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해당 편에는 재난, 붕괴 사고에 대한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으니 이용에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무너진 다리와 함께 그 위를 거닐던 사람들이 강물에 빠졌다. 평온하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꺄아악!”
“다리가 무너졌어!”
“헉…….”
페트라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몸을 두르고 있던 얇은 방어막은 깨진 지 오래였다. 부서진 돌의 파편 따위가 날아와 뺨을 할퀴었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아카데미에서 몇 분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정문에서부터 걷는 대신 마차를 타고 이동했더라면, 지금쯤 페트라도 저 강물 속에 있을 터였다. 바로…… 저 마차처럼.
다 부서져 가는 석조 난간에 마차가 기우뚱하게 걸쳐져 있었다. 조금 전 페트라를 지나친 그 사륜마차였다. 마차의 열린 문으로 허우적거리는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마차 안의 기물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승객은 곧 깊은 강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사, 살려 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머리가 새하얘졌다. 멍하니 서 있던 페트라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양 뺨을 내리쳤다. 자신은 마법사였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는 심호흡하며 어젯밤에도 복습했던 부유 마법식을 펼쳤다. 잔뜩 떨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주문을 외웠다.
“앨버트로스의 날개.”
“으아악!”
갑자기 몸이 멋대로 움직이자 떨어진다고 생각한 승객이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의 몸은 아래로 낙하하는 대신 붕 날아올라 천천히 페트라의 앞에 착지했다. 마차에 매여 있던 말 한 마리와 함께였다.
“헉, 헉.”
고작 사람 하나와 말 한 마리 건져냈을 뿐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 부유 마법으로 마법사 자신보다 더 무거운 물체를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 하나조차 살리지 못한다면, 뭐하러 지금까지 마법을 공부했단 말인가?
페트라뿐만 아니라 인근을 지나던 다른 시민들도 모두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황립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인근 상점의 주인, 비번이던 경비대원과 마차를 몰던 마부들. 모두 평화로운 일상을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강으로 널빤지 따위를 던져 주거나 직접 물에 뛰어 들어가 익사 직전의 사람들을 건져내기도 했고, 물에 빠졌던 아이에게 겉옷을 덮어주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환자를 지혈하기도 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윽.”
“의사나 신관 없으세요?”
“소방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아수라장 속에서 집중력을 쥐어짜 네 명을 더 구해 낸 페트라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마력이 모자라 중간에 사람을 떨어뜨릴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페트라는 아카데미 교수들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그들이 오늘 학장이 소집한 중대한 회의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리고 절망했다. 일명 ‘토끼굴’이라고도 부르는 교수들의 회의실은 아카데미 내에 있는 것은 확실했으나 정확히 어디인지 아는 학생도 없었고 바깥에서 방해하지도 못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어제 침입한 마수 때문임을 익히 짐작하면서도 그런 원망이 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기적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방대가 도착했어!”
“이쪽이에요, 얼른!”
막 소방대가 도착해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서렸을 때였다. 툭, 기이익. 소름 끼칠 정도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페트라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기둥 아랫부분이 균형을 잃어 다리 전체가 강 쪽으로 느릿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2차 붕괴였다.
부서진 난간에 매달려 버티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직접 구조하기 위해 뛰어든 사람들만 수십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깃들어 있던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안 돼, 제발.”
쿵, 쿠웅! 페트라의 간절한 읊조림은 균열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파묻혔다. 페트라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예상한 굉음과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저, 저게 뭐지?”
“신이시여…….”
그 대신 얼떨떨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시 두 눈을 번쩍 뜬 페트라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무너져 내리던 다리와 사람들이 누군가 허공에 붙잡아 둔 것처럼 동시에 떠 있었다. 꼭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법. 그 사실을 깨달은 페트라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돼…….”
부유 마법으로 낙하하는 물체를 중간에 붙잡아 들어 올린다는 것은 굵은 밧줄을 바늘구멍으로 통과시키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무거운 것들을 한꺼번에 들어 올리다니…….
대체 누구지? 교수님들이 오신 건가? 페트라가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 마법의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후드를 푹 눌러 쓴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해 마법사보다는 기사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 쪽을 향해 뻗고 있는 손은 무척 희고 고왔다.
그가 손을 휘적이자 허공에 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날아와 땅에 착지했다. 소방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마법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들과 말, 고양이까지 쏙쏙 뽑아내듯 하늘로 들어 올려 구조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돌 더미는 그대로 허공에 띄워져 있었다.
저런 마법을 쓰는데 복잡한 주문도, 수인도 없다니. 페트라는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고개를 돌린 마법사가 페트라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얼굴은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왠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진 마법사의 중얼거림은 그것이 착각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교수들은 다 어디 가고 졸업장도 못 받은 애들만 나와 있어.”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무척 젊다는 사실에 페트라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페트라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던 죄로 괜한 책임감을 느끼며 대꾸했다.
“교수님들은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으시다고…….”
“또 그 쥐구멍에 처박혔군.”
‘쥐구멍이 아니라 토끼굴인데요…….’ 따위의 반박은 하지 못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그 마법사의 어조에서 짜증스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위험하니까 그딴 관습 없애라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귀담아듣지를 않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교수들이란 다 그렇다니까요.”
마지막 말은 페트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페트라는 그제야 마법사의 뒤에 누군가 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사람 역시 후드를 눌러 쓰고 있었는데 자세가 매우 곧았고 로브 사이로는 툭 튀어나온 검 손잡이가 보였다.
마법사는 조금 전과는 목소리부터 어조까지 확연히 다른 말투로 토끼굴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아카데미 교수들은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 토끼굴이라는 별칭이 붙은 비밀 회의실에 처박히거든요. 교수들만 위치를 아는데 몇 년 주기로 또 장소를 바꾸죠.”
“그러다가 지금처럼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데.”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무뚝뚝하면서도 언뜻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토끼굴 안에는 아카데미 내부의 위험을 감지하고 알려 주는 마법 장치가 있어요. 사실 교수들에게 아카데미는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장치 따위가 없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귀신처럼 알죠.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그들 울타리 밖이기 때문에 눈과 귀가 미치지 않은 겁니다.”
재학생인 페트라조차 모르는 이야기가 마법사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교수들이 ‘토끼굴 안에서도 너희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는 다 알 수 있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 단순 협박이 아니라 진짜였다니. 설마 했지만 무서운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카샤프가 불바다가 되면 그들 앞마당이라고 무사할까요. 자만이 늘 일을 망치는 법이죠.”
냉소적으로 읊조린 마법사가 다시 페트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아카데미 마법부 학생이지?”
“네, 네. 그렇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합이 바짝 들어가 대답하자 마법사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동그랗고 매끈한 공 같은 것이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어떤 마법식이 새겨져 있음을 손에 쥐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서쪽 별관 1층에 우편국이 있을 거야. 우편국 북쪽 출입구로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이걸 던져.”
“이게…… 뭔데요?”
“쥐구멍에서 쥐들을 꺼내야지. 누가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 말이 더욱 오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죽지는 않겠지만 대단히 귀찮고 복잡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손에 쥔 공을 내려다보던 페트라는 문득 뺨을 욱신거리게 만들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지만 분명 눈앞의 마법사가 치료해 준 것이리라.
뺨을 매만지던 페트라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모르는 이의 얼굴에 난 작은 생채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치료해 준 사람이다.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악한 의도를 품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데네브 교수를 만나거든 쓸데없는 궁리하지 말고 무너진 다리나 고치라고 전해 주고.”
“누구의 전언이라고 말씀드리면 되는데요?”
페트라가 용기 내어 물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 그중에서도 학장인 데네브는 최근 심기가 매우 불편했는데 그 원인이 학장이 입이 닳도록 자랑하던 수제자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종종 반역자를 감싸는 위험한 발언을 하던 데네브가 아직까지 수도 기사단의 손에 잡혀가지 않은 이유도 그가 아카데미 학장이자 마법사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는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학장을 마치 친구나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는 마법사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졌다.
페트라는 그럴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목소리로 보나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매끈한 턱선으로 보나 페트라 또래의 젊은 청년인 것 같은데……. 아니, 상대는 마법사이니 겉모습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마법사는 페트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엉망이 된 바이올렛 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결치는 강에서 무언가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무너진 기둥과 상판, 부서진 벽돌 따위였다.
“제자리로.”
명령과도 같은 나직한 주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움직였다. 밑에서부터 교각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고, 부서진 벽돌 조각은 서로 붙어 빈자리를 채웠다. 기둥 끝에서 빈틈없이 아치형으로 맞물린 벽돌이 그 위로 쌓이는 무거운 상부를 받쳤다.
우아한 아치형 구조의 석재 다리가 순식간에 눈앞에 세워졌다. 마치 시간을 돌려 붕괴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페트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뛰어난 통제력이었다. 혼자서 대교 하나를 다시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마나가 필요한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마법만 잘한다고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머릿속에 교량의 설계 도면이 완벽한 형태로 들어가 있어야 했고, 그걸 눈으로 보지 않고도 순서대로 쌓아 올릴 수 있어야 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마법사가 아닌 이들이 과연 이해할까?
혼자 힘으로 이 거대한 다리를 수복해낼 수 있을 만한 마법사를 페트라는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그분은 감히 천재라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신의 기적이다.’
데네브 학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치기엔 너무나 부족한 사람임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제자를 들이지 않는다던 그 말이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데네브 학장은 페트라가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학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하니 있던 페트라는 뺨에 닿아 오는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데네브 학장의 마지막 수제자이자 황립 아카데미 역사상 유일한 졸업 시험 만점자, 신의 기적……. 그러니까 아마도 2황자일 마법사가 페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다리 6개도 이렇게 세워 놓으라고 전해. 대충 알겠지?”
그가 가볍게 말했고, 페트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졸업 시험 난이도 상향의 주범을 향한 원망이 불쑥 치솟았으나, 눈을 깜빡이는 사이 2황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