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01)화 (101/110)

#101

“수도가 개판이군.”

베로니카 황녀가 카샤프에 도착하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먼길을 달려온 황녀는 마차가 아닌 말에서 내렸다. 지팡이는 짚고 있지 않았으며,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편안하게 걷는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미리암에서 출발해 막 수도에 도착한 참이었다. 미리암에 엘제니아 황제가 있음을 확신한 1황자는 끈질기게 미리암으로 군사를 보내 공세를 퍼부었다.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면 죽이고,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빼앗아 죽음을 공표할 생각인 듯했다.

당장 제위가 빈다면 황제 대리인 레오나르드가 그 자리를 차지할 명분이 커지고, 그가 진짜 황제로 즉위하기라도 한다면 더욱 막아내기가 힘들어진다. 그것은 2황자파가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미리암 성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베로니카는 미리암 공작과 함께 수성전을 이끌었고 끝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달려 수도에 도착한 것이었다.

살면서 카르옌과 사이가 좋아 본 적이 없다던 황녀였지만 한번 협조하기로 마음먹자 꽤 든든한 아군이었다. 황녀 본인이 적극적으로 전투를 이끌 뿐 아니라 그의 지지 세력이 카르옌에게 힘을 보태도록 설득해 주었다. 황녀의 남편 가문인 클로프스 남작가에서도 일찍이 지원을 보냈다.

클로프스 남작가는 본래 귀족이 아닌 상인이었는데 돈으로 작위를 샀다는 소문이 자자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뒤에서는 근본 없는 귀족이라는 조롱을 들을지언정, 앞에서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클로프스 가문이었다. ‘클로프스 가에서는 심부름꾼도 금화를 꿰어 목에 걸고 다니더라’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차남이 황녀와 연애 결혼해 제국의 부마가 된 데다 내전에서 2황자군에 적극적으로 물자를 대주고 있으니, 2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가문의 위상도 바뀌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있었다.

물론 그것도 2황자가 무사히 황제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현재 2황자군은 카샤프 남부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교량 7개 중 6개가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소방대가 수색 작업을 하고 있으나 사상자의 수는 아직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왜 6개지?”

보고를 받던 카르옌이 물었다.

“남은 하나는 가장 동쪽에 있는 브리안 철교인데, 폭발음과 연기는 났지만 붕괴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바이올렛 강은 동쪽으로 갈수록 강폭이 좁아졌다. 최근에 지어진 브리안 철교는 7개의 교량 중 길이가 가장 짧았으며 다른 교량들과 달리 철을 주재료로 건축된 다리였다. 과연 운 좋게 버텨 준 것일까?

“브리안 철교로 군사 일부를 미리 이동시킬까요?”

“아니. 분명히 함정이야.”

카르옌이 딱 잘라 대답했다. 7개의 교량을 무너뜨린 수단은 다른 공격이 아닌 마법이었다. 7개 중 1개만 우연히 불발될 이유가 없었다.

“그쪽으로는 아무도 이동하지 못하게 해. 분명 다리를 건너자마자 함정이 있을 거야. 전체적인 피해 규모는?”

“피해 규모가 작은 곳은 전하께서 직접 나서 주신 세 개의 대교와 마탑 마법사들이 구조를 도운 론하르트 대교 순서입니다. 카르멘 대교의 경우에도 강 북쪽에서 구조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근방에 수도 마법사단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수도 마법사단은 그 명성에 비해 이번 내전에서 유독 조용한 집단이었다. 듣자 하니 수도 마법사단 단장이 레오나르드의 지시에 반기를 들었다가 투옥된 이후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한참 동안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 마법사단 부단장이 보낸 답신이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메르디나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회유를 시도할 가치가 있겠다 싶어 수도에 닿을 때에 맞춰 마법 전서구를 날렸었는데 답신이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카르옌이 서신을 펼쳐 읽었다. 카르옌과도 안면이 있는 수도 마법사단 부단장이 직접 쓴 답신이었다.

[……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수도 마법사단의 상황은 알려진 내용보다 더욱 좋지 못합니다. 단장님을 비롯한 단원들이 부당하게 투옥되었고, 일부는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이렇듯 뿔뿔이 와해된 데다 곳곳에 눈이 붙어 있어 함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 현 사태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수도 마법사단은 교량 복구와 생존자 수색을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카르옌의 눈이 맨 마지막 줄에 닿자마자 서신에 자동으로 불이 붙었다. 내용이 유출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던 탓이었다. 카르옌이 한 줌 재로 변한 종이를 털어냈다.

“지금쯤이면 아카데미 교수들도 무너진 토끼굴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왔을 테니 잘 되었어. 수도 마법사단은 대부분 아카데미 출신이니 그런대로 협업을 할 수 있을 테지.”

‘다 늙은 스승을 부려 먹는다’며 앓는 소리를 할 데네브 학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했으나 그 정도 엄살은 무시해도 괜찮았다. 힘없는 시민들도 서로 구하겠답시고 강물에 뛰어들고 있는 판국에 힘을 가진 자들은 더 큰 의무를 져야 마땅했다.

“뒤는 그들에게 맡겨두지. 레오나르드가 생각보다 더 극단적인 수단을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최우선 목적은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장 내일이라도 황궁을 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황궁은커녕 내성 구역 안으로 돌격할 방법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에페르테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결계 때문이었다. 초대 황제 에페르테는 수도 전체를 감싸는 방벽을 세우고 그 안을 결계로 보호했다. 천 년 전에는 현재의 두 번째 방벽 안쪽만이 수도였기에 지금 내성 구역이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이었다.

에페르테의 결계는 매우 강력하여 외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 덕분에 성문을 닫아걸기만 하면 난공불락의 성이 되는 카샤프는 단 한 번도 침략당한 적 없는 신성한 땅으로 불리기도 했다.

1황자군을 상대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황궁으로 들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동안 군 수뇌부의 전략 회의에서 몇 번이나 논의된 안건이었다.

그러나 카르옌은 그에게 묘안이 있다는 말로 일축하며 자세한 대답을 피했다. 그의 태도가 워낙 자신만만했기에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심 불안해하는 사람은 있었다.

카르옌은 회의에 참석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의 최측근과 지휘관 중에서도 소수만이 참석한 것을 확인한 그가 이중으로 방음 마법을 걸었다. 그토록 철저하게 행동한 이유는 바로 다음 순간 밝혀졌다.

“일단, 그 결계는 에페르테 황제의 축복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어.”

“예?”

카르옌이 내뱉은 말에 하란조차 놀라서 되물었다.

초대 황제의 결계가 수도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은 제국민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누구도 의심해 본 적 없이 믿어 온 상식. 그런데 카르옌은 지금 그 당연한 상식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의 놀란 눈을 마주한 카르옌이 무심히 말했다.

“에페르테가 죽어서 땅에 묻힌 지가 언제인데, 천 년 전에 한 번 펼친 마법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쪽이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럼 그 거대한 결계를 대체 누가 만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에페르테지.”

카르옌의 대답에 회의 참석자들은 이 황자가 지금 장난을 치나 싶은 얼굴이었다. 이미 카르옌의 화법에 익숙한 메르디나가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에 만든 사람은 초대 황제 폐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에페르테는 축복을 내리거나 마법을 펼친 게 아니야. 결계 장치, 그러니까 일종의 마도구를 만든 거지. 장치라는 건 언제든 껐다가 켤 수 있다는 뜻이고. 이 램프처럼 말이야.”

카르옌이 손끝을 움직여 탁자 위의 램프를 껐다가 다시 켰다.

“결계가 유지되는 이상 방벽 밖에서 안을 공격할 방법은 없어. 성문을 부술 수도, 화살을 쏘아 보낼 수도 없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결계를 잠시 닫아야 한다.”

“…….”

지휘관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왜 카르옌이 그동안 여러 사람의 채근에도 입을 꾹 닫고 있었는지 이해한 얼굴이었다. 외부로 퍼진다면 제국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비밀이었으니 아무에게나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결계 장치의 위치는 대대로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극비 중의 극비야. 물론 마도구의 일종이니 위치를 안다고 아무나 건드릴 수도 없지. 그런데 내가 본의 아니게 그 위치를 일부 알게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말입니까?”

나이 지긋한 지휘관 중 하나가 차마 의심스럽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되묻자 카르옌이 뻔뻔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린 시절 호기심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그만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곳까지 들이고 말았네. 문제는 장치가 한곳에 있는 게 아니라 위치를 전부 다 알지는 못한다는 점이고.”

이윽고 카르옌의 시선이 향한 사람은 베로니카 황녀였다. 원탁 앞에 앉아 있던 황녀가 카르옌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까딱였다. 뭘 보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뭔가 아는 거 없어? 누나가 나보다 황궁에서 더 오래 살았잖아.”

“오래 산다고 다 알아? 난 너처럼 황궁을 헤집고 다닌 적이 없다고. 결계가 장치로 유지된다는 것도 몰랐어.”

베로니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짚은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위치 따위는 당연히 몰라야 할 텐데……. 이상하게 짐작이 가는 곳이 하나 있단 말이야. 정확히는 폐하께서 영문 모를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

베로니카는 말을 잇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군 수뇌부 중에서도 특별히 신뢰할 만한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황실의 비밀을 함부로 떠들어 댈 수는 없었다. 그가 말을 멈춘 사이 하란이 손을 들었다.

“그 전에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결계 작동을 멈추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는 내성 안으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 장치라는 것이 방벽 밖에 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야. 그러니 결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소수 정예를 구성해 볼까 하는데. 물론 내가 미리 생각해 둔 인원이 있어.”

하란의 말에 카르옌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유유히 그 인원을 지목했다.

“하란 아히네스, 메르디나 미리암, 토파즈님. 그리고 노아 슐츠.”

마탑 대표로 회의에 참석해 구석에서 반쯤 졸고 있던 노아 슐츠가 뒤늦게 펄쩍 뛰어올랐다.

“저는 왜요?”

“안타깝게도 우리 군에서 나 다음으로 뛰어난 마법사가 너라서.”

“제가 전하를 배신해서 모든 일을 망치리라는 무서운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걱정 마.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친히 네 목을 따 줄 테니까.”

대꾸한 카르옌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아, 물론 나도 간다.”

“전하!”

카르옌을 향해 경악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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