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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104)화 (104/110)

#104

캄캄한 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황궁 뒤뜰. 들리는 소리라고는 일행의 발소리와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밤을 밝히고 있던 불빛도 위병들도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렸을 때 저는 황궁 안의 온갖 장소를 헤집고 다니곤 했는데, 출입이 금지된 서쪽 탑에 들어갔다가 이상한 마법 장치를 발견하고 만 거죠. 은으로 된 촛대였어요.”

“촛대?”

“네. 평범해 보이는 촛대 하나에 난생처음 보는 마법식이 새겨져 있었는데, 너무 복잡해서 사흘을 매달려서야 겨우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내성을 지키는 결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요.”

지금 일행이 향하는 목적지가 바로 그 서쪽 탑이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에델티움의 황제가 마법사여야 하는 이유는 그 촛대 하나 때문이 아닐까……. 만약 황제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 초를 밝히기 위해 타인과 비밀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밀이란 입 밖에 나온 순간 비밀이 아니니까요.”

“…….”

“때로 전통이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죠. 더 큰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

카르옌이 조용히 읊조린 말에 토파즈는 위험한 비밀을 공유한 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되었던 거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비밀이었습니다. 황가에서 영원히 마법사가 태어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저뿐만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게다가 고작 그것 때문에 마법사만 황제가 되어야 한다니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천 년이나 흘렀으니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을 때가 되었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얼굴이 남의 이야기를 하듯 태연자약했다.

“……멈춰 봐.”

그때 앞서 걷던 토파즈가 팔을 뻗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네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옌이 말한 서쪽 탑은 황궁 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우뚝 치솟아 있었다. 외벽은 바싹 마른 녹갈색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탑 꼭대기에는 낡고 녹슬어 떨어지기 직전인 종이 달려 있었다. 본래 시간이나 위험 따위를 알리는 용도로 지어진 종탑으로 보였다.

그러나 외딴곳에 있는 데다 탑의 뒤로 음산한 숲까지 펼쳐져 있어, 누군가를 가두거나 숨겨놓는 용도로도 아주 적합해 보였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져.”

토파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느껴지는 기척이 한둘이 아니었다.

“작전이 새어나간 걸까요. 아니면 그들도 결계 장치의 위치를 알고 있어서 저희의 동선을 예상한 걸까요.”

“글쎄. 중요한 건 함정임을 알더라도 들어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지.”

메르디나의 말에 카르옌이 모자를 벗으며 대꾸했다. 더 이상 위장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인지 모자 아래로 드러난 머리칼 역시 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행은 탑의 단 하나뿐인 출입구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카르옌이 노아 슐츠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쾅!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카르옌의 속삭임과 동시에 눈앞에서 벼락이 쳤다. 섬뜩할 정도로 눈부신 광채가 번쩍였다. 쾅, 콰과광! 한발 늦게 공기를 찢는 천둥소리가 탑을 뒤흔들었다.

“좀 더 일찍 준비할 수 있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너무 갑작스럽다고요.”

노아 슐츠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하는 동안 토파즈는 자욱한 먼지 속에서 눈을 뜨고 안을 살폈다.

탑 1층의 홀을 가득 채운 적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오십은 넘어 보였다. 카르옌과 노아 슐츠가 기습적으로 쏘아 보낸 마법으로 절반이 쓸려나갔는데도 그랬다.

한 사람당 열. 마법사 두 명과 정예 검사 셋의 구성으로는 제압하기 어렵지 않아 보이는 숫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일반적인 병사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다들 조심하세요.”

하란이 맨 앞에 서서 길을 뚫었다. 묵직한 검이 일행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의 갑옷을 뚫고 심장까지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쓰러지거나 멈칫하는 대신 오른손을 휘둘렀다. 하란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공격을 피했다.

다른 적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팔을 잘라내고 심장을 꿰뚫어도 고통을 모르는 듯 달려들었다. 조금 전 쏘아 보낸 마법의 여파로 몸이 반쯤 불탄 병사들조차 남은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애썼다.

목을 완전히 베어내야만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추는 그들의 피에서는 짙은 꽃향기가 났다. 아군이 리라 병사라고 칭하는 돌연변이 병사들이었다. 개중에는 마수의 신체를 억지로 이어 붙인 듯 기이한 몸을 지닌 병사들도 있었다.

역겨운 꽃향기가 후각을 잠식하는 와중에도 토파즈의 시선은 홀 가장 안쪽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정확히는 느슨한 태도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허공을 가르고 시선이 맞부딪쳤다. 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달빛이 짧은 백발과 보랏빛 눈동자를 비추었다.

“……탄자.”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다시 마주하리라 생각했다. 토파즈가 검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발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에 발을 박차려는 때였다.

뒤에서 뻗어온 팔이 토파즈의 허리를 감싸 뒤로 당겼다. 그와 동시에 쇠붙이 수십 개가 순식간에 머리 위로 날아왔다. 바닥에 쓰러진 적군들의 병장기였다.

콰앙! 토파즈를 끌어안은 카르옌이 허공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옆에 세워져 있던 돌기둥 세 개가 나란히 뽑혀 나와 그들의 머리 위를 감쌌다. 돌가루가 희뿌옇게 날렸다.

탄자의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얼굴을 확인한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서두르십시오. 화재로 위장하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젬마. 베릴이 여동생처럼 여겼던 아이는 그날 밤 베릴에게 받은 마도구로 동료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화재로 위장하기까지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우던 동료에게 칼을 꽂고, 그 시신마저 한 줌 재로 만들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이제 와서 그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살아 돌아오는 이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 답을 듣고 싶었던 질문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간 이를 악물었던 토파즈는 제 머리칼에 묻은 돌가루를 털어 주는 손길을 느끼고 턱에서 힘을 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고마워.”

복수심 따위에 판단이 흐려질 때가 아니었다.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결계 장치는 어디에 있어?”

“탑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토파즈는 왼편에 있는 계단을 힐긋 바라보았다. 가파른 나선형의 계단이 탑을 빙 두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란과 메르디나, 노아 슐츠는 이미 달려드는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리라 병사 수십 명만 해도 방심할 수 없는데 탄자와 젬마까지 있다니. 토파즈가 앞으로 달려드는 병사의 목을 베어내며 침음할 때였다.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절대 안 돼.”

토파즈가 즉답했다. 위에서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작정하면 얼마든 숨을 수 있었다.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들은 우리가 여기로 올 줄 알고 있었어. 이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너 혼자 올라가겠다고?”

“저 역시 토파즈님을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기 때문에 뒤를 맡기는 겁니다.”

“…….”

급할 것 없으니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끌수록 더 많은 적들이 이곳을 향해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계를 닫는 데 성공한다 해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카르옌의 안위는 곧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므로.

“내가…….”

따라가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탄자와 젬마는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탄자는 토파즈도 전력을 다해야 상대할 수 있는 검사였으며, 젬마 역시 녹스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마법사였다. 이대로 토파즈가 카르옌을 따라 떠난다면 남은 세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토파즈에게는 아직 씻어내지 못한 과거가 남아 있었다. 이대로 탄자를 두고 도망치듯 등을 돌릴 수 있을까? 아직도 꼴사납게 그날의 악몽을 꾸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뻔히 안다는 듯 카르옌이 고개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직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전 쉽게 당하지 않습니다, 토파즈님. 저를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 당신뿐이에요.”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걱정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토파즈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토파즈님도 쉽게 지지 않으실 거죠?”

“……네가 월계관인지 계수나무관인지, 뭐라도 머리 위에 쓰는 꼴 보기 전에는 죽을 생각 없으니 걱정 마.”

카르옌이 엷게 웃으며 제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그가 늘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풀어내 토파즈의 목에 걸어 주었다. 서늘한 손이 목덜미를 스치고, 푸른 돌조각과 닮은 눈동자가 토파즈를 응시했다. 마치 바다를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눈이었다.

“제 보물이니 이따가 꼭 돌려주세요.”

“……그래.”

토파즈가 투박한 돌조각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카르옌은 그의 뺨을 한 번 쓸어준 뒤 등을 돌렸다.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길을 뚫고 계단으로 향했다.

지척에서 싸우던 메르디나가 적들이 카르옌을 뒤쫓지 못하도록 계단 앞을 지켰다. 카르옌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토파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지루한 기색을 띠고 있던 얼굴이 빙그레 웃음을 드리운다. 토파즈는 눈을 피하지 않으며 발을 박찼다. 탄자가 검을 뽑은 것도 거의 동시였다.

쾅! 단숨에 거리가 좁혀지고 검이 맞닿았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탄자의 손에서 새카만 검이 빛났다. 5년 전 토파즈의 심장을 찔렀던, 스승 유리의 유품이었다.

“오랜만이야, 토파즈. 아니, 가넷이라고 불러 줄까? 5년 전 네가 내동댕이친 그 이름이 다시 뜨겁게 불리던걸. 무덤에서 동생이 기뻐하겠어.”

“닥쳐.”

토파즈가 일갈하며 검을 휘둘렀다. 탄자가 비스듬히 검을 기울여 공격을 막아냈다.

“네가 왜 2황자의 검을 자처했는지 궁금했는데, 둘이 굉장히 애틋하네? 상상하지 못한 이유야.”

대답하지 않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몇 번이고 검이 맞부딪쳤지만 쉽게 빈틈을 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의 버릇까지 익히 아는 탓이었다.

“베론에서, 너였지?”

탄자가 확신한 어조로 물었다. 대답에 의미가 없었기에 토파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를 바득 소리가 나도록 악물고 길게 내지른 검 끝이 탄자의 뺨을 스쳤다. 탄자가 핏줄기가 흐르는 뺨을 닦아내며 씩 웃었다.

“나 5년 전 일 후회하고 있어.”

“…….”

“그날 널 확실히 죽이지 못한 걸 말이야. 이렇게 또 나를 방해할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숨통을 끊는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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