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96)화 (96/110)

#096

제국력 천 년 이후 한 번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이교도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수도를 중심으로 이교도의 본거지가 여럿 드러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이교도 신자 중에는 귀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이름 높은 자들이 섞여 있었으며, 심지어는 다프닌교의 신관까지 있었다. 밝혀진 귀족은 대부분 1황자파였다.

안 그래도 내전으로 인한 불황이 짙게 드리워진 때였다. 신전마저 이교도 색출에 몰두하며 구호 활동이 줄자 아사자와 동사자가 예년보다 훌쩍 늘었다.

이런 와중에 레오나르드가 이교도와 연관이 있다는 의혹은 보수적인 귀족들과 신실한 다프닌교 신자들, 극빈층의 마음을 흔들었다. 황제 대리를 향한 민심은 점차 폭락했다.

사기가 떨어진 제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고, 마탑과 손잡은 2황자군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했다.

2황자군이 남부의 미리암에서부터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바이델에 닿은 것은 두 계절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 * *

2황자군에서 표면적으로 가장 눈에 띈 존재는 마법사들이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용병들의 공로도 혁혁했다.

돈을 받고 움직이는 용병은 충성심이 얕아 쉽게 배신하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의뢰인을 배반한다는 소문이 난 용병을 고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용병 업계는 그들의 일감을 떨어뜨리는 배신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용병단은 배신자를 단순히 내쫓을 뿐만 아니라 평판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직접 응징하기도 했다. 녹스의 경우에는 규율이 더욱 엄격해 배신자를 처단하는 별개의 조직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징벌이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용병으로 먹고살 생각이 있다면 이름값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쪽이 보수 협상에 유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황자군에 고용된 용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긍지와 이름을 걸고 싸웠다. 중심이 되어 주는 ‘가넷’의 존재가 있었기에 더욱 똘똘 뭉칠 수 있었다.

오히려 배신은 예상치 못한 쪽에서 일어났다. 전투 도중, 귀족 가문 출신의 아군 병사 하나가 후방에서 카르옌을 습격했다. 토파즈의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든 사건이었다.

알고 보니 그 가문은 종말론이 횡행할 때를 틈타 이웃 영지를 빼앗고 세력을 늘려, 그 이후로 비밀리에 이교도를 후원하게 된 집안이었다. 그들은 새 시대의 방해물이라고 믿는 카르옌을 제거하기 위해 숨죽이고 기회를 노렸으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메르디나가 큰 부상을 입었다. 2황자군이 바이델을 그냥 지나치는 대신 잠시 머무르기로 한 것도 메르디나를 비롯한 부상병들의 치료와 휴식을 위해서였다.

“몸은 좀 어때.”

토파즈가 물었다. 백옥색 계단을 올라가던 메르디나가 뒤를 돌았다. 몇 달 만에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긴 잿빛 머리칼이 온화한 바람에 흩날렸다.

“전하께서 직접 치료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멀쩡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지 낯빛이 괜찮아 보여 다행이었다.

토파즈는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있던 메르디나의 얼굴과 피에 흠뻑 젖은 어깨, 병상 옆에 달라붙어 있던 이들을 선명히 기억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치유 마법을 쏟아붓던 카르옌과 두 명의 마탑 마법사, 그리고 하란까지.

“하란도 꽤 노력했지.”

“아,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습니다. 하란은 신학교를 그만둔 이후로 다시는 신성력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들었거든요.”

말을 잇던 메르디나의 눈길이 토파즈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온 카르옌과 하란이 보였다.

“그냥 고집이었지, 맹세까지야.”

하란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카르옌도 그가 신성력을 쓰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저 치기 어린 고집은 아니었으리라.

옆으로 다가온 카르옌이 토파즈의 어깨 위에 슬쩍 손을 올리며 소곤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란은 메르디나에게 오랜 빚이 있으니 이걸로 청산했다고 치면 됩니다.”

“빚?”

토파즈가 되물었고, 당사자인 메르디나마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카르옌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이었다.

“메르디나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하란에게 청혼했다가 차였었거든요.”

“아, 그랬죠.”

“그 얘기를 갑자기 왜 하십니까?”

메르디나는 덤덤히 긍정하는데 정작 하란이 파드득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네가 냉정히 거절해 열여덟 소녀의 마음에 상처를 냈으니 이게 빚이 아니면 뭐겠어.”

“허……. 굳이 상처 입은 사람을 찾자면 오히려 제 쪽이었습니다만?”

토파즈는 기이한 눈으로 하란과 메르디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복잡한 기류는 전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토파즈의 오묘한 시선에 하란이 단호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습니다. 메르디나는 그냥 정략혼이 귀찮아서 아는 사람 중에 대충 정혼자를 구할 생각이었던 것뿐이에요. 저 말고도 청혼받은 아카데미 학생이 다섯은 되었을 겁니다.”

“정확히는 너 포함 셋이었어. 그렇지, 메르디나?”

“네.”

메르디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란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 메르디나가 제게 뭐라고 했는지는 아십니까?”

‘하란 아히네스. 미리암 공작 부군이 될 생각 있나? 부부다운 친애는 보장할 수 없지만 부귀와 영화는 영원히 약속하지.’

“제 인생에 그런 낭만 없는 청혼은 처음이었습니다.”

“멋진데?”

“진심이십니까?”

토파즈의 반응에 하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카르옌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저는 곧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에게나 한 제안은 아니었어.”

메르디나가 조용히 덧붙인 말에 하란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었겠지.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되 그 가문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2황자를 지지하는 귀족이어야 했을 테니까. 기사라면 더 좋았을 테고.”

메르디나는 부정하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맹세를 깨면서까지 날 살려 줬으니 그 빚은 잊은 걸로 할게.”

“그러니까 그게 왜 내 빚이냐고? 사람이 진지하게 고심해서 답을 줬는데, 다음 날 나랑 똑같은 제안을 받은 놈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넌 모를 거야.”

“그때도 말했지만 동시에 여러 명에게 청혼한 건 아니야. 네가 거절한 이후에 차례대로…….”

“……그게 문제라는……. 결국 그 자식들은…….”

별것 아닌 옛일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평화가 느껴졌다. 지나치게 한가로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꼭 전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장소 때문인가.”

“네?”

토파즈가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카르옌이 고개를 시야로 쏙 들이밀어 왔다. 그는 장소? 하고 입 안에서 되뇌더니 등을 돌렸다.

“이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카르옌의 등 뒤로는 남부의 건축 양식과 흡사한 흰 성이 펼쳐져 있었다. 초대 황제 때 지어졌다는 바이델 행궁이었다.

최근 들어 연이어 패배를 맛본 제국군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수도와 가까워질수록 이런 현상이 심해져, 싸울 의지 없이 항복하는 이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덕분에 2황자군은 큰 격전 없이 바이델을 점령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포진해 있을 수도 수비군과의 대립이 최대 난관으로 점쳐지기는 했으나, 휴양도시인 이곳 바이델만은 제국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평온했다. 토파즈로서는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의 평온이었다.

바이델의 행궁은 지난여름 카르옌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카샤프에서 몇 시간이면 도착했을 곳을 해가 바뀌고 한참 만에 닿은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행궁을 관리하는 궁인들은 반역자 신세인 카르옌을 적대해 성문을 닫아거는 대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모셨다. 아직 황제의 생사 여부가 공표되지 않았으니, 그들로서는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1황자 대신 ‘2황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잘 보필하라’던 엘제니아 황제의 마지막 명령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투닥거리는 하란과 메르디나를 휴식이나 취하라며 보내고, 두 사람은 행궁 안을 조용히 헤집었다.

“에델티움의 황제들이 대대로 그랬듯이 어머니도 이 행궁에서 여름을 자주 보내셨습니다. 물론 이혼 전의 세이드 대공과 함께 간 적도 있었죠.”

흰 손의 움직임을 따라 책장의 책들이 한 줄씩 빠져나왔다가 다시 나란히 꽂혔다. 일일이 한 권씩 꺼내 보고 있던 토파즈는 전의를 상실하여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자가 이곳에서 초대 황제의 봉인 마법에 관한 단서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미 없애 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온 김에 한번 뒤져 볼 필요는 있겠죠.”

바이델 행궁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은 통창이 크게 나 있었다. 창밖으로는 대리석이 깔린 새하얀 발코니가 붙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흰 석조 난간 너머로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정원에는 장미가 만발했다. 조금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지 않은 붉은 장미. 세상에 이런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영원히 모른 채 잠든 아이가 저절로 떠올랐다.

“…….”

이 전쟁이 끝나고 수도에 도착하면, 전 재산을 털어 작은 집이라도 하나 마련할까.

정착. 용병이 된 이후로 고려해 본 적 없는 선택지였으나 뜻밖에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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