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5)화 (105/110)

#105

“마찬가지야.”

짧게 대꾸한 토파즈가 날아드는 검을 피했다. 쾅! 흑색 날이 벽에 깊숙이 박혔다가 쑥 뽑혀 나왔다. 마주친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나왔어?”

“글쎄. 신이 내가 살기를 원했나 보지.”

무성의하게 대꾸하자 탄자가 뺨을 씰룩였다.

“신?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믿었어?”

“너야말로 언제부터 이교도 따위에 빠져들었지?”

“하하, 그저 이해관계가 맞아 서로 이용했을 뿐이야. 우리는 적이 같았으니까.”

“그 적이 카르예니프라고?”

“아, 정말 성가시던걸. 2황자가 승리하기 시작하면서 이교도 내에도 변절자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 다들 마법 따위에 현혹되어서는……. 혈통을 따라 이어지는 그 힘이야말로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소수에게만 축복처럼 내리는 마법사의 재능이 공평하느냐고 물으면, 물론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재능이, 혈통이, 빈부의 대물림이 전부 그렇다. 타고난 능력으로 이름을 알린 토파즈도, 유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용병단을 이은 탄자도 그 불균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선택한 대안이 황녀도 다른 사람도 아닌 1황자인가?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그자? 차라리 혁명을 일으키지 그랬어. 그럼 나도 기꺼이 공감했을 텐데.”

그 애는 그냥 태어났을 뿐인데. 힘 따위, 황제의 자리 따위 원한 적도 없는데……. 어린애 하나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착같이 죽이려 든 쪽이 누구란 말인가. 토파즈는 돌연 울컥해 이를 악물었다.

챙, 챙! 검이 몇 번이고 교차했다. 손잡이를 쥔 손목이 저려 올 정도로 묵직한 부딪침이었다. 토파즈는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 공격을 맞받아치며 탄자의 옆구리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미리 예상한 것처럼 피한 탄자의 손에 그대로 발이 붙잡혔다.

탄자가 토파즈의 몸을 한 바퀴 돌려 바닥으로 내던졌다. 등으로 떨어진 토파즈는 바닥을 손으로 짚어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흑색 검날이 방금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 박혀 들었다. 탄자가 바닥에 한 뼘 꽂힌 검을 뽑아내는 순간 토파즈가 발목을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탄자가 검을 가로로 눕혀 머리 위로 내려꽂히는 공격을 막아냈다.

“1황자의 즉위는 내 그림의 초석에 불과해.”

“설마 네 이번 꿈은 황제라도 되나?”

“그럴 리가. 내 목표는 너와 함께 달리던 시절과 똑같아, 가넷. 용병의 지위를 바꾸는 것 말이야. 세상은 마법사만을 기억하고 떠받들지만 정작 맨 앞에서 마수와 맞서고 제국을 지킨 건 늘 우리였잖아. 마법사도, 기사도, 신관도 아닌 우리.”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넌 결국 새로운 불균형을 네 손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네가 가장 위에 앉는 모양으로.”

토파즈가 탄자의 공격을 피하며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반동을 이용해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토파즈는 탄자의 등 뒤로 착지했다. 탄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검이 허공을 갈랐다.

푹. 날카로운 검날이 뒤에서 복부를 꿰뚫었다. 곧바로 검을 뽑아내자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탄자가 휘청이며 복부를 짚었다. 그는 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5년 전의 원한, 똑같이 돌려주는 거야?”

“똑같이 돌려주려면 아직 멀었지.”

토파즈가 일격을 가하기 위해 검을 치켜들 때였다.

“탄자님!”

토파즈가 몸을 물리자마자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기다란 창이 날아들었다. 창은 땅을 한 뼘이나 파이게 만든 뒤에도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멀리서 창을 날려 보낸 젬마가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다는 듯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를 상대하고 있던 노아 슐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불덩이를 내던졌다. 젬마가 왈칵 화를 냈다.

“이 개자식, 왜 이렇게 끈질겨!”

“그쪽이 약한 거 아닐까요?”

쿵, 쿵! 굉음과 함께 또 한 번 탑이 흔들렸다. 좁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마법사들의 격돌 탓이었다. 다행히도 마법사 간의 싸움에서는 노아 슐츠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젬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보였다.

하란과 메르디나 역시 등을 맞대고 차근차근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둘 중 누군가가 다친 듯 발밑에 덜 마른 핏자국이 보였지만 움직임이 눈에 띄게 더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위로 올라간 카르옌에게는 별일이 없을까. 혹시 그를 보낸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토파즈의 움직임이 저도 모르게 반 박자 느려졌다.

빈틈은 찰나였으나 탄자는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수룩한 상대가 아니었다. 탄자가 토파즈의 허벅지에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살갗이 깊이 꿰뚫렸다.

오른쪽 허벅지가 찢어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통증을 참으며 검을 휘둘렀으나 탄자는 왼쪽 어깨를 내어주며 그대로 온몸으로 토파즈를 밀쳤다.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쿵! 탄자가 토파즈의 복부를 깔고 앉으며 완전히 위로 올라탔다. 토파즈는 곧바로 몸을 뒤집으려 했으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탄자는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 보며 손을 휘둘렀다. 토파즈가 고개를 기울여 간신히 피하자, 검이 귓바퀴 바로 옆에 내리꽂혔다. 머리칼 몇 가닥이 서걱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봐.”

“너랑 싸우는 것도 이젠 지겨워서.”

“하하.”

웃음을 터뜨린 탄자가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쥐며 고개를 숙였다. 눈처럼 흰 머리칼이 토파즈의 얼굴에 스칠 듯 쏟아졌다. 탄자가 낮게 속삭였다.

“지루하지 않게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까?”

“…….”

“레오나르드, 그자가 뿌려 놓은 씨가 로즈 거리에 있더라고. 너와 ‘가넷’의 고향이지?”

뜻밖의 이야기에 토파즈가 얼굴을 굳혔다.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탄자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황손으로 태어났어야 할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더러운 거리를 전전하고 있기에 내가 손을 내밀었지. 덕분에 그 애가 날 철석같이 따라. 네가 내 아버지를 따랐듯이.”

레오나르드의 사생아. 탄자가 쥐고 있던 패가 그것이었나.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열기를 띠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에는 모든 말이 혀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버지인 유리를 빼닮은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다. 숨길 수 없는 탐욕, 인정에 대한 갈망. 한때는 꿈을 좇는 것이라 여겼던 반짝이는 눈빛.

“……넌 유리도, 라리사도 전혀 닮지 않았군.”

그들은 토파즈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하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이 아니었다. 죽는 순간까지 타인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탄자가 바람 섞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마치 헛웃음처럼 들렸다.

“넌 몰라, 가넷. 그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자란 거야. 주워온 너나 친자식인 나나 똑같이 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늘 인정을 갈망하는 못난 어른이 된 거라고.”

그 순간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통도 잊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토파즈가 주먹을 들어 눈앞의 얼굴을 후려쳤다. 온 힘을 실어 후려치자 탄자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토파즈가 짓씹듯 말했다.

“그들은 나 따위보다 널 훨씬 사랑했어. 공평하게 대해 주었다고 마음까지 그랬겠어? 그걸 몰랐다면 넌 진짜 구제불능이고, 개새끼야.”

얻어맞은 뺨을 쓰다듬는 탄자의 눈이 가라앉았다. 토파즈의 복부에 올라타 꼼짝할 수 없이 짓누른 채로 탄자가 검을 치켜올렸다. 검 끝이 반짝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네가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네.”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었으나 검날은 그대로 손바닥을 관통했다. 피가 뺨에 튀었다. 토파즈는 턱이 당길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탄자의 검이 향하는 방향은 정확히 심장이었다.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꿰뚫린다. 또 한 번 신의 기적이 없고서야 죽고 말겠지.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데. 지켜줘야 하는데…….

예리한 검 끝이 심장에 닿았다. 그러나 검은 심장을 파고들지 않았다. 검 끝을 타고 실금 같은 피 한 방울이 흘렀을 뿐이었다.

“뭐야.”

탄자가 힘을 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혹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한번 심장을 찔러 냈지만 검 끝은 무언가에 단단히 가로막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

문득 흉골 근처가 뜨거웠다. 옷 아래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르옌이 건네준 목걸이. 단순히 약속의 징표이리라 생각한 그 목걸이는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멍청하고 미련한 놈…….”

저는 혼자 가는 주제에 이런 걸 왜 남에게 주고 간단 말인가.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어야지. 지금 진짜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단 말인가? 가슴이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자 도리어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토파즈가 주먹으로 탄자의 복부를 가격했다. 여전히 피가 뚝뚝 흐르는 관통상을 헤집자 탄자가 잇새로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큭.”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토파즈가 제 위에 올라탄 몸을 옆으로 쓰러뜨리고 일어섰다. 허벅지에서 피가 울컥 샘솟아 새카만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고쳐 쥐었다.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쾅! 검을 맞댔다기보다는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탑을 울렸다. 토파즈는 거의 감각이 사라진 오른쪽 다리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며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격했다. 탄자가 아닌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있는 힘껏.

챙강! 흑색 날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부러진 검이 탄자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탄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넌 이 검을 쓸 자격이 없어, 탄자.”

스스로 듣기에도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파즈는 자신의 안에 남아 있던 망설임이 모두 사라진 것을 느꼈다. 검 끝을 망설임 없이 심장을 향해 내리꽂았다.

“컥.”

크게 뜨인 보랏빛 눈동자가 고통으로 잘게 떨렸다. 토파즈는 바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사리물고 손목을 비틀었다. 심장에 박아넣은 검날이 여린 살갗을 찢는 소리가 났다.

“……넷…….”

검날을 타고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감각은 언제라도 덤덤해질 수 없는 것이었으나 단호해지려 애쓰는 일만은 익숙했다. 검을 빼내자 피가 솟구쳐 시야를 가렸다.

스승의 부러진 유품, 형제와도 같았던 친구의 몸이 함께 뒤로 쓰러졌다. 토파즈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흥건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부릅뜬 보랏빛 눈에서는 천천히 생명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탄자가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으나 들리지 않았다.

토파즈는 바닥을 구르는 흑색 검을 주워들었다. 더 이상 주저는 없었다. 날카롭게 부러진 단면이 목을 그었다. 피가 길게 튀었다.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가 굳고, 숨이 잦아들었다.

유리가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의 유품으로 아들을 죽인 나를 원망할까, 아니면 속상해할까.

토파즈는 한때 소중한 동료이자 형제였던 이의 가슴 위에 피 묻은 검을 놓아주었다. 토파즈가 베어낸 것은 탄자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의 과거를 이루던 가장 큰 조각이었다.

5년을 끌어온 복수가 끝났다. 시원함 따위는 없었다. 피로 젖은 손이 어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을 뿐.

“…….”

그럼에도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토파즈의 시선이 탑 꼭대기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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