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98)화 (98/110)

#098

수도 수비군 총대장, 헤카베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투구를 벗어 던졌다. 투구 아래로 중년에 접어든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부드러웠으나 매서운 눈빛과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 탓에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

“총대장님, 이걸로 땀이라도 닦으십시오.”

연락을 받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헤카베는 부관이 쥐여 준 손수건으로 땀을 대강 닦아냈다.

“새로 하나 사 주지. 내일도 내 목이 붙어 있다면 말이야.”

헤카베가 성큼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도착한 것은 그가 먼저였다.

조금 전, 남쪽에서 마수의 움직임이 관찰되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지만 헤카베는 직접 이곳으로 왔다.

수도의 첫 번째 방벽과 남쪽 바이델 사이의 평원은 잘 닦인 길을 따라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이 언제나 줄을 잇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전이 시작된 이후로는 예전보다 활력이 부쩍 줄었다. 검문이 깐깐해진 데다 수도 수비군이 늘 눈을 부릅뜬 채 경계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2황자군이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최근에는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그 평원 한가운데에 급하게 임시 막사 하나가 지어졌다.

제안이 있다며 먼저 회담을 요청한 쪽은 2황자군이었다. 비록 공식적으로 반역 혐의를 쓰고 있기는 하나 황자가 직접 오겠다고 전해 왔으니 이쪽에서도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가 헤카베 경이군.”

아름답지만 언뜻 냉정한 빛을 띠는 푸른 눈이 헤카베를 응시했다.

“소개는 생략하지. 이제 제국에 내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

2황자, 카르예니프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단 두 명을 제외한 호위를 모두 물린 그에게서는 헤카베가 자신을 함부로 해칠 수 없으리라고 여기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에서든, 물리적인 힘의 차이에 의해서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내전에서 2황자가 보여 준 기적과도 같은 마법 이야기는 수도에서도 이미 파다했다. 그 소문이 모두 진실이라 믿는 이는 드물었으나, 본래도 에페르테 황제 이후 가장 뛰어난 마법사로 알려진 2황자였으니 아주 허풍은 아니리라.

헤카베가 2황자를 실제로 본 것은 몇 년 전, 막 수도 수비군 총대장직을 맡았을 무렵의 축일 예배에서였다.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이지만 황자의 얼굴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찬사가 더 어울리는 그 얼굴은 신전에서 보니 꼭 천사의 현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수년 만에 다시 본 2황자는 훌쩍 자라 있었다. 덜 여물었던 소년의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 상반신만 그려진 수배지의 흑백 초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묘한 위압감도 풍겼다.

무엇보다도, 로디언 카샤프를 너무나 닮았다.

“아버지께서 가끔 경의 이야기를 했었지. 전우였다고 들었어.”

“……예. 그렇습니다.”

로디언이 어린 엘제니아 황제와 어울려 다니다가 보직을 잃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한미한 가문 출신의 호위 기사가 엘제니아에게 특별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던 것인지, 로디언은 선황의 명에 의해 유배 가듯 전장으로 떠났었고 그곳에서 헤카베를 만나 함께 싸웠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그 기사를 모든 전우가 존경했다. 전장에서 그의 선의와 용기에 빚을 지지 않은 동료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으니 길게 말하지 않겠네. 마수가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야. 우리가 이곳을 나설 즈음이면 이미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겠지.”

“예. 들었습니다.”

“그대에게 묻지. 그대는 반역자와 싸우느라 백성을 잃을 것인가. 반역자와 손잡고 백성을 지킬 것인가?”

“…….”

예상보다 더 직설적인 제안에 헤카베가 침을 삼켰다. 친우와 별로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의 아들은 실제로 보니 너무나 닮아 있었다. 얼굴과 체격뿐 아니라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빛까지도.

헤카베는 애써 접어놓았던 의문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로디언 카샤프 경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

‘정말 네가 죽였냐’는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2황자의 뒤에 서 있던 호위 중 한 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나서려는 것을 황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 대답이 그대의 공적인 결정에 중요한가?”

“그렇습니다. 이미 한 번 신의를 저버린 자에게 제 부하들의 목숨을 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황자, 카르예니프가 적진에 들어와 처음으로 웃음을 흘렸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가 입을 열었다.

* * *

“얘네 좀 이상하지 않아?”

마수를 상대하던 2황자군은 싸울수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대부분의 마수는 이지가 없으며 인간을 향해 보이는 대로 공격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나타난 마수들은 눈앞의 병사들에게 발톱을 세우는 대신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동선은 본래 2황자군이 움직이려고 했던 동선과 흡사했다. 바이델을 경유해 북쪽의 카샤프에 닿는 것이었다. 2황자군은 마수를 저지하기 위해 바이델을 벗어나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부상자는 후방으로!”

“젠장, 제국군인지 수비군인지 쟤네는 왜 보고만 있는 거야?”

토파즈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11년 전 마수 침입 때와 같은 제5관문 부근이었다. 방벽을 둘러싸듯 진열을 갖추고 있는 수도 수비군은 ‘반란군’을 상대해야 할지, 그들을 도와 마수를 상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수도 수비군은 수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불리는 만큼 보수적이고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윗선의 확실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 그중 가장 윗선을 카르옌이 몸소 만나러 간 상황이었다. 그가 무슨 결론이든 얻고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코끝에는 이미 익숙해진 꽃향기가 맴돌았다. 혹시 11년 전 그날도 이런 향기를 맡았던가?

토파즈는 제5관문 앞을 지키던 축일 사흘 전 낮을 기억했다. 유례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 사고와 마치 방벽을 어지럽히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 굴던 마수들.

어쩌면 그때부터 누군가는 수도에 혼란을 가져오고 싶어 했을까. 어떤 변화는 혼란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기 때문에.

그 사건으로 당시 수도 수비군 지휘부는 대거 물갈이되었고 불명예를 떠안았다. 열여덟의 토파즈는 영웅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동료들을 잃었다. 당일 아침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병사가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다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참혹한 현장이었다.

11년이 흘렀고 토파즈는 다시 같은 전장에 서 있었다. 토파즈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마수의 질긴 가죽이 찢겨나가고, 단단한 발톱이 부서졌다.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 것은 토파즈의 검이 두 개째 부러졌을 무렵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2황자군이 사용하는 월계관 문양의 깃발과 수도 수비군을 상징하는 사자 얼굴 문양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였다.

손톱만큼이나 작게 보였지만, 맨 앞에서 달려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카르옌이 왼팔을 앞으로 뻗으며 오른팔을 턱 옆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자세였다. 정작 그의 손에는 활도 화살도 들려 있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 모습을 우습게 여기지 못했다. 쭉 뻗은 왼손 검지에서부터 눈부시게 찬란한 황금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카르옌은 가볍게 무형의 활시위를 당겼다. 손을 놓은 순간 쏘아진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햇살로 빚은 듯 빛나는 화살 수백 개가 한 사람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광경은 가히 신성하게까지 보였다.

실제 화살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리를 돌파한 마법이 2황자군의 머리 위를 지나 포물선을 그리며 더 멀리 뻗어 갔다. 수백 개의 황금빛 화살이 마수들을 향해 쏟아졌다.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토파즈가 떠올린 것은 신전 외벽에 새겨져 있던 벽화였다. 다프닌교의 신전이라면 어디든 반드시 신의 아들인 에페르테가 제국을 건설한 일화를 벽화에 그려 넣었다.

벽화 속 에페르테는 ‘기적’으로 마른 땅에 폭풍우를 불러오는가 하면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게 하고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렇게 마수를 몰아내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과장된 신화이리라 치부했던 토파즈조차도 이 순간에는 그 ‘기적’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지독한 불신자의 마음속에서도 신앙을 싹 틔울 만한 광경이었다.

2황자 카르예니프가 흑마법사라는 말은 이제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전하다!”

“전하께서 수도 수비군을 데려오셨어!”

아군이 환호했다. 신의 사자를 환영하듯 열렬한 열광이었다. 그들은 언제 막막함을 느꼈었냐는 듯 남은 마수들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절대 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의 등을 떠밀고 어깨를 가볍게 만들었다.

수도 수비군 총대장, 헤카베는 상상을 웃도는 기세에 오싹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들을 적으로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검을 맞대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살아 있어야 내일의 싸움도 이어지는 것이다. 헤카베는 숨을 가다듬으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마수를 무찔러라! 단 한 마리도 방벽을 넘지 못하게 해라!”

뒤따르던 수도 수비군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우레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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