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지붕과 벽 일부가 무너지며 돌이 쏟아졌다. 탑의 꼭대기 층은 순식간에 폐허처럼 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 찾아온 적막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카르옌은 자신을 뒤덮으며 폭발에서 보호해 준 사람의 등을 끌어안았다. 제발 그만은 아니기를 바랐지만 닿아 오는 체온과 숨결, 향기가 너무나 익숙했다.
“토파즈님……?”
등을 끌어안은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카르옌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온통 붉었다.
“아…….”
카르옌이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토파즈의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폭발에 정면으로 휩싸인 몸은 여기저기가 너덜거렸다. 화상을 입은 살갗이 전체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오른쪽 어깨며 뒤통수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파여 있었다. 진물 섞인 피가 흘렀다.
어깨가 그 꼴인데도 토파즈는 카르옌의 머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약속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그의 어깨 아래에 숨어야 한단 말인가.
“토파즈……. 토파즈님, 괜찮으세요?”
카르옌은 연신 토파즈의 이름을 불렀다. 피가 흘러 엉망이 된 얼굴을 쉬이 만질 수조차 없어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괜찮…….”
토파즈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도리어 괜찮냐고 물어오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간신히 버티고 있던 토파즈의 몸이 미끄러졌다. 카르옌이 그의 몸을 받치며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카르옌은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망토를 벗겼다. 녹아내리고 찢어진 상의를 헤치자 상처에 옷깃이 스쳤는지 토파즈의 턱이 잘게 떨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토파즈의 부상은 폭발의 여파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깊은 자상이 있어 살갗이 너덜거렸고, 다리를 다쳤는지 바지도 피에 푹 젖어 발아래에 피 웅덩이를 만들 정도였다. 탁, 탁. 어디선가 귀에 거슬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당장 피를 멈추고 상처를 봉합해야 했다. 탁, 탁. 카르옌은 계속해서 들리던 그 소리가 다름 아닌 자신의 입에서 나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덜덜 떨리는 이가 위아래로 부딪치고 있었다.
낳아 준 부모를 잃었을 때도, 자신이 죽을 뻔했을 때도 이토록 공포에 떨어본 적이 없는 카르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두려워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토파즈의 숨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손이 차갑게 식었다. 다음 숨이 이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온 세상이 그를 짓누르는 듯했다.
카르옌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가 손가락을 힘주어 깨물었다. 아득,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사정없이 깨물자 피가 한 방울씩 새어 나왔다. 카르옌은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로 토파즈의 가슴팍에 동그란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복잡한 수식을 적어 넣었다.
카르옌으로서는 이토록 정교한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마법진은 적은 마력으로 더 큰 효용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었으나 그동안 그에게는 효율성이라는 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완전히 잃지도 못한 토파즈가 고통에 잇새를 사리물었다. 그가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멍하니 푸른 눈동자를 직시하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였…….”
소리 없는 읊조림은 귀에 닿지 못하고 스러졌다. 카르옌은 손을 떨며 온 힘을 쏟아부었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고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상처가 너무 깊어서 치료가 더뎠다. 화상을 입은 등은 델 듯이 뜨거운데 뺨은 점점 차가워졌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무력한 열일곱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카르옌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토파즈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절대 절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제발…….”
카르옌이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애원했다. 희미하게 토파즈의 고개가 움직인 듯했다.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으나, 카르옌은 어렵사리 눈을 떼어냈다.
온기가 모두 빠져나간 카르옌의 시선이 무너진 탑 안을 살피다 한 곳에 가서 닿았다.
“헉, 컥.”
수도 기사단장의 몸을 방패로 삼아 살아남은 레오나르드가 무너진 돌무더기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옅은 금발은 흙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었고, 고막이 찢어진 듯 귀가 먹먹했다. 왼쪽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폭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알베르 카툴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시신이 훼손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드가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요람의 수장이던 베르제가 죽은 뒤 그 후임을 자처한 알베르 카툴로를 믿고 맡겼으나 잘못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레오나르드는 조각조각 부서진 사체 더미를 뒤졌다. 반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반지는 끈적한 피 위에 홀로 멀쩡히 놓여 있었다. 레오나르드가 척척한 피 웅덩이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 반지를 건져냈다.
천 년 동안 무사했던 봉인석에 금이 쩍 가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드는 씨근덕거리며 반지를 주워 제 손가락에 꼈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든 레오나르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싸늘한 푸른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제를, 같은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레오나르드는 반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카르예니프의 봉인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봉인을 강화해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지금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기회는 또 있었다. 레오나르드가 반쯤 뜯긴 철문을 향해 달려가려던 때였다.
불현듯 손목이 화끈했다. 아니, 차가운 것 같기도 했다. 왼쪽 손이 통째로 잘려 나갔음을 깨달은 것은 한 발 뒤였다.
“아, 아악! 아아악!”
레오나르드는 엄습하는 통증에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손이 사라진 자리에서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가 죽인 수많은 이들의 피와 섞여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황제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늘 호의호식한 레오나르드였다. 살면서 이 정도 고통을 겪어 본 일은 처음이었다. 정신없이 기어서 도망치려 했으나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저 몸을 바르작거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카르옌은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하려는 레오나르드의 상처를 발로 지그시 밟아 헤집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넌 여기서 못 죽어, 레오나르드.”
곱게 죽여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카르옌은 잘린 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쓸모를 다한 손목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거리는 이부 형제의 눈앞에 던져 주었다.
카르옌이 반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반지 안쪽에 박힌 붉은빛 보석이 손안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이내 먼지 한 줌으로 변한 보석이 탑 안에 흩어졌다.
“…….”
카르옌이 빈 주먹을 펼쳤다. 한평생을 옭아매고 있던 봉인이 완전히 부서지는 순간은 상상했던 것처럼 짜릿하거나 통쾌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웠다. 숨을 들이쉬고 마실 때마다 온몸을 감싸는 마나가, 마치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충만했다. 원하는 모든 바를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카르예니프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 * *
하란과 메르디나, 노아 슐츠가 탑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카르옌은 피투성이가 된 토파즈를 끌어안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주문을 읊조리며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드는 얼굴이 어찌나 살벌한지 메르디나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일행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도 굳은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토파즈를 세게 끌어안은 두 팔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압도감이 풍겼다. 두 사람이 있는 곳에만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진 듯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애써 발을 떼고 다가갔다. 토파즈의 피는 계단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이곳으로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바닥에 흐른 피의 양으로 보았을 때는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본 토파즈는 얼굴과 옷이 피로 젖었을 뿐, 육안으로 보기에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얼마나…….”
노아 슐츠가 기함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유 마법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메르디나가 피와 시체 더미 속에서 기절한 레오나르드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하란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전하, 빨리 결계를 닫아야 합니다. 곧 이곳으로도 군사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
하란의 말에도 카르옌은 꼼짝하지 않고 송장 같은 몸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누군가 그의 손에서 토파즈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 카르옌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최근 토파즈의 앞에서 자주 인간다운 얼굴을 하는 그에게 익숙해진 탓일까.
하란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카르예니프, 제발 정신 차려. 여기까지 왔는데 다 같이 죽을 거야?”
초조하게 재촉하는 하란의 몸에도 크고 작은 부상이 가득했다. 메르디나와 노아 슐츠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옌의 무심한 시선이 네 사람과 탑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이내 토파즈를 품에 안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옷에 피가 묻든 말든 바짝 끌어안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자.”
카르옌이 흰 제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우아한 천사상의 목이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고, 무너진 지붕에서 떨어진 돌가루가 희뿌옇게 날렸다.
엉망이 된 제단 구석, 홀로 먼지 한 톨 뒤집어쓰지 않고 멀쩡히 서 있는 은촛대가 보였다. 은촛대가 받치고 있는 양초는 쉬이 꺼지지 않는 불을 품고 있었다.
카르옌이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후, 깊은 숨결이 불꽃을 꺼뜨렸다. 이윽고 두 개의 장치가 작동하며 마나의 파동이 발밑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땅이 진동했다.
카르옌은 무너진 벽 틈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레오나르드를 제압하고 노아 슐츠가 약속된 신호를 하늘로 쏘아 올리는 동안에도, 카르옌은 토파즈를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멈춰 있었다.
마치 그의 세상이 통째로 멈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