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3)화 (103/110)

#103

“네가 말한 비밀 통로가 설마 이거야?”

한밤중, 성벽에 바짝 붙어 선 토파즈가 물었다.

카르예니프, 메르디나, 하란, 노아 슐츠와 토파즈로 구성된 일명 소수 정예 잠입조는 무사히 두 번째 방벽 앞까지 도달했다.

두 명의 마법사가 공간 이동 마법과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번갈아 사용하자 성벽 앞까지 접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공간 이동은 물론 때려 부수는 것도 불가능한 성벽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였다.

산자락과 이어지는 성벽 아래에 도착한 카르옌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을 때는 설마 싶었다. 카르옌은 성벽을 손으로 더듬거리더니 익숙한 손길로 어딘가를 눌렀다. 그러자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듯 보이던 벽돌이 미는 대로 움직였다.

벽돌 몇 개를 툭툭 빼내자 이내 어린아이가 드나들 수 있을 법한 작은 구멍이 드러났다. 카르옌이 당당히 자신한 ‘비밀 통로’의 정체를 확인한 토파즈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개구멍이잖아.”

“그렇게도 부르죠.”

“…….”

“성벽에 난 비밀 통로를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아마 황제 폐하 정도뿐이실 겁니다.”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토파즈가 이마를 짚었다. 황실의 골칫거리였을 어린애의 천사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여기에 구멍은 어떻게 낸 거야?”

“안쪽에서 만들었으니까요. 밖에서 안을 공격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안에서 밖을 공격하는 건 가능하거든요.”

“…….”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메르디나가 앞장섰다. 메르디나는 오가는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상체부터 집어넣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메르디나의 몸이 부드럽게 구멍을 빠져나갔다. 잠시 멈춰 주변을 살피던 메르디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넘어오십시오.”

두 번째 순서였던 토파즈는 곧바로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비좁은 구멍에 어깨가 턱 걸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음……. 아무래도 제가 어릴 때 드나들던 곳이라 조금 좁네요. 이쪽에서 밀어 드릴까요?”

발밑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토파즈는 한숨을 삼키며 겨우 어깨를 구겨 통과했다. 그러나 하란과 카르옌의 덩치로는 그것도 불가능해 결국 안쪽에서 벽돌 몇 개를 더 빼내야 했다.

마지막으로 성벽 밖 발자국을 없앤 노아 슐츠까지 얼굴에 흙을 묻히며 무사히 통과하자, 카르옌은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다’며 마법으로 흙을 덧대 구멍을 완전히 메워 버렸다.

“여기가 사각지대예요. 저 앞에는 보초가 있지만 잠시 후면 보초병들이 교대하는 시각입니다. 약 1분 동안 빈틈이 생길 텐데, 북서쪽에 있는 작은 건물 보이시죠? 그 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면 됩니다.”

카르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끼와 덩굴로 뒤덮인 낡은 건물이 보였다. 폐쇄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하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긴 뭡니까? 초소? 창고?”

“원래는 초소였는데 지금은 창고에 가깝지.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일단 뛰어.”

일행은 카르옌의 신호에 맞추어 수풀을 헤치고 뛰쳐나갔다. 토파즈는 노아 슐츠를 하란의 어깨 위에 빨랫감처럼 걸어 놓고 등을 떠밀었다. 노아 슐츠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만약 카르옌이 뒤처지면 토파즈가 둘러업을 생각이었으나 그는 용케도 뒤떨어지지 않고 쫓아왔다.

“자물쇠가 걸려 있습니다.”

가장 앞서가던 메르디나가 얼굴을 굳히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문에 두꺼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토파즈가 그냥 부숴 버릴 생각으로 검을 뽑는데, 그보다 카르옌의 손짓이 더 빨랐다.

철컥! 한 번에 자물쇠가 풀렸다. 잔뜩 녹슬어 보이던 문은 예상외로 부드러워 소리 없이 열렸다. 자물쇠가 있을 줄 미리 알았던 건가? 눈으로 묻자 카르옌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이것도 제가 걸어둔 거라서요.”

“……?”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토파즈는 눈을 의심했다. 낡은 창고인 줄 알았던 건물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과 딴판이었다. 유서 깊은 귀족의 저택을 똑 잘라서 가져다 놓은 듯 고풍스러운 침실이 펼쳐졌다. 하란이 벽을 장식한 섬세한 부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긴 대체 뭡니까?”

“내 작은 은신처 중 하나라고 할까? 자물쇠에 환각 마법이 걸려 있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낡은 창고처럼 보여. 내가 직접 자물쇠를 풀어야 진짜 내부가 드러나지.”

포도주색 융단이 깔린 방 안에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었다. 여섯 개의 문이 달린 커다란 원목 옷장이었다. 가운데에는 물결무늬 거울이 붙어 있었고 여섯 개의 문 모서리마다 금장이 번쩍거렸다.

카르옌이 옷장의 문을 당겨 열었다. 안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가지각색의 옷이 들어 있었다. 시종이나 마부들의 수수한 복장부터 철부지 귀족 도련님이 입을 법한 화려한 정장, 황궁 위병들의 제복, 심지어는 수도 기사단의 제복까지 크기별로 갖춰져 있었다.

“저쪽 커튼 뒤에서 갈아입으세요. 저는 황궁 위병의 옷을 추천합니다. 수도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은 숫자가 너무 적어서 쉽게 들킬 수 있거든요.”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황궁은 저를 담기에는 너무 좁아서 말이죠.”

기가 막힌 심정으로 묻자, 카르옌이 수줍은 척 웃으며 대꾸했다. 한마디로 황궁 밖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뜻이었다. 어린 시절 토파즈와 마주친 것도 잠깐의 일탈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토파즈는 그대로 등 떠밀려 황궁 위병의 칙칙한 검은색 제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이런 옷을 입고 어떻게 싸운다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복잡한 옷을 대충 걸치고 나오니, 똑같은 위병의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카르옌이 검은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모자 아래의 머리 색깔 또한 오랜만에 보는 새카만 머리칼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옌이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그럼 비밀 통로 근처로 바로 이동할까요?”

* * *

“잠깐 멈춰 보세요.”

일행은 베로니카 황녀가 그려 준 지도를 따라 비밀 통로를 걷고 있었다. 지하로 이어진 비밀 통로는 지도가 없었다면 한참 헤맸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복잡했다. 몇 번인가 길을 잘못 들자 살벌한 함정이 발동되어 위험했던 적도 있었다.

또 어디선가 함정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카르옌이 일행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모두가 카르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아챈 사람보다는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더욱 많았다. 카르옌의 시선이 향한 돌벽에 있는 것이라고는 비밀 통로 안을 일정한 간격으로 비추고 있는 마법 횃불뿐이었다.

베로니카의 설명을 들어 그 횃불에 무언가 있으리라 짐작했던 토파즈마저 막상 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지나쳐 온 수십 개의 횃불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낡고 투박한 횃불이었기 때문에.

카르옌은 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다가 말했다.

“노아 슐츠, 눈 감아.”

“예?”

맨 뒤는 싫다며 하란에게 애원하다시피 해 가운데에 끼어서 걷고 있던 노아 슐츠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카르옌의 의도를 읽어내고 이내 질끈 감았다.

‘애초에 저는 여길 오고 싶지 않았다니까요?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이라도 내보내 주셔도 되는데…….’ 하고 궁시렁거리는 목소리는 뒤에서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덮어 버린 하란에 의해 가로막혔다.

카르옌의 손이 벽을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돌벽을 매만지는 손끝은 자세히 보니 무언가를 덧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이곳이 맞았어요.”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헤집었다. 통로를 밝히고 있던 횃불이 일시에 꺼지며 시야가 캄캄해졌다. 토파즈가 반사적으로 검집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어둠은 찰나였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꺼졌던 불들이 다시 타올랐다. 단 하나, 카르옌이 서 있던 벽의 횃불 하나만을 제외하고. 카르옌은 연기 한 점 없이 꺼진 횃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끝입니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겁니까?”

하란이 노아 슐츠의 눈가에서 손을 떼어내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리라 믿었던 결계가 이토록 간단하게 허물어질 수 있는 장치였다니, 심히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카르옌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페르테는 후대에 마법의 힘이 옅어질 것을 예지라도 했는지 아주 적은 마력으로도 결계를 작동시킬 수 있게 만들어 두었어. 이를테면, 이 횃불에 불을 붙이는 정도 말이야. 그러나 걱정하지 마. 불을 붙이는 건 어떤 마법사든 할 수 있지만 끄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으니.”

말을 마친 카르옌이 손으로 땀을 닦듯 얼굴을 문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코끝에 스치는 희미한 비린내는 숨길 수 없었다. 토파즈가 얼굴을 찡그렸다. 커다란 손을 쥐고 강제로 펼치자 손바닥에 묻어난 피가 보였다.

“아.”

카르옌이 다시 주먹을 쥐어 숨기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의 코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카르옌이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토파즈가 옷소매로 그의 코와 입가를 틀어막았다. 만류하듯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토파즈님, 피가…….”

“조용히 해.”

카르옌이 입이 막힌 채 웅얼거리려는 것을 토파즈가 단칼에 차단했다. 이내 하란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코 아랫부분을 누르듯 덮었다. 카르옌은 시무룩한 얼굴로 토파즈의 피 묻은 옷소매를 힐끔거렸으나 매서운 눈길을 받고 얌전히 코를 쥐었다.

내전을 치르는 내내 한계 이상으로 무리해온 카르옌이었다. 마수와 싸우고, 대교를 복구시키고, 사람들을 구하고…….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해도 줄곧 심장을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못한 통증과 그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에 밤잠을 설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전하, 지혈해드릴까요?”

“됐어. 언제 또 써야 할지 모르니 마력은 최대한 아껴 둬.”

노아 슐츠의 물음에 대꾸한 카르옌이 피에 젖은 손수건을 갈무리했다. 그가 토파즈의 손목을 쥐어 당기며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지체할 수 없으니 이동하죠.”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뼈아팠다. 토파즈가 입술을 짓씹었다. 코끝에는 여전히 비릿한 혈향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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