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8)화 (108/110)

#108

두 번째 방벽을 둘러싼 2황자군은 베로니카 황녀의 지휘 아래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공성은 수성에 비해 현저히 불리했으나, 1황자군은 천 년 동안 이어지던 결계가 뚫린 사실 자체로 혼비백산했다.

그런 와중에 세이드 대공이 죽고 1황자가 붙잡혔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백기가 올라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흘간 이어진 격전은 2황자군의 승리로 끝났다.

황궁 안에 들어앉아 있던 1황자파 귀족들과 이교도의 고위 사제들이 차례대로 붙잡혔다. 그들이 진짜 반역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2황자파의 손에 차곡차곡 들어왔고, 부당하게 투옥되었던 사람들도 풀려나 자유를 되찾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많은 사람이 황궁을 탈환한 2황자가 곧바로 위엄 있는 모습을 내보이며 기세를 굳히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2황자 카르예니프는 예상과 달리 며칠 내내 조용했다.

2황자궁의 궁인들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분주했다. 그들의 주인, 2황자의 침실을 차지한 낯선 남자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피에 흠뻑 젖은 몰골로 황자의 품에 안겨서 나타났다. 그것만으로 놀랄 일이었는데 황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침대를 내주었다. 부부조차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법도가 없는 황실에서는 무척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제국민 모두가 2황자에 대해 떠들 때도 카르예니프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의 곁을 지키며 하염없이 침대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 얼굴이 꼭 남자가 깨어나지 못하면 따라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연했다고, 한평생 2황자를 모신 시종 아이작은 생각했다.

승기를 거머쥐며 자연스럽게 황제 대리 역할을 맡게 된 2황자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최소한의 안건들만을 처리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시한 일은 국장(國葬)에 관한 것이었다. 포탈을 통해 미리암 성에서부터 황제의 시신이 운구되었고, 황제와 국서의 늦은 장례가 거행되었다.

토파즈가 눈을 뜬 것은 7일의 장례 기간이 끝나고도 하루 뒤의 일이었다.

토파즈는 이마를 간지럽히는 감촉에 깨어났다. 눈꺼풀 너머로 흰빛이 아른거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상할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날 때처럼 온몸이 나른했다. 눈가를 연신 움찔거리는데 관자놀이를 핥아 오는 뜨겁고 미끈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핥아? 대체 누가?

토파즈는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마에 올라타 있던 작은 털 뭉치가 주르륵 미끄러져 무릎 위에서 나뒹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렌로샤 숲의 흰 여우였다. 토파즈는 얼떨떨한 얼굴로 여우를 들어 올렸다. 여우가 앞발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토파즈는 순간 뒷목이 서늘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갑자기 북쪽 숲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든가, 모든 게 꿈이었다든가 하는 최악의 전개는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모든 풍경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침대부터 몸을 감싼 부드러운 옷과 이불, 유리처럼 매끄러운 바닥. 그림이며 조각 따위가 빼곡히 새겨진 화려한 벽, 금빛 샹들리에와 우아한 아치형 창문, 그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성……. 세상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부셨으나 일단은 누군가의 침실인 듯했다.

방 밖에서는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 앞을 지키고 있기라도 한 듯 움직임 없이 서 있는 사람이 둘, 분주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여럿, 성큼 걸어와 토파즈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

토파즈는 경계를 끌어 올리는 대신 문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는 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르옌이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정복을 입고 있었다. 옷에는 장식 하나 없어 도리어 금빛 머리칼과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아…….”

침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카르옌은 습관처럼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토파즈를 발견하고 우뚝 굳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숨소리마저 멎었다. 꿈인지 아닌지 의심하듯 눈만 깜빡거리던 카르옌이 조심스레 물었다.

“……토파즈님?”

“응.”

짧은 대답에 무표정하던 얼굴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 듯 파동이 일었다. 카르옌이 숨을 터뜨리며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우습게도 분명 낯선 곳인데, 그곳에 서 있는 카르옌을 보자 드디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 *

왕실 주치의부터 대신관까지 득달같이 불려와 토파즈의 멀쩡한 몸을─“멀쩡하지 않습니다. 겉만 멀쩡한 거예요.”─ 진료하고 돌아간 뒤. 카르옌은 옷이 구겨지든 시종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든 개의치 않고 토파즈의 옆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는 토파즈를 바짝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으며 그동안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대관식이 이틀 뒤라고?”

토파즈가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 곧장 소리 없는 항의가 들어왔다. 토파즈는 제 허리를 옥죈 팔의 힘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세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토파즈님께서 깨어나지 못한 보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잠들다니, 5년 전 키올렌의 여관에서 눈을 떴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토파즈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제국에는 엄청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구심점을 잃은 1황자파가 완전히 실각한 것은 물론이고, 7일 동안 이어지던 황제와 국서의 장례마저 어제 완전히 끝났다.

1황자와 반역자 무리는 아직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들은 공식적인 재판 과정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1급 반역죄는 물론 수년에 걸쳐 극악무도한 살인과 인체 실험 따위를 저지른 여죄가 낱낱이 밝혀졌으므로 사형이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아직도 살려 뒀어?”

몰래 가서 죽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토파즈를 향해 카르옌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편안한 죽음은 사치니까요. 사적인 복수 역시 레오나르드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 아닐 겁니다. 그저 끝까지 너 하나만 아니었으면 전부 괜찮았을 거라고 자위하며 눈을 감겠죠. 시대가 낳은 비운의 희생양이라도 된 것처럼.”

“…….”

“그는 이미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어요. 카샤프라는 성을 잃은 그의 마지막에는 명예도, 품위도 없을 겁니다. 고통만이 따르겠죠.”

카르옌의 말대로 레오나르드는 죽음보다도 고귀하다 여겼던 자신의 추락을 더 끔찍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죽이는 게 낫지 않나? 고통도 살아 숨 쉴 때나 느낄 수 있는 법이다. 토파즈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 녹스 길드장의 시신은 서쪽 탑과 함께 통째로 불태웠습니다. 까마귀가 쪼아먹게 내버려 둘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그자는 잿더미로 돌아가는 마지막이 어울리겠더라고요.”

“아…….”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길드장 탄자를 비롯해 그의 심복 대부분이 사흘 동안 이어진 최후의 격전 때 죽었습니다. 덕분에 녹스는 휘청이고 있고, 토파즈님의 친우인 이잔이라는 자가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이잔과 페로자 등 녹스의 일부 용병들도 내전 승리의 주역이자 황자의 손님 자격으로 내성 구역의 공관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토파즈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탄자가 돌보던 어린애가 하나 있을 거야.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나르드의 핏줄이라고 했어. ……자기 신분을 안다면 죽이고, 모른다면 멀리 보내야겠지.”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훗날 카르옌을 위협할 분란의 씨앗이 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편이 수런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아이다. 가넷보다도 어린…….

“저 때문에 하기 싫은 말씀 억지로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지 않습니까.”

그 속내를 다 안다는 듯 카르옌이 속삭여 왔다.

“목숨은 부지하는 방향으로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기반 하나 없는 어린애한테 어렵게 탈환한 자리를 뺏길 정도로 무능하지도 않고요.”

“…….”

너는 언제부터 이토록 나를 잘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일까. 침묵하던 토파즈가 시선을 돌렸다.

“쟤는 어떻게 데려왔어?”

토파즈는 황자궁이 제 마당인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흰 여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우가 툭 치고 지나간 화병이 그 뒤를 따라다니던 시종의 손에 무사히 안착했다. 휘장 너머로 눈이 마주친 시종이 빙긋 웃었다.

이름이 아이작이라고 했던가. 갈색 머리칼에 부드러운 녹색 눈을 가진 시종은 카르옌의 또래로 보였다. 토파즈는 조금 머쓱하게 눈인사를 건네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여우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달랑 집어 들었다.

“사흘 전에 데려왔습니다. 그 여우라도 데려오면 깨어나실까 해서요. 이제 북쪽 숲을 다녀오는 정도는 어렵지 않더라고요.”

곧장 따라온 카르옌이 대꾸했다. 그새 친해지기라도 했는지, 여우가 카르옌의 손끝에 주둥이를 비볐다.

“봉인이 완전히 풀린 거야? 몸 상태는 어떤데.”

“멀쩡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카르옌이 쓸쓸한 얼굴로 웃으며 읊조렸다.

“제가 멀쩡하지 못했던 이유는 토파즈님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었거든요.”

“…….”

그저 눈을 내리깔았을 뿐인데 참으로 죄책감을 자극하는 얼굴이다. 토파즈가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이제 깨어나셨으니 미뤄뒀던 문제를 하나씩 처리해 나가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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