의 뇌도 움직임을 멈췄다.
떠진 눈동자에선 의식의 빛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빠직.
그 순간, 아렌이 끼고 있던 흑옥 반지에 작은 실금이 생겨났다.
*****
그리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한순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흐어억!”
다시 되찾은 시야.
하지만 동시에 느껴지는 건, 눈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건, 아렌 혼자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허, 손 보인다, 손! 이 양파 다 까기 전에는 잠도 못 잘 테니 그런 줄 알아!”
회초리를 든 시종장의 고압적인 소리.
그 아래 둘러앉은, 넝마 쪼가리를 걸쳐 입은 열 명 남짓한 꼬마들은 모두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양파를 까고 있었다.
‘……?’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풍경.
당장 보이는 자신의 손 발도 기억에 있는 30살 건장한 청년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가는 10살 꼬마의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자신의 목이 잘리는 서늘한 감각.
지금이 죽기 직전의 주마등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그리고, 양파즙으로 흘리는 아릿한 눈물은 주마등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현실감 넘쳤다.
아렌은 손에 든 양파를 꽉 쥐었다.
단단한 양파에서 뚝뚝, 양파즙이 흘러 떨어졌다.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