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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92)화 (92/110)

#092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던 토파즈는 문득 제 귀를 조물거리는 손끝이 평소처럼 서늘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붉은 카르옌의 뺨을 바라보았다. 저 홧홧함은 그저 흥분의 여파일까?

토파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카르옌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카르옌이 두 눈을 꼭 감으며 얼굴을 내맡겼다. 토파즈는 금방이라도 어린 짐승처럼 온순히 뺨을 비비적거릴 것 같은 얼굴에 대고 선고했다.

“너 이마가 뜨거운데. 열 나.”

“아……. 아까 조금 무리해서 그런가 보네요.”

봉인석 절반을 부숴낸 이후 카르옌은 이전에 비하면 손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법을 쓴 이후 몸을 옥죄어 오는 반동, 즉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토파즈는 아까 마법을 쓴 뒤 휘청거리던 카르옌의 모습을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왜 너 혼자 그렇게 무리하는데? 모두 널 돕지 못해 안달이잖아.”

내전이 펼쳐지면 황궁 밖에 있는 카르옌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황궁 밖에서도 금세 세력을 응집했다. 평소 그를 지지하던 가문은 물론, 반역자라는 혐의를 쓰고 있음에도 결국에는 카르옌이 승리할 것이라고 관측하는 이들이 앞다투어 힘을 보태 왔다.

토파즈가 보기에 그들 중 일부는 광신도나 다름없었다. 예언을 맹신하며, 카르옌을 옥좌에 앉히기 위해 안달 난 광신도.

카르옌을 필두로 한 마법사들이 압도적인 마법을 보여 줄 때마다 아군의 사기가 높아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카르옌은 훌륭한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명분이자 원인, 목적이었다.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카르옌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카르옌이 제 뺨을 감싼 토파즈의 손을 부드럽게 덮었다.

“저는 이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저의 힘으로.”

“넌 신이 아니야. 한 사람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어.”

토파즈가 단호히 말했고, 카르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모두가 저의 힘으로 이겼다고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는 없으니까요. 누구도 저라는 사람에 대한 호의만으로 목숨을 걸고, 병력과 물자를 베풀지 않습니다.”

카르옌이 손을 뻗어 토파즈의 눈썹뼈를 문질렀다. 툭 튀어나온 뼈를 쓰다듬는 손길이 세상에 유일한 것을 만지듯 애틋했다.

“토파즈님, 당신을 제외하면요.”

“…….”

그 순간 토파즈는 카르옌이 품고 살아 온 고독을 한 조각 엿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내 호의에는 정말 대가가 없을까? 어쩌면 그 대가가 너무 커서, 차마 달라고 입 밖에 내지도 못한 것은 아닐까.

“하란과 메르디나조차 그들의 가문을, 입지를, 미래를 고려합니다. 나중에 제가 진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지금 2황자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가장 쉽게 저의 적이 될 겁니다. 내전 승리에 본인의 기여도가 얼마나 되는지 나열하며 뭐 하나라도 더 뜯어 가려 애쓰겠죠.”

차라리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몰라도, 되어 놓고 그런 식으로 휘둘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며 카르옌이 읊조렸다.

“그러니 그들이 저를 도와줘서 이기는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차피 승리할 것이고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충실히 뒤따랐을 뿐. 감히 승리의 주도권을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용병 토파즈는 늘 전쟁에서의 승리와 생존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긴다고 끝이 아닌 것이다. 치열한 전쟁조차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황자 카르예니프는 그 뒤에 몰아쳐 올 일들까지 안배해야 했다. 지독히도 길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것이 끔찍이 싫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필요해졌으니 우습지 않습니까.”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가여울 뿐. 한낱 용병이 존귀한 황제가 될 이를 가여워하다니 이거야말로 우스운 생각이겠지.

그러나 암살자에게 쫓기다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고 눈을 빛내던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토파즈는, 영원히 이 불합리한 연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마탑 마법사들의 속내는 투명한 편입니다. 마탑에서는 예전부터 끈질기게 제게 손을 내밀었거든요. 그들의 머릿속에는 정치도, 신분도, 종교도 없습니다. 그저 마법에 미쳐 있는 인간들이라서요.”

“그럼 그들이 널 돕겠다고 찾아온 이유는 네가 마법사라서야?”

“네. 그들의 기준에서는 뛰어난 마법사가 황제가 되는 게 마땅하니까요. 아마 이 나라에 마법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 손잡으려고?”

마탑과 손잡을 것이냐고 물었는데, 카르옌은 애꿎은 토파즈의 손만 주물거렸다. 두 손의 체온이 점차 같아졌다.

“저는 이 전쟁으로 마법의 위대함 따위를 증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진짜 위대한지 어떤지도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카르옌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착각하게 둬서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전쟁은 짧을수록 좋으니까요.”

* * *

그러나 전쟁은 좀처럼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불에 타 새카맣게 그을린 들판 너머로 억누른 울음소리가 흘러넘쳤다.

대패했다. 그 짧고 건조한 문장이 다 담지 못하는 참담함이 그곳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때, 병사들의 머리 위로 불붙은 돌덩이가 쏟아졌다. 투석기 따위로 쏘아 올린 돌이 아닌 마법이었다.

쾅, 콰앙! 마법사들이 서둘러 방어막을 펼쳤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돌덩이에 얻어맞은 방어막은 차례차례 깨졌다. 병사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려 돌덩이를 쳐내고 피했지만 불이 옮겨붙은 들판은 금세 시뻘겋게 타들어 갔다.

그 전장에는 아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군과 뒤엉켜 싸우던 제국군도 있었으나 불덩이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쏟아졌다. 제국군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카르옌이 직접 방어막을 펼친 최전선을 제외하면 모두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는데 특히 아군 진영 후방에 있던 병사들의 피해가 컸다. 2황자군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전투 마법사라 후방보다 선두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제국군 마법사들은 대부분 보조나 치유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이었다. 그들도 전투 마법을 활용하는 전술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의 역습을 각오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적진 내부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아군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방향으로.

차라리 전쟁이 체스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명 한 명의 군사가 그저 나무를 깎아 만든 기물이었더라면, 그들의 목숨이 이토록 아깝지는 않았을 텐데.

전사자를 수습해 놓은 곳을 따라 걷다 보면 자꾸만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수년 전에도 함께 싸웠던 동료 용병, 미리암에 연인을 두고 왔다던 병사, 엊그제 토파즈의 부상을 치유해 준 간호병, 승리 후 웃으며 술잔을 나눴던 기사. 그리고…….

토파즈는 그 사이에서 앳된 소년의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칼은 불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가넷님!’하고 불러올 것 같았으나 소년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전쟁 내내 토파즈를 유독 따르던 소년 병사, 얀이었다.

‘원래 가넷님을 동경해서 검을 배우려고 했었는데, 제가 검에는 재능이 없더라고요.’

‘부모님은 카샤프에서 과일 가게를 하세요. 얼굴을 못 뵌 지 3년이나 되었네요.’

‘그럼 ‘가넷’은 가명이신 거죠? 네? 동생 분의 이름이라고요? 우애가 정말 깊으신가 봐요.’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토파즈는 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뻗어 뺨을 닦아내자 까만 그을음이 묻어났다.

감히 다행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시신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들이 지나온 벌판에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이 굴러다녔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도 없이 뒤엉킨 시신들은 모두 깊은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히거나 태워지리라.

길게 애도하지도 못하는 죽음. 이런 죽음이 숱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잊을 뻔했던 감정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토파즈는 망토를 벗어 소년의 몸을 덮어 주었다. 불에 처참하게 녹아내린 다리와 활을 쥐느라 부르튼 손끝이 관 대신 검은 망토에 덮였다. 차게 굳은 몸이 다시 따뜻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국가가 선전하는 위대한 희생, 영광된 승리 따위는 없다. 승리가 아무리 거룩하다 해도 그 영광은 땅속에 파묻힌 유해까지 닿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이곳이 누군가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조차 잊힐 테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토파즈는 살아남은 이들은 동료의 무덤을 뒤로하고 다시 싸워야 했다. 늘 그랬듯이.

이런 전장이 너무 지긋지긋해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왜 또 검을 들고 있는 걸까.

토파즈의 텅 빈 시선이 허공을 헤맬 때였다. 뒤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토파즈님.”

토파즈가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금발과 땀에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너 때문이다. 눈 앞에 펼쳐진 수백, 수천 명의 죽음보다 너 하나의 죽음이 더 두렵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 영원히 안온한 곳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네 발밑에 시체를 쌓아 올려 줄 수도 있었다.

이 이기적인 소망에 이름을 붙일 수가 있다면…….

“토파즈님.”

재차 호명한 카르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역시 토파즈의 곁을 쫓아다니던 소년 병사의 얼굴을 알아본 기색이었다.

잿가루와 먼지로 가득한 땅에 카르옌이 무릎을 꿇었다. 귀한 무릎에 먼지 한 톨 묻을까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보면 기함할 일이었으나, 그는 거리낌 없이 제 망토를 벗어 토파즈에게 둘러주었다. 피처럼 붉은 망토 끝단이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끌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더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제발. 이어진 속삭임은 애원에 가까웠다. 얼어붙은 어깨를 감싸 안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너는 그 소망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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