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94)화 (94/110)

#094

토파즈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전혀 기죽지 않은 눈을 마주한 병사가 움찔, 뒤로 물러날 뻔했다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 자식이…….”

“그만 해요. 먼지 나네.”

뒤에 있던 마법사가 그를 만류했다. 매일 함께 막사를 사용했을 동료의 시신이 한쪽에 있는데도 마법사는 전혀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을 훑어보는 눈길에서 흥미가 묻어났다.

“그럼 일단 침입자를 사로잡았다고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병사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꼭 그래야 해요?”

“예?”

“데려가면 머리가 텅텅 빈 칼잡이들은 무조건 죽이자고 날뛸 텐데……. 마법사는 귀중한 재료니까 가치 있게 써야죠.”

“…….”

“검사 쪽이야 데려가서 죽이든지 고문하든지 마음대로 하고요.”

이 마법사의 발언권이 꽤 높은 것인지, 병사는 머뭇거리면서도 섣불리 반기를 들지 못했다. 결국 병사가 토파즈를 붙잡아 억지로 일으키려던 때였다.

옆에서 나란히 무릎 꿇고 있던 노아 슐츠가 입을 열었다.

“재료라니, 날 푹 고아서 먹기라도 할 작정이야? 나도 어디 가서 괴상하다는 소리 꽤 들어봤는데 그쪽한텐 못 당하겠네. 식인을 하는 마법사라니 끔찍해.”

세상 말세라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마법사가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식인? 그쪽 상상력이야말로 끔찍하게 나쁘네요. 그딴 게 아니라 내 위대한 마법의 재료로 삼아 주겠다는 얘기잖아요.”

“위대한 마법? 아, 혹시 멍청한 마법사들이 남의 생명력 뽑아다 쓰고 제 성취인 줄 착각한다는 그 흑마법 이야기하는 거야?”

“뭐라고요? 지금…… 멍청하다고 했어요?”

마법사들 앞에서는 금기어나 다름없는 ‘너 멍청해’라는 말을 들은 흑마법사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응. 멍청하고 한심해. 나였으면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텐데.”

마나 구속구만 믿고 노아 슐츠의 입을 막아 두지 않은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흰 마법사들의 수치야.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마법사라고 불러주기도 아깝네.”

“개자식, 너 이름 뭐야? 당장 불어. 네가 무시한 그 마법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해 줄 테니.”

존대를 내다 버린 흑마법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당장이라도 저주를 퍼부어 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노아 슐츠는 순순히 제 이름을 흘리는 대신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그에 흑마법사는 더욱 열받아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흑마법사가 대상자의 끔찍한 고통을 불러오는 고문 주문을 외우려던 때였다. 옆에서 풀썩 소리가 났다. 옆에 서 있던 병사의 몸이 쓰러지며 흑마법사를 덮쳤다.

“뭐야!”

함께 옆으로 쓰러질 뻔한 흑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병사의 심장에 깊이 박혀 있는 단도와 그 앞에 멀쩡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 부, 분명 발목도 묶여 있었을 텐데…….”

병사가 가까이 왔을 때 전직 소매치기로서의 경력을 살려 품 안의 단도를 훔쳐낸 토파즈는 노아 슐츠가 시선을 끄는 동안 발목의 밧줄을 잘라낸 지 오래였다. 토파즈가 나직이 충고했다.

“상대가 검사인 걸 알았으면 구속구를 등 뒤로 채웠어야지.”

상황을 파악한 흑마법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다급히 주문의 방향을 토파즈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동시에 얌전히 앉아 있던 노아 슐츠가 제 머리를 흑마법사의 옆구리에 힘껏 갖다 박았다.

“악!”

흑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노아 슐츠의 머리를 후려쳤다. 흑마법사가 외우던 주문이 수포가 된 것을 안 노아 슐츠는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도 히죽 웃었다. 녹색 눈동자가 천진하게 빛났다.

……이 새끼는 웬만하면 건들지 말자.

그 광경을 보던 토파즈는 조용히 다짐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미친놈이라지만 카르옌 정도면 그나마 얌전한 미친놈이었다. 이 정도쯤은 되어야 진짜 광기라고 부를 수 있었다.

토파즈는 여전히 손이 앞으로 구속된 상태였기에 마법사의 품을 파고들듯 바짝 붙어 어깨에 검을 박아 넣었다.

“커헉.”

“열쇠 어딨어?”

“으윽. 가, 가만 안 둘…….”

“빨리 대답 안 하면 고통만 커져.”

토파즈가 마법사의 어깨를 꿰뚫은 검을 비틀어 상처를 헤집었다. 바들거리던 마법사가 고개를 찧듯이 움직여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토파즈는 곧바로 그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작은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노아 슐츠의 손목에 매달린 마나 구속구부터 풀어 주었다. 너무 무겁고 기분이 나빴다며 노아 슐츠가 우는소리를 했다.

“제가 귀중한 인재라서 안 버리고 같이 붙잡혀 주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당연한 소리를. 난 여기서 죽을 생각 없어.”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은 없었다.

“저도 여기서 죽고 싶지 않거든요? 아직 못다 한 연구가 얼마나 많은데요. 집에서 저만 기다리, 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끔 기다려 주는 고양이도 있다고요.”

“네 입은 대체 언제 조용해져?”

흑마법사는 고작 어깨 통증만으로 반쯤 혼절해 있었다. 막사 안을 둘러보면 본인은 남의 신체 부위를 잘만 절단해 마법의 도구로 삼았던 것 같다만, 정작 본인의 고통은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토파즈가 마법사의 목을 내리그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 주었다. 뒤를 돌자 노아 슐츠는 제 안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안주머니에 고양이 발 도장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됐고, 또 다른 놈들 몰려오기 전에 내 구속구도…….”

그때 노아 슐츠의 시선이 토파즈의 등 뒤를 향했다. 녹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지우고 크게 벌어졌다.

무언가 느낀 토파즈가 그의 몸을 뒤로 밀친 것과 노아 슐츠의 입에서 다급한 주문이 흘러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방패!”

콰앙! 토파즈의 등 뒤로 반투명한 보호막이 나타났다가 충격과 동시에 산산이 깨졌다. 머리 위로 뜨거운 바람이 훅 스쳐 지나갔다. 폭발의 여파였다.

“뭐야?”

“콜록, 마법사 최후의 발악이요.”

막사가 곧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막사의 한쪽 벽에는 불까지 붙어 있었다.

“하…….”

이제 불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노아 슐츠는 폭발 속에서 용케도 쥐고 있던 열쇠를 토파즈의 손목에 가져다 댔다. 잔뜩 소란을 일으켰으니 어떤 경로로 빠져서 나가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귓가에서 철컥, 철컥, 연신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내리니 노아 슐츠가 열쇠를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맞는데요?”

“…….”

토파즈는 소란을 듣고 다가오는 막사 바깥의 기척을 느끼면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자폭 마법을 펼친 흑마법사는 이미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열쇠가 있었다 한들 이미 녹아 없어졌을 듯했다.

“어떡하죠?”

“하……. 일단 나가.”

토파즈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콜록거리는 노아 슐츠를 건져내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곧바로 병사 두 명을 맞닥뜨렸다.

토파즈는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그림자 밖으로 손목을 숨겼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쪽 천막에서 마법사들끼리 싸우다가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토파즈가 여전히 제국군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속아 넘어갔다. 아니, 그런 듯했다. 황급히 스쳐 지나가던 두 병사 중 한 명이 멈춰 서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쪽에서 오십니까? 소속이 어디…….”

퍽! 토파즈는 마나 구속구를 무기처럼 휘둘렀고, 머리를 얻어맞은 병사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른 병사가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들기도 전에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그리고 무작정 머리를 갖다 박았다.

쾅! 조금 전 마나 구속구로 후려쳤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소리가 나며 병사가 쓰러졌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든든하네요. 약간 무적 방패를 들고 있는 느낌?”

등 뒤에 숨어 있던 노아 슐츠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무적 아니다. 이딴 걸 달고 있는 이상 더더욱.”

토파즈가 양 손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 이거 못 풀어?”

“제가 그걸 어떻게 풀어요?”

노아 슐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도 일종의 마도구라고 하던데. 여기에 걸린 주문을 파훼한다든지……. 됐다, 다른 거 필요 없으니 넌 공간 이동이나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해.”

“비마법사들은 이게 문제예요. 그런 대규모 마법이 뚝딱 되는 줄 안다니까요.”

“되던데.”

토파즈는 짤막하게 대답하면서도 주변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노아 슐츠가 혼자 열심히 중얼거리더니 토파즈의 어깨를 당겼다.

“하……. 이거 진짜 극비인데 목숨이 먼저니까 어쩔 수 없네요. 딱 두 개 남았는데 하나 드릴게요.”

노아 슐츠가 내민 것은 투명도 높은 흰 보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바쁜데 뭐냐는 눈으로 힐끔 바라보자 그가 브로치를 토파즈의 옷에 얼른 달아 주었다.

토파즈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내려다보다가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노아 슐츠가 토파즈의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슨 미친 짓인가 싶어 뿌리치려는데, 막사 너머에서 나타난 제국군 병사 무리가 두 사람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막사로, 몇 명은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아군을 향해 달려갔다. 가만히 서 있는 토파즈와 노아 슐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방금 뭐야?”

“눈을 흐리게 하는 마법과 기척을 숨기는 마법이 중첩으로 걸려 있어요. 한번 들키면 그다음부터는 소용이 없으니 조심하세요.”

“그걸 왜 지금 꺼내?”

맡겨 놓은 사람처럼 되묻자 노아 슐츠가 입가에 검지를 붙이며 간곡히 말했다.

“실은 전 대륙 마법사 윤리 강령에서 엄격히 생산과 소지를 금지하는 물품이거든요. 제가 갖고 있었다는 건 절대 비밀입니다. 마탑주님께 또 들키면 무조건 징계 아니면 축출이에요. 아, 그리고 시간제한도 있어요.”

“몇 분?”

“5분이요. 이제 4분 정도 남았겠네요.”

“…….”

제발 그런 건 빨리 말하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