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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95)화 (95/110)

#095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토파즈는 노아 슐츠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졌다. 안타깝게도 양손이 묶여 있어 제대로 잡아줄 수는 없었다.

토파즈의 어깨에서 반으로 접혀 흔들리던 그는 얼마 가지도 못해 멀미를 호소했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마법사들은 다 너처럼 허약해?”

“헉, 억. 저 정도면 체력 엄청 좋은 편이거든요?”

“그럴 리가. 카르예니프도 너보다는 낫던데.”

토파즈는 그가 아는 가장 허약한 마법사의 이름을 입에 올렸고 노아 슐츠는 경악했다.

“그분이랑 비교하면 누군들 허약하겠죠!”

“무슨 소리야.”

걔는 툭하면 픽픽 쓰러지는 놈이다. 아카데미 동기라더니 카르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했다. 하긴, 겉모습만 봐서는 꽤 튼튼해 보일 테니까.

토파즈는 노아 슐츠의 헛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군사 기지를 포함한 주요 시설에는 공간 이동 마법을 튕겨내는 결계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간 이동을 하려면 일단 결계 범위 밖으로 나가야 했다.

토파즈는 아군 첩자가 확인해 준 결계 범위에 속하지 않는 동쪽 산을 향해 내달렸다. 브로치의 효력이 다하기 전에 도달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므로 발각되거나 포위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속력을 더 내지 못하는 다리가 답답했다. 그러나 이 구속구를 풀기 위해서는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원망은 좀 받더라도 지난번처럼 해제해 주긴 하겠지…….

“야. 내 얼굴 어때 보여.”

“예?”

토파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깨 위에서 달랑거리던 노아 슐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무뚝뚝하고…… 조금 차가워 보이지만 저와 견줄 만한 미남이신 것 같은데요?”

“……그딴 거 말고. 많이 얻어맞은 사람 같아 보이냐고.”

“아하.”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듯 노아 슐츠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이 와중에 외모에 대한 평가라도 바랐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토파즈는 진심으로 마법사라는 족속들의 머리를 열어 보고 싶어졌다.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나고 뺨에는 멍이 올라오고 있어요. 그래도 아까 흠씬 맞은 것치고는 별로 티 안 나는 것 같네요.”

토파즈가 한숨을 삼켰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돌아가긴 글렀다. 물론 그것도 돌아갈 수 있을 때나 걱정해야 할 일이겠지만.

5분이 지나 브로치의 효력이 다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두 사람을 못 보고 보내 줬다면 좋았겠지만, 야밤중의 기습에 진영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제국군의 눈을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들이 수색을 위해 쏘아대는 흰 빛이 여기저기를 길게 비추었다. 두 사람은 숨죽여 피했지만 몸을 숨기는 것보다 탈출을 우선시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결국에는 움직여야 했다.

“저기 있다!”

위치가 발각되자마자 화살과 마법이 쏟아졌다. 토파즈는 두꺼운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겼다. 화살이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가고, 등 뒤에서는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토파즈는 노아 슐츠를 내려주고 뒷덜미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나무와 나무 사이로 움직였다. 화살이 뺨을 스치고 불꽃에 소매가 그을렸다.

“헉, 헉. 죽겠…….”

산길을 좀 굴렀다고 노아 슐츠가 벌써 지쳐서 헥헥거렸다. 그는 언제든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느라 다른 마법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토파즈는 무성한 수풀 뒤에 몸을 낮춘 채 상황을 살폈다. 머리 위로는 수색 마법이 오가고, 산 아래에서는 일사불란한 발소리가 여럿 들렸다.

토파즈는 고민했다. 주머니에는 긴급 시 지원을 요청하는 마도구가 들어 있었다. 하늘에 작은 불꽃을 쏘아 올리면 그걸 보고 아군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아군은 약속을 지킬 터였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아수라장에 지원군을 부르는 게 옳은 선택일까? 괜한 희생만 늘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원군을 자처할지도 모를 누군가의 존재를 생각하면, 토파즈가 위험을 감수한 의미가 사라졌다.

“하…….”

손목을 감싼 구속구의 무게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몇 명이나 더 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노아 슐츠라도 먼저 보내는 게 좋겠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은 자만이었을까.

……어쩌면 진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켜 주겠다던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때, 가까운 곳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신경이 곤두선 토파즈가 그 기척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휙 돌렸다.

“…….”

갈색 털로 뒤덮인 웬 다람쥐 한 마리가 토파즈의 발치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심코 안도할 뻔한 그는 소란을 듣고 도망치는 대신 다가오는 산짐승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경계를 끌어 올렸다.

토파즈를 빤히 올려다보는 작은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 눈을 보는 순간 토파즈는 이상할 정도로 짙은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그리움이라고 이름 붙여도 별다르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은 다람쥐는 토파즈의 옷깃에 매달려 위로 올라오기 위해 버둥거렸다.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닌데도, 토파즈는 손을 뻗어 다람쥐를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눈높이가 맞는 곳까지 들어 올리자 다람쥐가 두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대고 천천히 주둥이를 비볐다. 마치 친애의 표시처럼.

그때 옆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노아 슐츠가 멍하니 하늘로 손을 뻗었다.

“저기, 저것 좀 보세요.”

고개를 미처 들어 올리기도 전에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뺨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리스타바트의 불꽃 축제에서 본 것과 비슷한 형형색색의 거대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환상 마법에 가깝다던 그 마법과 달리 저것은 실체가 있는 불꽃이라는 점일까. 불꽃은 하늘에서 조용히 산란하는 대신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꼬리에 불덩이를 매단 채였다.

“……그걸 네가 터뜨리면 어떡해.”

그것은 토파즈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순순히 구조 요청을 할 거라 기대한 적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얌전히 기다릴 생각도 없다는 의지의 표명.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대신해 주겠다는 듯…….

누구의 짓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토파즈뿐이 아니리라.

쿵,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낙하하던 불꽃은 결계에 맞아 튕겨 나갔지만 균열을 불러왔다. 결계가 약한 가장자리에서부터 뒤흔들렸다.

“대체 어떤 허약한 마법사가 저런 마법을 씁니까?”

두려움과 경탄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리던 노아 슐츠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 공간 이동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제 몸 어디든 좋으니 잡으세요.”

토파즈는 노아 슐츠가 뻗은 팔 위에 손을 올렸다. 뒤늦게 손바닥 위에 올라타 있던 다람쥐의 존재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작은 동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살갗에 불꽃의 열기 대신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져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았다.

커다란 나무가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저 멀리 아군 막사의 촘촘한 불빛이 보였다. 미리 정해 둔 귀환 좌표 그대로였다.

토파즈는 고개를 돌렸다. 예상한 얼굴이 그곳에 서 있었다.

“……카르옌.”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온 카르옌이 토파즈의 뺨에 손을 올렸다. 뺨에는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상처가 길게 남아 있었다. 카르옌이 손끝으로 그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 찢어진 살갗이 따끔했으나 놓으라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다쳐서 돌아오시고, 정말 속상하네요…….”

“어쨌든 돌아왔으니까 됐잖아.”

카르옌은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토파즈의 손목을 들어 올려 붉게 쓸린 살갗을 쓰다듬었다.

곧 마나 구속구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목이 가벼워지며 그제야 온몸에 피가 멀쩡히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홀가분했다.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자 카르옌이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더 강하게 반대해야 했어요. 다시는 토파즈님을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내는 일 없을 겁니다. 정말 다시는요…….”

엄연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만……. 카르옌은 노아 슐츠의 존재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토파즈의 어깨 위에 뺨을 기대 왔다. 커다란 몸을 구겨 가며 품을 파고드는 꼴이 애처로워, 토파즈도 그 어깨를 마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 * *

[마법사의 탑, 끝내 2황자의 편에 서다.]

[“황제 대리 레오나르드는 이교도 신자”]

[교황, 중립 깨다. “이교도 만행 좌시할 수 없어”]

[진짜 흑마법사는 누구?]

[지난겨울 아사자 두 배 증가……. 내전의 그림자.]

[무섭게 진격하는 2황자군]

제국력 1023년. 에델티움의 신년은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였다.

반역자 2황자의 탄신일이기도 한 1월 1일 아침, 에델티움의 신년을 밝힌 첫 소식은 황제 대리 레오나르드가 이교도 신자라는 폭로였다.

폭로의 주체는 천 년간 교황을 네 명이나 배출한 고위 성직자 가문, 아히네스였다. 아히네스 백작은 대신전에서 열린 성년식 행사 도중 이 같은 사실을 폭로하였으며 그 즉시 황족 모독 혐의로 가택에 연금당했다. 레오나르드의 수족이 된 수도 기사단이 곧 그를 끌고 가리라는 예상이 팽배했을 때였다.

이교도의 비밀스러운 예배 장소가 다프닌교의 한 수습 신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그 장소는 축일의 악몽 당시 반파되어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옛 다프닌교 대신전의 지하였다.

다프닌교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이교도가 대신전 지하에 자리 잡아 그들만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다프닌교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결국 내전 내내 중립을 표방하며 목소리 내기를 꺼리던 교황마저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도 밖에서 치열한 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수도 안에서도 한바탕 폭풍이 휩쓸었다.

이 불씨를 당긴 수습 신관이 아히네스의 가신인 테투스 자작가의 추천장을 받고 신관이 되었으며, 얼마 전 북부에서 수도의 신전으로 파견된 어린 소년이었다는 점은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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