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토파즈는 어둠 속에서 정확히 목표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단칼에 절명한 마법사가 침상으로 고꾸라졌다. 풀썩, 작은 소리만이 캄캄한 막사 안을 울렸다.
“여섯 명째인가요?”
“그래.”
토파즈는 뒤에서 묻는 목소리에 짧게 대꾸한 뒤 쓰러진 마법사의 몸을 뒤졌다. 머리칼을 걷어내자 이마에 새카만 별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흑마법사 단체 ‘요람’의 문양이었다.
“욱. 여기도 있네요.”
토파즈와 함께 움직이던 마탑 소속 마법사, 노아 슐츠가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피로 그린 마법진과 그 위에 달랑 놓인 손목 따위를 보고 나서였다.
카르옌이 적진에 심어 놓은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 전 제국군 진영에 검은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마법사들이 합류했다고 했다. 수도 마법사단도, 마탑 소속도 아닌 그들은 기이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개입 이후 전쟁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크게 승리할 때도 있었고 패배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때든 등 뒤에는 시체가 쌓였다. 이대로라면 양측 모두의 피해가 커질 뿐이었다.
토파즈가 몰래 적진으로 숨어 들어가 마법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했을 때, 카르옌은 당연하게도 극구 반대했다.
‘대체 왜 토파즈님이 가셔야 합니까?’
‘내가 가는 게 제일 성공 확률이 높으니까.’
이 작전에는 똑같은 복장을 하고 숨어 있을 마법사를 구분해낼 수 있으면서, 눈에 띄지 않게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가 필요했다. 토파즈보다 더한 적임자는 없었다.
‘다른 이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아군에 뛰어난 정예 검사가 토파즈님 한 명뿐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걔네가 남의 집에 잠입해 본 경험이 몇 번이나 있겠어. 난 비슷한 임무 많이 맡아 봤고, 실패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하지만 그게 전쟁터이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토파즈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카르옌이 얼굴을 굳혔다. 토파즈가 손을 뻗어 그 턱 끝을 툭 건드렸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슨 수든 쓰겠다며.’
‘네. 당신을 희생하는 것만 빼고요.’
힘없이 읊조리던 카르옌이 무슨 생각을 해냈는지 곧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어요.’
‘미쳤어? 목을 내놓고 다니는 수장이 어디 있어. 그리고 네가 싸우면 너무 눈에 띄잖아.’
‘하지만…….’
‘넌 얌전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해.’
마법사 한 명 한 명은 일반 병사 한 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한 명이라도 제거에 성공한다면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테다. 물론 다소 위험을 무릅써야 하겠지만, 여러 손익을 따져 보아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토파즈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카르옌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토파즈가 마법사의 막사를 막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천막 너머에서 횃불이 일렁였다. 토파즈는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쥐새끼가 숨어들었어. 저쪽 막사에 시체가…….”
“마법사들을 보호하고 그놈들을 당장 붙잡아.”
은밀히 지시를 주고받는 제국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들킨 것 같은데.”
“들켰다고요?”
이 와중에도 구석에서 흑마법 실험의 증거 따위를 채취하고 있던 마탑 마법사, 노아 슐츠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다시 공간 이동 준비해.”
토파즈는 카르옌이 아닌 마법사는 마법을 쓰려면 길든 짧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어렵게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노아 슐츠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멍청……?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신선하네요.”
“그 잘난 머리통 여기다 두고 가고 싶으면 계속 헛소리하고.”
토파즈의 말에 목만 이곳에 두고 가는 상상을 한 건지 노아 슐츠가 메슥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으니까 제 목은 지켜주세요. 보시다시피 마법사 중에서는 드문 미모라서요.”
저 말 많은 입을 좀 틀어막고 싶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방해받지 않으려면 일단 제국군이 쳐 놓은 결계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에, 토파즈는 노아 슐츠의 뒷덜미를 잡아채 막사를 빠져나왔다.
여기저기를 수색하는 제국군의 군화 소리를 피해 움직이는데 오른편의 방책(防柵) 너머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두 사람은 제국군의 옷을 입어 위장하고 있었으나, 혹시 낯선 얼굴임을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빠르게 발을 돌린 토파즈가 눈앞에 보이는 막사의 휘장을 열어젖혔다.
“누구……!”
침상에 누워 있던 막사 주인이 찬 공기와 함께 들이닥친 침입자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토파즈는 그자가 마법사임을 알아보고 검을 고쳐 쥐었다.
“흙을 삼킨 혀는 말이 없으니.”
그러나 토파즈가 나서는 것보다 노아 슐츠의 마법이 조금 더 빠르게 닿았다. 토파즈는 주문을 외우고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노아 슐츠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라도 데려가세요.’
카르옌이 고민 끝에 동행할 마법사를 붙여 주겠다며 노아 슐츠를 들이밀었을 때, 토파즈는 ‘진심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란이 괴짜라고 공언한 마탑 소속 마법사, 노아 슐츠는 키는 제법 컸지만 무예를 익힌 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빼빼 말라 허약해 보이는 데다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띌 것 같은 화려한 분홍색이었다. 자연적으로 나오는 색은 아니니 일부러 염색한 것일 테지.
‘저 독버섯 같은 머리통 바꿔 달 거 아니면 못 데려가.’
‘독버섯? 꽤 귀여운 작명이네요.’
노아 슐츠가 제 머리칼을 긁적이며 헤실거렸다.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이며 토파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저 정신없는 머리 색을 보니 누군지 기억났는데, 놀랍게도 실력은 꽤 봐줄 만합니다.’
‘전하만 없었으면 제가 수석이었죠. 물론 저는 전하 없이 수석을 차지하는 것보다 전하 옆에서 차석에 머무르는 것이 더 좋았답니다. 아직도 동료 마법사들에게 2황자 전하와 동기라고 자랑하는 기분이 꽤 짜릿해서요. 그런데 왜 두 분만 그렇게 속닥이세요? 저도 끼워 주시면 안 되나요?’
‘응, 안 돼.’
‘전하는 오랜만에 뵈어도 얼음처럼 차가우시네요.’
‘아는 척이 심하군.’
……마법부 첫 번째 미친놈과 두 번째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았나. 둘이 나란히 수석이랑 차석이었다는 거야?
노아 슐츠는 토파즈와 함께 잠입하기로 결정된 뒤에도 치렁치렁한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미련을 흘렸다.
‘그런데 머리 색을 꼭 바꿔야 하나요? 이 분홍색 머리칼은 ‘마탑 수석 마법사 노아’의 상징인데…….’
‘다시는 염색할 필요 없도록 도와주기 전에 입 좀 다물어.’
그는 머리를 박박 밀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고 나서야 질겁한 얼굴로 머리 색을 검게 바꾸었다.
‘감히 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토파즈님께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이상한 놈인데 또 마법은 곧잘 썼다. 토파즈는 황립 아카데미에서는 미친 순서대로 성적을 주는 게 틀림없다는 가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토파즈는 노아 슐츠의 마법으로 입이 틀어막힌 막사 주인이 버둥거리며 수인을 맺는 것을 보고 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마침 그의 목덜미에서 요람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실험을 일삼고, 사람 생명을 제 마법의 도구로 쓰던 흑마법사를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은 토파즈에게 남은 마지막 자비였다.
한 번에 숨통을 끊는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2황자군의 머리 위로 불덩이를 날려 댄 마법사 중에 이 자도 있었을까.
그러나 토파즈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서로 죽고 죽여야 끝나는 전쟁에서 복수만큼 무용한 것이 있을까.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연인을 죽인 철천지원수일 것이다.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자신이 전장으로 이끌어 죽게 만든 것 같은 소년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짧은 상념에 빠져 있던 탓일까. 토파즈는 탐지 마법으로 막사 밖을 살피던 노아 슐츠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몸을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노아 슐츠의 목에 들이밀어진 단도였다. 노아 슐츠는 살려달라는 말 대신 곤란한 낯으로 웃었다.
“무기 버려. 동료 목 날아가는 꼴 보기 싫으면.”
토파즈는 검을 버리고 양손을 천천히 어깨 옆으로 들어 올렸다. 곧 머리를 내려치는 둔탁한 타격음이 막사 안을 울렸다.
* * *
“이쪽은 마법사 같고, 이쪽도 정예 검사일지 모르니 둘 다 채워요.”
노아 슐츠의 목에 검을 들이민 병사의 뒤로 또 한 명이 걸어들어와 명령을 내렸다. 검은 로브를 쓴 마법사였다. 이 막사 안에 놓인 침상은 두 개였는데, 빈 침상인 줄 알았던 곳의 주인이 바로 그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막사 구석에 무릎 꿇려진 토파즈는 제 손목을 감싼 마나 구속구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전과 달리 최신식 마나 구속구라 양 손목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다는 점은 전보다 더 나빴다.
머리를 얻어맞았음에도 기절하지 않은 토파즈는 상대가 정예 검사가 아닌 일반 검사임을 알아챘지만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피던 토파즈는 후드를 뒤로 젖혀 드러난 마법사의 얼굴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익숙하진 않아도, 분명 어디선가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평범한 인상이었기 때문에 긴가민가했으나 빗장뼈 부근에 슬쩍 보이는 요람의 표식을 보자 기억이 떠올랐다.
양탄자 공장 뒤편 언덕에서 토파즈 일행에게 검은 로브를 빼앗겼던 두 명의 흑마법사 중 하나였다.
“어딜 건방지게 눈깔을 굴려.”
토파즈의 앞에 선 병사가 주먹을 휘둘렀다. 퍽! 토파즈의 턱이 저항 없이 돌아갔다.
“이름이 뭐야? 너희 말고 또 몇 명이 쥐새끼처럼 숨어들었지?”
토파즈가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주먹질이 이어졌다. 마나 구속구를 차고 있었던 탓에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어진 토파즈의 입가가 터졌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다쳐서 돌아오시면 평생 원망할 겁니다.’
마지못해 토파즈를 적진으로 보내며 카르옌이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걱정으로 일렁이던 푸른 눈동자도 함께.
……평생 원망받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