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10)화 (110/110)

#110 (完)

“……카르옌.”

“뭘 원하십니까? 부귀와 영화, 아름다운 장미 정원, 작위와 명예…….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랬듯 저를 지켜주세요, 토파즈님.”

이 성안의 모든 것을 발밑에 놓아주겠다는 듯 애원하는 모습에 울렁거리던 가슴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토파즈가 입술을 달싹였다.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

“난 그런 건 하나도 바라지 않아.”

토파즈가 깨어나 카르옌의 곁을 지키던 며칠, 황자궁의 손님이 ‘가넷’이었음을 알게 된 궁인들로부터 퍼져나간 소문이 카샤프 전체를 달구었다. 10년 전 작위를 거절했던 녹스의 용병 가넷이 비밀리에 2황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검이 되었으며, 이번에야말로 작위를 수여 받아 ‘황제의 검’이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토파즈는 황제의 검 따위 되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매몰찬 거절에 카르옌이 눈가를 붉힌 채 분한 어린애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커다랗게 뜨인 눈을 보며 토파즈가 말했다.

“난 네 검이 될 생각 없어. 네 모든 게 될 거야.”

“……!”

“네가 먼저 죽음의 숲에 갇혀 있던 날 멋대로 끌고 나왔잖아. 나를 살리고, 사람을 믿게 하고, 이 땅에 지켜야 할 것들을 만들고……. 내 인생을 잔뜩 헤집어 놓고 너 혼자 황궁에 틀어박히면 끝일 줄 알았어?”

“그 말씀은…….”

카르옌이 말을 잇다가 우뚝 멈췄다.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까 두렵다는 듯.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왜 황궁을 나가겠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그건 그냥 외출을 좀 하겠다는 뜻이었다고. 그 투박한 목걸이보다는 더 어울리는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처음부터 떠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선물을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신구를 걸쳐도 저 눈동자보다 더 빛나는 건 없겠지만. 토파즈는 손을 뻗어 푸른 눈동자 위로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분명 황궁 생활은 답답해하실 거라고……. 어제 이잔이라는 작자도 토파즈님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어젯밤, 이잔이 토파즈를 찾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토파즈. 우린 녹스가 아닌 새로운 길드를 만들 거야. 다시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해 주지 않겠어?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그 제안을 들었을 때, 토파즈의 입에서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망설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미안하지만 이잔, 그건 안 될 것 같아.’

‘음,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유가 궁금한데. 용병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여전한 거야?’

토파즈가 이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머무르고 싶은 곳이 생겼거든.’

그건 어떤 장소가 아닌 누군가의 곁이었다. 담벼락에 장미가 피어 있지 않아도, 고양이나 여우를 기를 넓은 안뜰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토파즈는 늘 자유를 찾아 떠돌았지만, 그에게는 원하는 사람의 곁에 머무를 자유도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왜 내가 거절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데?”

“……정말 황궁에 남아 주신다는 말씀인가요?”

붉은 눈가에서 눈물이 또 구슬프게 떨어졌다. 그러나 물기가 사라진 뒤 드러난 동그란 눈동자는 벅찬 기쁨을 품고 있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 나 따위를 하나 더 가지는 게 뭐가 그리 좋을까. 거칠고 투박한 검 한 자루에 불과한 나를 너는 온 세상이라도 되는 듯 여긴다.

토파즈가 혀를 차며 뺨을 문지르자, 카르옌이 그 손에 뺨을 문질러 오며 말했다.

“또 제 곁을 떠나실 거라면 차라리 그 전에 저를 죽여 주세요. 토파즈님의 손에 죽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겁니다. 눈 감는 순간까지 당신과 함께 있을 테니까요…….”

“……목숨 바쳐서 지켜 놨더니 그딴 소리를 하고 있어.”

애잔한 얼굴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모양만 예쁜 협박이다.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너도 날 몇 번이나 살려 줬으니 비슷한 셈인가.”

카르옌이 의아하게 눈을 들어 올렸다. 토파즈가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며 속삭였다.

“너였지. 5년 전에 날 살린 사람.”

“……!”

카르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마 전에 죽다 살아났을 때, 예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게 기억나더라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사라져 가던 통증, 흐릿한 시야로 보이던 푸른 눈동자, 시린 손끝을 쥐어 오던 손과 새하얀 설원…….

‘신이 내가 살기를 원했나 보지.’

내가 살아나기를 원한 건 신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나 카르예니프, 너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어찌나 안도했는지 네가 알까.

“날 계속 지켜봤어?”

“…….”

카르옌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시선을 피하는 꼴이 꼭 떳떳하지 못한 잘못을 고백하는 듯했다.

“내가 죽으려고 그렌로샤 숲으로 향한 것도 알겠네.”

“…….”

“꼴사나웠겠어.”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축 처져 있을 때는 언제고, 카르옌이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슬펐습니다. 당신이 살고 싶은 이유가 내가 되지 못한다는 게, 당신에게는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토파즈가 세상을 등지며 미련이 없었던 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려 봤을 때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수를 결심하는 대신 잊으려 애쓴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이 악물고 싸워야 하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체념했다. 죽지 못해 살았다. 하지만…….

“살려 줘서 고마워. 그때 죽었으면 후회했을 거야.”

지금이라면 곧바로 네 이름을 떠올렸을 테니까.

“…….”

카르옌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넘쳤다. 토파즈가 마를 새 없는 뺨을 어루만졌다. 뜨거운 물기가 손을 적셨다. 고개를 숙인 카르옌에게서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일찍 만나러 갈 것을 그랬어요.”

“…….”

“……두려웠습니다. 이 감정은 저 혼자만의 것임을 알면서도, 그 당연함을 이해하면서도……. 당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기가 두려웠습니다. 제 존재가 토파즈님께 평생 어떤 가치도 되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요.”

눈물을 닦아낸 카르옌이 붉어진 눈시울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갔을 겁니다. 평생 토파즈님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는데, 제가 어떻게 더 참았겠습니까.”

“다 늙어서 찾아오지 그랬어.”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토파즈님은 제 얼굴을 좋아하시니까.”

눈이 발갛게 부은 채로도 제가 예쁜 것은 아는지 카르옌이 중얼거렸다.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넌 그때도 아름다웠을 거야.”

“직접 확인해 주세요. 정말 제 머리가 하얗게 세어도 아름다울지.”

카르옌이 발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가 토파즈의 손을 끌어와 제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렸다. 고개 숙여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손끝에 스치는 머리칼이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반짝였다.

“왜 마법이 저무는 시대에 저 같은 사람이 태어났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습니다. 제 인생을 꼬아 버릴 셈이었다면 꽤 적절한 방식이었다고 신을 원망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

아니, 반짝이는 것은 햇살이 아니라 카르예니프 그 자체였다. 한 인간이 이토록 찬란한 빛을 낼 수 있음을 토파즈는 그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니, 저 역시 이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어야 했겠죠.”

손등에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이는 소리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믿고 싶어졌다.

“네가 이토록 소년처럼 낭만적이라는 사실을 네 신하들이 알까.”

“그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 낭만은 토파즈님께만 바칠 것인데요.”

토파즈는 무거운 왕관을 쓴 얼굴을 손바닥 안에 가두고, 단정히 드러난 이마를 맞댔다.

“그래도 목걸이는 새로 사 줄게.”

“싫습니다.”

“왜 싫은데. 다 낡아 빠진 목걸이를 황제가 되어서도 하고 다니겠다는 거야?”

“낡아 빠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존 마법을 걸어 둬서 백 년이 지나도 안 닳아요. 그리고 이 목걸이는 이제 토파즈님께서 제게 마음을 내주셨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죽어서도 같이 묻어 달라고 할 겁니다.”

“장난해?”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람 소리를 닮은 웃음이 시원하게 퍼져 나갔다. 언제 또 이렇게 웃어 보았던가. 바람이 옷깃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만으로 서럽던 시절이 전생처럼 까마득했다.

카르옌은 토파즈의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맑게 따라 웃었다.

그가 토파즈의 이마와 머리칼에 연달아 입을 맞췄다. 한여름 장미처럼, 노을빛 보석처럼 붉은빛이 입술에 묻어났다.

새 시대의 태양이 떠오른 오후. 오랜 시간을 돌아 서로의 곁에 도달한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눈부신 햇살이 달궜다.

하나의 여정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황제의 토파즈>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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