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무슨 생각 하세요?”
툭, 어깨 위로 가벼운 머리통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카르옌이었다. 그는 토파즈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길고 촘촘한 금빛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속눈썹이 뺨에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사르르 웃는 얼굴은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더 빛나 보이는지 익히 아는 듯했다.
“예쁜 척 그만하고 떨어져.”
단호히 얼굴을 밀어내는데 카르옌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뻔뻔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제가 그렇게 예뻐 보이시나요?”
질색한 표정을 지으니 그가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꿋꿋이 뺨을 밀어내는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손바닥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왔다.
“그러지 마시고 더 어여쁘게 여겨 주세요.”
“…….”
손바닥 위로 드러난 눈가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이제 와서 온순한 고양이인 척 굴어 봤자 속에는 여우가 한 마리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오래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여우 입장에서 억울할지도 모르지. 어릴 때는 분명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커 버린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카르옌이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제가 예뻐 보이지 않으십니까? 토파즈님보다 더 커 버려서요?”
“…….”
말 그대로 훌쩍 커 버린 카르옌이 토파즈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얼굴을 슬그머니 뒤로 물리는데도 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몸이 기울어지며 소파에 점점 깊게 파묻혔다. 더는 물러날 자리도 없을 때쯤 카르옌의 손이 토파즈의 어깨 옆을 짚었다.
오똑한 코끝이 이마를 부드럽게 스쳤다. 곧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았다.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음?”
카르옌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떼어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조금 전 짚었던 소파 뒤의 벽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잠시만요, 토파즈님. 여기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카르옌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금빛 가루가 벽을 타고 퍼져 나갔다. 꼭 어떤 문양을 그리듯 뻗어나가는 빛을 바라보는데 퉁, 작은 소리가 울리며 거대한 벽 일부가 통째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몸을 겹치고 있던 소파까지 함께.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뭐야.”
토파즈는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카르옌을 옆으로 밀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뜻밖에도 아늑한 방이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침대며 벽난로, 안락의자까지 갖춰져 있었다.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공간인 듯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았다.
“있었네요, 비밀 공간.”
“…….”
분명 비밀 공간 비슷한 것을 찾고 있기는 했지만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 따위를 예상했지, 이런 공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아까 토파즈가 벽 곳곳을 만졌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아무나 열 수 있는 장치는 아닌 듯했다.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두 폭의 초상화였다.
피사체가 정면을 응시한 자세로 그리는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두 그림 속 인물은 비스듬히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장의 그림이 서로 마주 보는 듯한 구도였다. 배경 역시 동일했다. 바로 이 방이었다.
“저 사람…….”
왼쪽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역사서나 벽화 따위에서 익히 본 초대 황제의 얼굴이었다. 화려한 금발의 미남은 그동안 본 그림들에서와 달리 부드럽고 애틋한 눈빛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금 미화해서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옆에 선 카르옌을 힐끔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후손의 얼굴을 보면 이 초상화 쪽이 실물과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문제는 황제의 오른쪽에 걸린 초상화였다. 서로를 마주 보듯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이니, 옆에는 분명 초대 황후의 얼굴이 걸려 있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은…….
“남자?”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화폭 속 인물은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칼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고, 옆에 그려진 황제만큼이나 미남이었다.
토파즈는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빵을 나눠주던 신관의 말을 떠올렸다.
‘너처럼 새빨간 머리칼은 처음 보는구나. 우리 에델티움의 첫 번째 황후 폐하도 피처럼 붉은 머리칼이었다고 하던데, 꼭 너 같았을까?’
그 신관이 워낙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터라 당시에는 초대 황후가 붉은 머리칼이라는 사실이 누구나 아는 상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여러 설만 난무할 뿐, 초대 황제의 유일한 반려였다는 인간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남은 기록이 없었다. 기사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생김새도, 이름도, 심지어는 성별조차도 자세히 남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지금 알 것 같았다.
“초대 황제의 반려가 남자였다고요?”
제국법에는 혼인이 가능한 성별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동성혼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었다. 특히 귀족 사회에서는 동성끼리 연애를 넘어 혼인까지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는데, 그들이 후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누구의 핏줄이죠?”
카르옌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 역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초대 황제와 그 반려의 사랑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에델티움의 뿌리였으므로. 모든 이들이 황족은 에페르테와 용맹한 기사 사이의 후손이며, 그렇기에 신의 축복인 ‘마법’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신화가 전부 거짓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설마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제삼자가…….”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토파즈가 초상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부정했다.
“네 조상은 신의 아들이고 위대한 마법사였다며. 후손 정도는 나무에서 열매 따오듯이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그런 발상은 못 해 봤네요.”
카르옌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딘가 흥미가 담긴 목소리였다.
“이 집무실을 쓴 적이 있는 선대 황제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아냈을까요?”
“알았다 하더라도 비밀에 부쳤겠지.”
그러니 황족인 카르옌조차 몰랐던 것이리라.
토파즈는 초상화가 걸린 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림 밑에는 화가의 서명 대신 작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토파즈가 소리 내어 그 글자를 읽었다.
“‘친애하는 나의 바이델.’”
바이델이라면 다름 아닌 이 휴양 도시의 지명이었다.
“아무래도 초대 황후, 아니. 초대 국서의 이름이 바이델이었던 모양인데.”
다르게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옌이 읊조렸다.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
“……?”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황족에게만 붙는 두 번째 이름인 ‘델’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 말입니다.”
“아…….”
토파즈가 무언가를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델’은 에델티움의 직계 황족에게만 붙는 두 번째 이름으로, 그 기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에델티움, 그리고 바이델. 두 이름을 제외하면 제국 내에 ‘델’ 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단 하나도 없었다. ‘델’은 황족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이기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 글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초대 황제 에페르테의 시대에 정해진 그대로였다.
토파즈는 초상화에 그려진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커녕 이름 한 글자조차 역사에 남지 않은, 비밀스러운 반려.’ 지금껏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후손들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역사서에 나란히 남기고 싶었던 고민의 결과인 것 같은데요.”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 토파즈는 그 이름을 조용히 입 안에서 되뇌어 보았다. 누군가의 낭만적인 사랑이 그 이름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이름이네.”
“그런가요?”
카르옌이 고개를 기울이며 토파즈에게 물었다.
“토파즈님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셨나요?”
“기억 안 나.”
짧게 대꾸했던 토파즈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냥 언제부턴가 토파즈라고 불리고 있었어. 붉은 머리를 가진 애한테 이런 이름을 붙여 줬으니 누군지는 몰라도 대충 지었겠지. 악취미였거나.”
카르옌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빈민가의 고아한테 정성껏 이름을 지어 줄 사람이 있었을 리 만무한데, 그리 놀랄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카르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닙니다, 토파즈님. 이걸 보세요.”
카르옌이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보석을 세공해 만든 귀걸이 한 짝이었다. 갑자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뭘 보라는 건가 싶어 미간을 좁혔다.
“이 보석이 토파즈입니다. 붉은 토파즈.”
“……?”
토파즈는 그가 진지한 낯으로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까딱였다. 카르옌이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갔다.
“노란색의 채굴량이 가장 많아서 노란색 보석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대륙에서 처음 발견된 토파즈는 이렇게 붉은빛을 띠는 보석이었습니다. 토파즈라는 이름도 티잔 왕국 언어로 ‘불’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고요.”
카르옌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마름모꼴의 작은 보석이 빛났다.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주홍빛이 감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은은한 붉은색 보석이었다. 카르옌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토파즈님의 머리칼이 아름다운 불꽃색이라서 누군가 이 이름을 붙여 줬을 거예요.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아무 대꾸도 떠올리지 못하는 토파즈를 향해 카르옌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토파즈의 머리칼을 쥐고 그 끝에 입 맞췄다. 경애하듯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거 아세요? 붉은 토파즈는 워낙 귀해서 ‘황제의 토파즈’라고도 부른답니다.”
“…….”
황제의 보석. 그 말을 듣는 순간 토파즈가 느낀 감정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평생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대충 지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실제로도 그랬을지 모른다. 붉은 토파즈의 존재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붙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초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이름에 의미를 담아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토파즈가 모르던 순간에도 줄곧,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과분한 의미를 담아.
손끝이 저렸다. 토파즈가 손을 뻗어 카르옌의 어깨를 쥐었다.
“넌…….”
그러나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토파즈는 기척을 느끼고 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보다 한 박자 늦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급보입니다!’
비밀 공간 바깥에서 카르옌을 찾는 목소리였다. 토파즈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카르옌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카르옌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곧 다시 비밀 통로를 열어 집무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출입을 허락받은 기사가 바짝 굳은 얼굴로 외쳤다.
“마수입니다! 남쪽에서 마수가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