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9)화 (109/110)

#109

카르옌의 선언을 기다렸다는 듯 그날 오후부터 황자궁으로 손님들이 차례대로 들이닥쳤다. 서류 더미를 잔뜩 껴안고 온 대신들부터 대관식 의복을 준비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은 황실 재단사, 새로 임명될 예비 수도 기사단 단장, 그리고…….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내일까지도 못 깨어나시면 전하가 대관식도 참석 안 하실까 봐 아득했거든요.”

하란이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메르디나가 조용히 덧붙였다.

“못 깨어나실까 봐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걱정했죠. 동료가 보름 동안 못 일어나는데 걱정이 안 되면 이상한 거 아닙니까?”

하란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동료. 토파즈는 입속에서 그 단어를 되뇌다가 피식 웃었다.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으니 이제는 그렇게 칭해도 위화감이 없을 듯했다.

“지난 보름 동안 저희 모두 염려가 많았습니다. 늦었지만, 전하를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토파즈님 덕분입니다.”

메르디나가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하란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토파즈는 새삼스레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물었다.

“근데 그 까치 같은 옷은 뭐야?”

“…….”

그들은 엉덩이를 덮는 기장의 검은색 제복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부츠 역시 검은색이었다. 어깨에는 테두리를 금실로 수놓은 견장이, 가슴팍에는 여러 훈장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가슴팍에 달린 훈장의 개수는 메르디나가 더 많았지만 견장에 수놓아진 꽃잎의 수는 하란이 더 많았다.

“황제 직속 친위대의 제복입니다. 정식으로 임명받기 위해서는 아직 절차가 남긴 했으나 일단은 하란이 예비 친위대장입니다.”

메르디나의 대답에 토파즈가 힐끔 하란을 살폈다. 왜 둘 중 네가 대장이냐는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하란은 다 안다는 듯 혀를 찼다. 같은 질문을 백 번쯤은 받은 얼굴이었다.

“메르디나는 언젠가 가문을 이어받아야 하니까요. 저야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으니 황제의 뒤치다꺼리에 제격이죠. 아, 혹시 토파즈님도 입단에 흥미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됐어.”

토파즈가 헛웃음을 섞어 대꾸하자 역시 헛소리였는지 하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바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간 뒤에도 방문객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토파즈는 그가 깨어난 뒤로 절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드는 카르옌 탓에 함께 응접실에서 하품을 참으며 앉아 있어야 했다. 간혹 ‘저 작자는 대체 누구냐’는 시선이 날아올 때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전하,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

해가 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손님은 바로 노아 슐츠였다. 겉모습만은 늘 멀끔하던 노아 슐츠는 어쩐지 내전이 한창이던 때보다 지금이 더욱 초췌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부서진 방벽 보수 작업에 투입되었다는데, 자원자로 나선 수도 마법사단과 황립 아카데미, 마탑과 용병단 소속 마법사들을 통솔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방벽이 보수되는 속도보다 저들끼리 싸우느라 부숴 먹는 속도가 더 빠르다나…….

토파즈가 조금 딱하게 노아 슐츠를 바라보는데, 정작 일을 떠맡긴 카르옌은 우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뭔가요?”

노아 슐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팔찌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금색 팔찌에 세공된 동그란 보석들이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로 휘황찬란한 광채를 뿜어 댔다. 결코 평범한 장신구가 아닌 듯한 팔찌의 영롱한 자태에 노아 슐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리는 선물이야.”

“……?”

노아 슐츠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짝이는 보석에 홀린 까마귀처럼 팔찌를 집어 들었다. 달칵, 노아 슐츠가 팔찌를 손목에 채우는 순간 카르옌이 웃었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그를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옌의 입에서 뜬구름 같은 축하 인사가 튀어나왔다.

“축하해, 노아 슐츠.”

“……?”

“에델티움 최초의 궁정 마법사가 된 것을.”

“……예? 궁정 마법사요?”

노아 슐츠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손목에 끼웠던 팔찌를 빼내려고 했지만 팔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아 슐츠가 허망하게 물었다.

“이게…… 왜 안 빠지죠?”

“네가 결계에 관한 비밀을 누설하면 빠질 거야.”

“그거 혹시 죽어야 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러니까 비밀을 누설하면 죽는다는 뜻……?”

“정답.”

의외로 눈치가 기민한 노아 슐츠가 물었고, 카르옌이 즉답했다. 상대가 더없이 진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노아 슐츠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배어났다.

“전하.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저는 비밀을 누설할 생각이 전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제가 밝히고 싶었다면 전하의 넋이 빠져 계셨던 지난 며칠을 틈타 실컷 떠들어 대고는 타국으로 망명이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마탑 마법사가 체질에 꼭 맞습니다. 차기 마탑주는 반드시 저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물론, 현 마탑주님은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지만!”

노아 슐츠가 말을 와르르 쏟아냈다. 안 그래도 눈앞에서 분홍색 머리통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 정신 사나웠는데 목청까지 쩌렁쩌렁했다. 토파즈는 귀를 틀어막는 쪽을 택했다. 반면 카르옌의 태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마탑에서 일하지 말래? 겸직이야.”

“……예?”

“결계 장치의 위치를 바꿀 거야. 아는 사람은 나랑 너밖에 없을 예정이고. 결계와 네 입, 두 가지만 잘 관리하면 평생 연구비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도록 지원해 주지. 내가 에델티움에서 마석 광산을 가장 많이 소유한 황족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 테고, 더 필요한 것 있나?”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전하. 조금 이르지만 폐하라고 불러드릴까요?”

“…….”

노아 슐츠의 태세 전환은 빛처럼 빨랐다. 그는 카르옌을 향해 가볍기 그지없는 충성을 남발하더니 곧장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동안 현실적인 여건, 즉 돈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연구 계획들을 구체화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떠안은 채였다.

‘천 년이나 흘렀으니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을 때가 되었죠.’

“설마 네가 말한 다른 방법이 이거야?”

카르옌이 빙긋 웃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 생각입니다. 황제가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닌 시대가 온다면, 배신할 수 없는 마법사를 황실에 충성하게 하면 그만입니다.”

“저 반지에 걸린 마법을 깰 수 있는 마법사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지금까지의 주기로 봤을 때는 천 년 내에는 안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천 년 뒤에 제 마법이 깨지면 또 누군가 나타나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주겠죠.”

자신만만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으나, 교만이 아님을 알아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토파즈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될 것임을 예감하며.

* * *

황궁 꼭대기에 깃발이 내걸렸다. 월계관으로 둘러싸인 지팡이와 검이 교차하는 에델티움 황실의 문양이었다. 거리는 축제 그 자체였다. 길목마다 꽃과 동전 따위가 머리 위로 뿌려졌고 어린아이들은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새로운 황제가 탄생한 날, 토파즈는 무엄하게도 황궁 지붕에 몰래 기어 올라가 있었다. 지붕이라고 해 봐야 첨탑 아래의 둥근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라 떨어질 위험은 없었다.

토파즈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먼발치를 내려다보니 전쟁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워지고 있는 카샤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토파즈는 잠시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정체를 예상했지만, 조금 전 대관식을 마친 황제가 왕관도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낯선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예복에는 화려한 금장이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고, 단추 하나하나가 섬세했다. 머리 위에 얹은 월계관은 왜 황제의 상징인지 단번에 이해될 만큼 아름다웠다. 영롱한 녹색 보석이 햇빛을 받아 물가의 돌처럼 반짝였다.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얼굴에 귀걸이며 왕관 따위를 치렁치렁 달아 놓으니 신의 사자라는 별칭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까 전 카르옌이 입장하는 순간 대관식을 치르던 홀의 장내가 고요해진 이유가 이해가 갔다.

카르옌은 목을 옥죈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다가왔다. 어깨에 달린 금빛 사슬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중간에 나가시길래 쫓아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았습니다.”

“네 대관식인데 네가 뛰쳐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꾹 참았는데, 칭찬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칭찬을 갈구하며 어깨 위에 턱을 툭 올리는 꼴이 조금 전 위엄있는 얼굴로 대관식을 치르던 황제와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토파즈는 옷이 구겨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품을 파고드는 카르옌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카르옌이 만족한 듯 목을 울렸다.

바람이 불어와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토파즈는 풀어헤친 크라바트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목걸이, 늦었지만 돌려줄게.”

희고 매끈한 목덜미가 유독 텅 비어 보였다. 토파즈는 목걸이를 풀어 카르옌의 목에 다시 걸어 주었다. 이 목걸이를 건네주는 건 두 번째인 셈이었다.

카르옌은 자신에게 돌아온 목걸이를 소중하게 손안에 꼭 쥐었다. 토파즈가 직접 돌을 깎아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닌 목걸이였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정을 거쳐 우연히 손에 들어온 물건.

“별로 어울리진 않네.”

토파즈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본격적으로 화려한 예복까지 갖춰 입은 카르옌이 착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해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신구였다. 토파즈가 그 목걸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려면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나?”

“…….”

푸른 돌조각을 습관처럼 쓰다듬던 카르옌의 손이 우뚝 멎었다.

“수도는 오랜만인데, 몇 년이 흘렀으니 많이 바뀌었겠지. 지금 나가면 꽤 헤맬 것 같아. 그래도…….”

말을 잇던 토파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멈췄다. 새카만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너…….”

카르옌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흰 뺨을 적셨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만 떨구는데,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저렸다. 당황해서 입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11년 전에, 토파즈님은 저를 떠나며 이 목걸이를 걸어 주셨죠.”

“…….”

“또 저를 두고 떠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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