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2)화 (102/110)

#102

“그건 결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작전에 직접 참여하시다니요. 재고해 주십시오.”

“그대들 말대로 위험한 작전이니 내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지. 반드시 성공해야 하니까.”

만류의 목소리가 쏟아졌으나 카르옌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뒤를 지키듯 조용히 서 있던 토파즈를 향해 간절한 시선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토파즈가 황자의 은인이자 용병들의 대장이랍시고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일부 지휘관들은 이제는 토파즈가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는 했다. 주로 카르옌을 말리는 역할을 떠맡길 때였다.

“……전하.”

한숨이 섞인 짧은 부름에 카르옌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할지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토파즈는 덤덤히 그 얼굴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가 잘못되는 순간 이 전쟁은 끝입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말씀이 그런 방식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만.”

“…….”

한마디로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는 뜻이었다.

“그, 그래도 그렇지 어찌 그리 무례한…….”

토파즈의 말에 자리에 동석한 황제 친위대원 중 가장 젊은 기사 하나가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카르옌에게 꾸짖음을 들은 뒤에도 토파즈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국 먼지 나게 얻어맞은 전적이 있었다.

“저는 두 번째 방벽을 적군 몰래 통과할 방법을 알고, 결계 장치의 위치와 작동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공유할 수 없는 방법이니 제가 직접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내성의 결계를 뚫지 못해도 제 목이 달아나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이제 와서 몸을 사릴 이유가 없지요.”

다른 지휘관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조곤조곤한 어조로 대꾸한 카르옌이 토파즈를 올려다보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함께 들어가셔서 저를 지켜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

사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수도를 지키는 결계에 관한 비밀을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다. 혹시 모를 배신이나 작전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카르옌 혼자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마법사가 필요한 작전이라면, 카르옌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를 어디서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토파즈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불만스럽지만 더 말릴 수는 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지휘관들이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다섯 명은 너무 적다, 차라리 자신도 데려가 달라 아우성치기 시작했으나 카르옌은 단호했다.

“인원수가 많아 봤자 방해만 될 뿐이야. 공간이동 마법을 쓰는 데도 제약이 있고 무엇보다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마법으로 강을 건너실 요량이십니까?”

“그래. 오늘 자정 군의 일부를 폰스 대교를 통해 이동시킨다. 동시에 나룻배를 몇 척 띄워서 적을 교란해. 날이 밝으면 다른 교량도 차례차례 복구될 테니 나머지는 남쪽과 서쪽으로 분산하여 이동한다.”

“그렇다면 저희가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 브리안 철교로 이동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대신 마탑 마법사들이…….”

“만약 잠입에 실패한다면 그때 대안은…….”

끝내 카르옌의 뜻을 꺾지 못한 수뇌부는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결계를 무력화시킨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마법이 사라져도 방벽은 건재하니 공성전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여태 놀았으니 힘은 비축해 뒀겠지?”

“예, 전하!”

“대충 정리되었으면 자리를 피해 주게.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카르옌이 베로니카를 향해 눈짓했다. 결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남은 남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막사에 남은 베로니카는 곧바로 입을 여는 대신 미간을 좁히며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카르옌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토파즈를 향한 시선이었다. 카르옌이 뒤를 힐끔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해 줘. 내가 아직도 누나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 험한 전쟁터에서 누군가와 독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한 처지라.”

“차라리 메르디나 미리암을 대동하지 그래? 황실의 약점을 공유하기에 적절한 상대는 아닌 듯한데.”

“신경 쓰지 마. 이분은 그냥 나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면 돼.”

카르옌은 토파즈를 향해 조금 떨어져 있으라고 눈치를 주기는커녕 제 옆자리로 의자를 끌어당기며 동석을 권하기까지 했다. 토파즈가 단호한 얼굴로 거절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헛웃음을 흘렸다.

“2황자가 흑마법도 모자라 남색에 빠졌다는 소문이 미리암까지 닿더라니. 사실인 줄은 미처 몰랐네.”

“흐음, 그런 소문이 다 났어?”

카르옌이 웃으며 물었다. 퍽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에 카르옌이 탁자 위에 비스듬히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쓸데없는 얘기 대신 본론으로 들어가자. 결계 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알아?”

“아마도.”

베로니카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장소는 우리가 탈출한 비밀 통로 안이야.”

조용히 카르옌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토파즈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베로니카 황녀와 황제가 탈출한, 그러나 끝내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그 통로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카르옌 아버지의 무덤이 되었을…….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힐긋 카르옌의 안색을 살폈으나 그는 동요 없이 베로니카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밀 통로 벽에 아주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어. 몇 개나 겹쳐 그린 듯 견고했지.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황가의 핏줄이니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어.”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한 베로니카는 황제로부터 더 의문스러운 말을 들었다고 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저쪽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습니다. 함정일까요?’

‘아니. 저건 우리를 지켜주는 마법이야, 베로니카. 이곳의 위치를 잘 기억해 두어라. 내 바람과 달리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

“벽에는 낡은 횃불 하나가 걸려 있을 뿐, 아무리 봐도 평범한 벽이라 영문 모를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을수록 ‘우리를 지켜주는 마법’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어.”

“횃대에 불이 켜져 있었나?”

“그랬지.”

베로니카는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한 듯 눈가를 좁혔다.

“위치를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 줘.”

황녀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짚었다. 황궁 내부는 지도에 자세히 그려져 있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일단 비밀 통로는 황제궁 지하에서부터 여기, 황궁 바깥까지 이어져 있어. 길을 익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영원히 갇힐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갈림길이 많고 복잡했지. 탈출로와 마법진의 위치를 기억나는 대로 그려 보자면, 대충 이쯤.”

베로니카가 빈 종이 위에 망설임 없이 슥슥 선을 그어 나갔다. 선 자체는 단순했으나 마치 지도를 보고 그린 것처럼 정확한 구조가 손끝에서 펼쳐졌다.

“도움이 되네.”

토파즈가 내심 감탄하는데 카르옌은 이미 익숙한 사람처럼 짧게 평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베로니카는 실제로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카르옌은 베로니카가 그린 종이를 천천히 말아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내 모든 권한은 누나에게 가는 걸로 미리 이야기해 두었으니 부디 배신은 하지 마. 이제 와서 번거롭게 그래 봐야 서로 잃을 것뿐이잖아.”

베로니카가 코웃음을 쳤다.

“난 내전만 끝나면 클로프스 영지에 내려가서 왕처럼 살 거야. 하지만 네가 못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제위는 내가 차지해 버릴 테니, 기껏 세운 노후 계획 방해하지 말고 그 귀한 목숨 악착같이 부지할 생각이나 하라고.”

“그래, 기도 고마워. 신께서도 감명하셨을 거야.”

언제 머리를 맞댔냐는 것처럼 고개를 휙 돌리고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남매를 보며 토파즈가 속으로 혀를 찼다.

황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가고, 안에 둘만 남게 되자마자 카르옌이 양팔을 뻗었다. 단단한 양팔이 토파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반쯤 강제로 의자에 앉혀진 토파즈의 등 뒤로 미지근한 체온이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냉랭한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 부드럽게 풀린 황자의 얼굴이 보였다.

“손 떼. 누구 들어오면 어쩌려고.”

“아무도 안 들어오면 계속 안고 있어도 괜찮은가요?”

“…….”

토파즈가 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듣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사내에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린다는 소문이 이미 미리암까지 났다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웃을 일이야?”

그딴 소문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퍼진 것인지 모르겠다.

“두 번째 방벽 안으로는 어떻게 들어갈 생각이야? 밖에서 안으로는 공간이동도 불가능하다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래 그곳이 저의 집이 아닙니까. 제가 몸이 약하던 어린 시절에 자주 이용하던 비밀스러운 통로가 몇 개나 있답니다.”

카르옌이 말을 이을 때마다 귀에 숨결이 닿았다. 고개를 기울이며 슬쩍 피해 봐도 소용없었다. 카르옌은 등 뒤에 매달려 있었지만 쓸데없이 큰 덩치 탓에 토파즈의 몸을 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품에 이렇게 가둬지듯 안긴 경험이 거의 없는 토파즈가 낯선 불편함에 몸을 뒤틀 때마다 허리를 옥죄는 양팔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먼저 체념한 사람은 토파즈였다.

“하…….”

힘을 빼고 어깨를 늘어뜨리자 카르옌이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금실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깻죽지를 간질였다.

이내 뒷덜미에 조심스럽게 입술이 닿아 왔다. 온몸이 서늘한 주제에 입술과 그 숨결만은 뜨거웠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괜히 제 체온도 오르는 듯했다. 토파즈가 뒤로 손을 뻗어 카르옌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만.”

“조금만 이렇게 있게 해 주세요.”

기어코 목덜미에 입술을 미끄러뜨린 카르옌이 속삭였다.

“오늘은 아주 길고 피곤한 밤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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