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카샤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아래에서 본래라면 서로를 죽여야 했을 적들이 힘을 합쳤다. 각자 다른 옷을 입고 뒤엉켜 싸우던 병사들은 거리낌 없이 서로를 돕고 목숨을 구했다.
“뒤에 조심해!”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그 모습을 보던 헤카베는 문득 깨달았다. ‘서로를 죽여야 했을 적들’이라는 전제는 아예 틀렸다. 그들은 원래 한 편이었다. 고작 반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헤카베는 그들이 등진 높은 방벽을 바라보았다. 이 방벽은 애초에 누구를 위해 세워진 것이었던가? 무엇이 옳은가? 마수를 베고, 또 베면서도 의문이 헤카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헤카베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2황자의 곁에서 검을 휘두르는 남자였다. 거친 바람에 붉은 머리칼이 턱 끝에서 휘날렸다.
헤카베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지금처럼 계급이 높지는 않았지만, 11년 전에도 헤카베는 수도 수비군 소속이었다. 축일의 악몽을 재현할 뻔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헤카베는 지휘관의 명령이 현명하지 못함을 알았으나 항명하지 못했다. 군인은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미덕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군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였다. 문제는, 상부의 명령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반기를 들기란 죽음을 각오하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충성이라는 명목하에 올바르지 않은 명령에도 침묵하고, 그 결과를 은폐하다가 썩어들어가고는 하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항명하여 방벽을 지켜냈다는 용병이 그토록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헤카베는 얼마나 놀라고 또 부끄러웠던가.
수도 수비군을 무능한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가넷을 오히려 원망하는 상관과, 자신도 외부인인 용병이었다면 그랬을 거라며 쉽게 말하는 동료들의 말을 들으며 헤카베는 냉정히 판단했다.
글쎄. 나는 그럴 수 없었을 거라고.
이제 더 이상 헤카베에게 그릇된 명령을 내릴 상관은 없다. 잘못된 방향으로 배를 몰고 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이 존재했다.
헤카베는 아까 전 막사에서 들은 카르예니프의 대답을 떠올렸다.
‘로디언 카샤프가 제 아들을 패륜아로 키워 낼 사람이었던가. 나는 믿지 못하더라도 그대의 친구는 믿길 바라네.’
‘무례한 질문을 했습니다, 전하.’
‘진정 사과를 하고 싶다면 서두르지. 우리는 이미 많은 걸 잃었고, 아군이든 적군이든 더는 무용한 죽음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
눈을 들자, 지금도 2황자는 전선의 맨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을 들어 몸을 지키며 다른 손으로는 마법을 쏘아 보냈다.
그의 얼굴은 아까처럼 말끔하지 않았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뺨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으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는 여느 병사들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헤카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옳은가?
지난 천 년간 반복해 온 마수와의 전투는 몇 시간 만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인간의 승리였으나 늘 그랬듯 승리에도 대가가 따랐다.
2황자군과 수도 수비군 병사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전사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날랐다. 동료를 잃고 우는 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황자군을 절대 카샤프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은 유효했기에 성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상관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면 그들은 다시 칼을 겨누고 서로를 죽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인간이면서도, 서로 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사자를 빠짐없이 수습하라. 놓친 마수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라. 그리고 사태가 일단락되면…….”
헤카베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입술을 벌렸다.
“성문을 열어라. 우리는 더는 같은 제국민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다.”
“……총대장님!”
그 뜻을 가장 먼저 이해한 부관이 기절할 듯 놀라며 외쳤다. 헤카베는 부관의 얼굴을 보며 되물었다.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나?”
부관이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가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닙니다. 저 역시 이 내전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십니까. 다만, 일이 잘못된다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만약 카르예니프가 끝내 승리하지 못한다면 헤카베는 반역자를 도운 죄로 가장 먼저 목이 잘릴 것이다. 끔찍한 배신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신뢰하는 부관의 대답에 조금 더 확신을 얻은 헤카베가 웃음을 흘렸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고작 검 한 자루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 길을 틔워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11년 전 어떤 용병이 그랬듯이.
* * *
2황자군이 수도에 입성한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카샤프에 사는 대부분의 시민은 곧 그들의 안뜰에서 벌어질 두 세력 간의 충돌을 예상하며 문을 꼭꼭 닫아걸고 집 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마치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군대를 맞이하듯 2황자군을 환영했다. 그 환영 인파가 생각보다 많아 오히려 2황자군이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카샤프의 첫 번째 방벽과 두 번째 방벽 사이의 구역은 보통 외성 구역이라고 불렸다. 외성 구역에 사는 시민들은 대부분 평민이었고, 특히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나왔다. 어린 시절 토파즈가 살던 로즈 거리도 남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동네였다.
방벽 밖에서 벌어진 마수의 습격을 2황자군과 수도 수비군이 힘을 합쳐 막아냈다는 소문은 하룻밤 사이 로즈 1번가의 무두장이도 알 정도로 널리 퍼졌다. 하늘을 수놓는 금빛 마법을 실제로 목격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안 그래도 2황자를 향해 민심이 기울어 가던 시기였다. 직접 ‘기적’을 목격한 이들은 기꺼이 2황자군의 행렬에 대고 꽃비까지 뿌려 댔다.
토파즈는 조금 기가 막힌 심정으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보라색 꽃잎을 쥐었다.
운이 좋아 첫 번째 방벽을 유혈 없이 통과했으나, 수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떤 함정을 맞닥뜨릴지 모른다고 각오했다. 그러나 성문 앞의 인파를 넘어서 외성 구역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1황자군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평화롭지 않습니까?”
“설마 외성 구역을 아예 포기한 걸까요?”
여기저기에서 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서 파견한 별동대로부터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2황자군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내심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쿵, 쿠웅! 쿵! 어디선가 묵직한 굉음이 연달아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북쪽 방향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전하, 전하!”
“무슨 일이지?”
“1황자가 바이올렛 강을 건너는 교량을 끊었다고 합니다.”
“어느 교량을 말하는 거야? 똑바로 보고해.”
카르옌이 날카롭게 추궁하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전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7개 전부로 추정됩니다.”
* * *
페트라는 바이올렛 강을 따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카샤프 남부와 중앙을 연결하는 7개의 교량 중 황립 아카데미에서 가장 가까운 폰스 대교를 건너기 위해서였다.
페트라는 황립 아카데미 마법부 재학생이었다. 더 정확히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모두 채웠으나 졸업 시험을 3년째 통과하지 못한 졸업 탈락자였다. 그와 같은 처지의 학생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불행이었다.
황립 아카데미는 전교생 기숙사제였기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학생들은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바이올렛 강 남쪽 드넓은 부지에 지어진 황립 아카데미는 결계로 보호되고 있어 매우 안전했으며 식당과 커피 하우스는 물론 서점, 옷 가게, 극장 등 필요한 시설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물론 아카데미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원인 중에는 자신의 지능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수업 내용, 가히 살인적인 양의 과제, 끝이 보이지 않는 졸업 시험 준비 따위도 있었다.
페트라 역시 하루의 절반은 도서관에, 나머지 절반은 연무장에 처박혀 있어야 올해 있을 졸업 시험 통과를 노려볼까 말까 한 처지였으나, 불행히도 그는 돈까지 벌어야 했다. 학비나 연구 재료는 아카데미의 후한 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먹고 입는 데 드는 최소한의 생활비는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하아…….”
숨만 쉬어도 한숨이 나왔다. 졸업만 하면 탄탄대로가 펼쳐진다지만 그 졸업장을 얻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난했다.
페트라는 뒤에서 들리는 마차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조금 더 강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은 특별한 문장이 붙어 있지 않은 사륜마차였다.
바이올렛 강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는 보라색 꽃을 피워 늦봄이면 강변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페트라는 감상에 빠지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차라리 저 꽃잎처럼 강물에 빠져 버리고 싶다. 아니, 그가 아니라 아카데미 교수들을 죄다 담가 버리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통과하라고 그딴 시험 문제들만 골라서 내는 거지? 잘났으면 다야?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페트라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예민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지진인가? 설마 또 마수의 침입? 페트라가 본능적으로 그릇에 마나를 꽉 채웠을 때였다. 어디선가 다른 마법사의 흔적이 느껴진다 싶더니 땅이 흔들렸다.
쾅, 콰아앙! 쾅!
“악! 뭐야!”
귀를 찢는 굉음에 페트라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감싸는 얇은 방어막을 펼친 페트라는 곧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눈앞에서 육중한 다리가 설탕 과자처럼 무너져내렸다. 늘 마차며 행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폰스 대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