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아, 토파즈님.”
얼굴을 굳히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던 놈이 토파즈와 눈을 마주치고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새벽부터 제대로 쉬지 못해서일까. 꼭 데친 양상추처럼 희멀건 얼굴이었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래.”
“기분 좋네요.”
남의 막사에 멋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카르옌은 연신 생글거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웃음 한 번에 꽃처럼 피어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 읽은 기사의 표제가 저절로 떠올랐다.
[2황자 미모의 비결은 규칙적인 수면]
……매일 겨우 3시간쯤 자는 것도 규칙적이라면 규칙적이지.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일반 병사와 황자의 처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카르옌은 개인 목욕 시설까지 갖춰진 가장 넓고 따뜻한 막사에서 묵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막사를 빠져나와 토파즈의 좁고 딱딱한 침상을 파고들고는 했다.
하란에게 배정된 개인 막사를 함께 사용하는 토파즈는 잠결에 검을 뽑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침입자의 걸음 소리만 듣고도 태연하게 담요를 둘둘 말아 베개를 만들어 주는 경지가 되었지만.
‘위험하게 밤중에 혼자 움직이고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토파즈님이라도 옆에 계셔야 잠이 오는걸요.’
‘…….’
그 말이 그저 엄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뒤로는 토파즈가 먼저 그의 막사로 찾아가는 일도 잦아졌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꼭 남의 몸을 팔로 칭칭 감고 있는 카르옌 덕분에 ‘내 막사에서 뭣들 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막사 주인, 하란의 눈치가 보인 탓도 있었다.
“마탑에서 찾아왔다는 이들은 어떻게 했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마나 구속구를 채워서 잘 격리해 두었습니다.”
“……그거 그냥 가둬 놨다는 소리잖아.”
“식사도 챙겨 주고 편안한 잠자리도 마련해 줬는걸요? 나중에 손을 잡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망토와 가죽 갑옷을 툭툭 벗어 던진 카르옌이 가볍게 ‘청결’ 마법을 써서 먼지를 씻어냈다. 그리고 막사 구석에 놓인 침대로 척척 걸어왔다. 침대에 앉은 토파즈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그중에 네 친구도 있다지 않았어?”
“설마요. 저는 친구 없었습니다.”
카르옌이 빙긋 웃으며 토파즈의 뺨에 손을 내렸다. 부드러운 손끝이 뺨과 턱을 멋대로 어루만졌다. 은근한 속삭임이 뒤따랐다.
“늘 짝사랑 상대를 그리워하느라 주변으로 눈길을 돌릴 여력이 없었거든요.”
“…….”
토파즈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들은 얘기랑은 좀 다른데.”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허리를 숙인 카르옌이 붉은 머리칼을 쥐었다. 그 끝에 입을 맞춰 오는 몸짓은 가히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묘한 간질거림을 손톱 끝으로 이불을 긁어 떨쳐낸 토파즈가 짧게 대답했다.
“2황자가 문란하다고.”
“…….”
잠시 미간을 좁혔던 카르옌이 토파즈와 눈을 마주한 뒤 픽 웃었다.
“감히 어떤 입이 거짓된 말로 토파즈님을 현혹했습니까?”
물론 2황자를 향해 감히 ‘문란하다’고 표현한 사람은 없었으나, 토파즈의 귀에는 대충 그렇게 들렸다.
“염문설이 잦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릴 때부터 혼담도 몇 번이나 오갔고.”
“아, 그거.”
카르옌이 낮게 탄식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삐딱한 미소를 걸고 있던 것은 착각이었다는 듯 금세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자쯤 되면 무도회에서 춤 한 번만 춰도 다음 날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비록 천재 마법사라 하나, 촉새 같은 인간들의 입을 모두 틀어막을 능력은 없었답니다.”
춤은 췄다는 얘기네. 무심코 생각하는데 카르옌이 마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아. 앞으로는 춤도 추지 말까요?”
“…….”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저의 순정을 의심받다니 몹시 억울하네요. 토파즈님이 어린 저를 홀려낸 이후로 저는 토파즈님밖에 모르는 몸이 되었답니다.”
듣다 보니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관이었다.
“내가 언제 널…….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듣는 사람들 오해하게.”
“오해라니요?”
카르옌이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토파즈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팍에 얹으며 웃었다.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한 미소였다.
“제가 토파즈님만을 바라본 것은 엄연한 진실인걸요. 저는 신 앞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몹시 정결한 몸이랍니다.”
“……미친놈…….”
토파즈가 중얼거렸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아 버렸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됐다고 말할 틈도 없이, 침대를 짚고 있던 손 위로 카르옌의 손이 겹쳐졌다. 반대편 손이 목덜미를 쥐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마 밀어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곧 뜨거운 입술이 포개지며 여린 살갗과 숨결이 스쳤다.
……언제부터 입맞춤 정도는 쉽게 받아주게 되었더라.
악몽을 꾼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침상 옆을 파고든 그가 ‘재워 달라’며 안겨 왔을 때부터? 아니면 전장에서 만난 옛 동료들을 제 손으로 죽인 토파즈에게 그가 달래듯 입술을 맞댔을 때부터였던가. 처음에는 입술이 스치기만 해도 손을 떨던 게, 이제는 고개를 꺾어 깊이 입 맞추기까지 한다.
멍하니 기억을 되짚던 토파즈가 움찔했다. 목덜미를 붙들고 있던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아프지 않게 당겼다.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 벌어진 틈새로 뜨거운 덩어리가 밀려 들어왔다.
“……!”
늘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입술만 문지르다가 물러나고는 했었는데, 혀가 파고든 것은 처음이었다.
무작정 밀어붙이기만 하는 키스에서는 해묵은 갈증이 느껴졌다. 숨 쉴 여유조차 주지 않는 갈급함이 토파즈의 몸을 뒤로 떠밀었다. 토파즈는 저를 자꾸만 뒤로 미는 카르옌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단숨에 위아래를 뒤집었다.
풀썩, 카르옌의 머리가 침대에 닿았다. 검은 시트 위로 금빛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인 황자는 한 손으로 제압당했음에도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다. 새빨간 혀를 내어 그만큼 빨간 입술을 슬쩍 핥아 올릴 뿐이었다.
토파즈는 시트를 그러쥐었다가 결국 먼저 고개를 숙였다. 카르옌이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뻗어 토파즈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귓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혀가 뒤엉켰다. 조금 전처럼 급하지 않고 느릿했으나 그래서 더욱 끈적하게 느껴지는 키스였다. 얇은 시트를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서로의 옷깃이 스쳤다.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뜨거운 숨이 흘러넘쳤다.
길지 않은 입맞춤 끝에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
카르옌이 눈을 내리깔며 제 입술을 매만졌다. 잔뜩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하고 흰 손끝으로 입술을 어루만지는 광경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데 카르옌이 속삭였다.
“토파즈님은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
“제가 황궁 안에 틀어박혀 떠나간 짝사랑을 그리워하는 동안, 많이 연습하셨나 봅니다.”
곱씹듯 말한 ‘연습’이라는 단어에서 힘이 느껴졌다. 저렇게 말하니 꼭 자신이 순진한 도련님을 꼬셔 놓고 내팽개친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
차마 조신하게 살아왔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문란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각지를 떠돌며 자유로운 만남을 추구하는 젊은 용병들 기준으로 보면 토파즈는 오히려 담백한 수준이었다.
저 얼굴로 이십여 년을 살아온 황자가 정숙하다는 쪽이야말로 오히려 의심스럽지 않은가. 이미 혼인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아직도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카르옌은 여기서 제 옷이라도 풀어헤칠 기세였다. 토파즈가 그 손을 잡아 가슴팍 위로 누르며 한숨을 삼켰다.
“믿어.”
혀를 섞어 본 이상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툴게 밀어붙이던 혀와 잘게 떨리던 숨, 고작 키스 한 번에 뜨거워진 몸이 모두 가르쳐 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걸 믿는 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중요합니다.”
카르옌이 웃는 얼굴로 속살거렸다.
“제 첫 입맞춤을 가져가셨으니, 그 대가로 한 번 더 해 달라고 졸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너…… 읍.”
방심한 사이 다시 한번 시야가 바뀌었다. 카르옌은 건방지게도 토파즈의 양 손목을 침대로 밀어붙이며 위로 올라탔다.
이내 입술이 거세게 부딪쳤다. 여전히 힘 조절이 능숙하지 못해 때때로 치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으나 입 안을 파고드는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카르옌은 턱을 단단히 틀어쥐고 목구멍까지 헤집을 기세로 밀어붙였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혓바닥 아래에 잔뜩 고여 혀를 얽을 때마다 물장난을 치는 것처럼 축축한 소리가 났다.
“아, 토파즈님…….”
“읏…….”
단정한 치아에 혀가 잘근 깨물렸다. 순간 아랫배가 저릿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토파즈가 고개를 돌려 입술을 떼어냈다. 맨몸으로 산 하나를 넘었대도 숨이 찰 리가 없는데, 고작 키스 한 번에 이상할 정도로 숨이 가빠 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목선이 드러나자 카르옌은 거기에도 문지르듯이 입을 맞춰 왔다. 푸른 눈동자가 몽롱한 빛을 띠었다.
“그만.”
눈이 마주치자 카르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열기를 숨기며 웃어 보였다. 그가 눈웃음치며 토파즈의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뺨과 귀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너 역시 거짓말이지.”
문란한 새끼. 읊조리자 카르옌이 낮게 목을 울려 웃었다.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천천히 뒤로 쓸어 넘겼다.
“제가 본래 배우는 속도가 빠르답니다. 다른 것도 가르쳐 주시면 잘 배울 수 있는데…….”
말끝을 흐린 그가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 덧붙였다.
“아쉽게도 장소가 적절치 못하네요.”
……지금 장소가 문제냐고. 토파즈는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장소도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고작해야 천 몇 장을 덧대어 만든 막사 바깥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을 터였다. 타인의 존재를 한번 자각하자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막히게 느껴졌다.
덩달아 미쳐 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