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카르옌은 가파른 계단을 타고 탑을 올랐다. 몇 번인가 그대로 뒤돌아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는 이 전쟁을 끝낼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란 적 없는 역할이었으나 기어이 움켜쥐기로 한 순간에는 감내해야 했다.
카르옌은 탑의 꼭대기 층에 올라 두꺼운 철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녹슨 쇳소리와 함께 비릿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쇠 냄새, 아니. 피 냄새다. 문이 다 열리기 전에 깨달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당겨서 마주하는 수밖에는.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일렁이는 촛불이었다. 천장과 벽면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촛불이 창문 없는 공간을 주홍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어지러운 시야 너머로 기척을 지우고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구나, 내 아우야.”
카르옌이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흰 제단 위에 걸터앉은 남자가 보였다. 옅은 금발이 허리 아래까지 쏟아져 제단 일부를 덮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반년 만인가?”
레오나르드 델 카샤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나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너 하나 죽이는 걸 실패해서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고 말았네.”
“네 무능 탓이겠지.”
레오나르드의 곁에 선 면면도 익숙했다. 수도 기사단 단장, 그리고 지명수배된 흑마법사 알베르 카툴로. 알베르 카툴로의 옆에는 ‘요람’의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다섯 사람이 눈에 익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카르옌이 눈가를 찡그렸다. 제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레오나르드의 머리 위를 천사상 세 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가 아름다운 조각 위로 일렁였지만, 날개를 펼치고 있는 천사상 뒤편은 빛이 잘 닿지 않았다.
그 서늘한 그늘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카르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이런 짓까지 벌일 정도로 황제의 자리가 탐 났나? 너 때문에 죽은 이들이 몇인지 세어 본 적은 있고?”
제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마법사들을 납치하고, 내전을 일으켜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길을 건너던 민간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죽였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연인이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드는 그런 희생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카르옌의 말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탐은 남의 물건을 갖고 싶을 때나 내는 것이지. 나는 내 몫을 정당히 되찾으려는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탐욕이 되겠어? 지금의 네가 받는 기대, 경외, 선망…….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내 몫이었어.”
“누이가 들으면 황당해하겠군.”
카르옌의 대꾸에 레오나르드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었다.
“아, 용맹한 내 동생 베로니카? 그 애는 훌륭한 기사였지만 황제의 재목은 아니었어. 그러니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거야. 그래도 나를 도울 줄 알았는데 네게 붙은 건 예상 밖이었어. 그 애는 분명 널 증오했거든.”
“이제는 널 더 증오하게 된 거지. 네 역겨운 민낯을 봤으니까.”
레오나르드는 시체 수십 구를 등 뒤에 쌓아 두었다고는 믿기 힘든 낯으로 웃었다. 핏기 없는 피부와 마른 체구 때문인지 부드럽다 못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날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어. 너와 네 아버지가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난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 따위 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차피 네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너를 찬양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깟 전통과 관습 때문에…….”
암녹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눈동자 색만 제외한다면 황제의 세 자식 중 황제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레오나르드였다. 겉모습만은 그랬다.
“네 말대로야. 뛰어난 마법사와 뛰어난 통치자는 다르지. 에델티움의 황제가 꼭 마법사여야 할 이유는 없어. 마법은 마법사가 부리면 될 일이니.”
“……지금 날 기만하는 건가?”
카르옌이 선뜻 동의하자, 레오나르드가 분개한 기색으로 외쳤다. 카르옌이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런데 레오나르드. 너는 뛰어난 마법사와 통치자,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잖아. 설마 영명하신 황제 폐하께서 고작 마력이 없다는 이유로 너를 후계자 자리에서 쳐냈겠어?”
“뭐?”
“네게는 마력 말고도 부족한 점이 너무 많잖아. 탐욕스럽고 어리석지.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분명 월계관의 주인은 네가 아닌 베로니카였을걸.”
“…….”
가증스럽게도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를 지워낸 레오나르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언제까지 그 입을 오만방자하게 놀릴 수 있을지 볼까, 카르예니프.”
레오나르드가 제단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검은 로브의 마법사 다섯이 일제히 입을 열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카르옌은 그들이 주문을 완성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카르옌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얼음으로 된 날카로운 창이 생겨났다.
콰가강! 얼음 창이 길게 허공을 갈랐다. 반원형으로 서 있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 다섯 중 넷이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목을 꿰뚫렸다. 한 명은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풀썩 쓰러진 마법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단 뒤에서 흘러나온 피와 만나며 길게 퍼졌다.
카르옌이 눈썹을 까딱였다. 이상했다. 허무하게 전력의 절반을 잃었음에도 낭패한 기색이 없는 레오나르드의 반응도 그랬지만, 그 외에도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번거로운 일을 덜어 주다니 고마워.”
레오나르드가 웃음기 없이 손가락을 매만졌다. 왼손 검지에서 무언가가 빛났다. 카르옌은 그것이 레오나르드가 자주 끼고 다니던 반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떤 무늬도 장식도 없는 단순한 고리 형태의 황금빛 반지.
그러나 레오나르드가 반지를 벗어 알베르 카툴로에게 건네는 순간, 반지 안쪽으로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익은 붉은빛 보석이었다.
알베르 카툴로는 반지를 받아 든 채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발밑에서 축축한 소리가 났다. 카르옌이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빛이 잘 닿지 않는 바닥, 아무렇게나 퍼진 줄 알았던 피는 자세히 들여다보자 어떤 형태를 이뤄 가는 듯 보였다.
마법진이었다. 피로 그려진 마법진. 카르옌이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마법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마지막 역할은 목숨 바쳐 이 마법진을 완성하는 것이었거든.”
레오나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도 기사단 단장이 칼을 휘둘렀다. 검 끝은 카르옌이 아닌 옆에 서 있던 흑마법사를 향했다.
“무슨……. 잠시만요, 전하! 이건 말이 다르지 않……!”
마지막 흑마법사의 목이 떨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그 피가 바닥에 퍼지며 마법진을 완성했다.
쿵! 카르옌이 심장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했다. 심장이, 온몸이, 그의 근본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사지의 뼈가 굳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읍, 쿨럭.”
코와 입, 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카르옌의 마나를 담은 피가 턱을 타고 떨어져 마법진에 닿는 순간, 역설적으로 카르옌을 옥죄는 마법의 힘도 강해졌다.
이곳 전체가 제단이었다. 그들은 제단 위에 카르옌이 제 발로 올라가도록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거 알아? 널 위해 이 마법진을 정성스레 준비하는데, 계산해 보니 애석하게도 제물이 딱 하나 모자라더라고.”
레오나르드가 신이 난 아이처럼 조잘거렸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추악한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제물의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잖아. 이제 와서 새로운 제물을 잡아들이기에는 촉박하고……. 그때 문득 떠오른 거지. 내 아버지도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말이야.”
“…….”
“늘 내게 대의를 위한 거룩한 희생을 가르친 분이셨으니 분명 이해해 주실 거야.”
제단 뒤의 시체 더미 속에 친부를 던져 놓고도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괴물이 괴물을 길렀군. 카르옌은 끝내 제 자식에게 잡아먹힌 남자의 허무한 죽음에 조소했으나, 곧 엄습하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통증을 이기지 못한 몸이 무너지며 무릎이 땅에 닿았다.
“이제 너만 사라지면 이 땅 위의 모든 게 다시 내 것이 돼.”
레오나르드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불에 달군 쇠바늘이 심장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듯한 고통에 카르옌이 헐떡였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또다시 몸을 얽매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편안해지고 싶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이 고통이 찾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한평생 목숨을 건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던 카르옌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늘 품고 살아온 것처럼 익숙했다. 이미 세상 어딘가에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 기분이었다. 남은 일은 흙무더기 속에 조용히 몸을 눕히는 일밖에 없는 듯했다.
‘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그러나 어떤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언제부턴가 카르옌이 숨 쉬도록, 내일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던…….
쿵, 쿵. 심장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달리고 싶다는 듯, 그리하여 사실은 살고 싶다는 듯. 물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이 트였다. 폐부가 크게 부풀었다.
카르옌이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긁힌 손끝이 금세 엉망이 되었다. 비틀린 손톱 아래로 시든 장미처럼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카르옌이 빳빳하게 굳은 손끝을 움직였다. 정교하게 그려진 마법진이 흐트러졌다.
“아, 아아악!”
알베르 카툴로가 손을 붙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뜨겁다며 바닥을 구르는 그의 손에는 불길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열기가 그로부터 퍼져 나왔다.
“뭐 하는 거야!”
레오나르드가 소리쳤다. 알베르 카툴로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반지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붉게 부풀었다가 검게 변했다.
애초에 하나의 봉인석이 담기에는 너무 큰 힘이었다. 수백 명의 목숨을 대가로 욱여넣은 마법이 실패하며 반동이 터져 나왔다. 파삭, 끝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폭발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어깨를 쥐어오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철문을 등지고 있던 몸이 돌아가고, 귀를 찢는 굉음과 어깨를 덮는 온기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느껴져서는 안 될 온기가.
콰아앙! 엄청난 폭발이 탑 전체를 흔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카르옌은 찰나의 순간 방어막을 펼쳤으나 그것이 끝내 깨졌음을 알았다. 그 뒤에 누군가 자신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