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90)화 (90/110)

#090

“위험하게 자꾸 불쑥 나타나지 마. 호위를 늘리든지.”

“매번 위험한 임무만 떠맡으시니 걱정되는 것을 어떡합니까.”

“여기서 쓸데없이 내 걱정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마찬가지랍니다, 토파즈님.”

……하긴. 아까 보여 준 능력을 보고도 카르옌에게 덤벼드는 간 큰 인간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아니, 그래도 세상에는 겁을 상실한 미친놈들이 많으니 안심할 수 없었다.

“아까 그 얘기는 뭔데? 너 때문에 내가 네 어둠의 비밀 결사 중 하나였다느니 이상한 헛소문이 퍼지잖아.”

토파즈의 말에 뒤따라오던 하란이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웃어라. 너도 그 구성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니까.

“토파즈님의 존재가 언제나 저를 지켜 주셨던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카르옌이 빙긋 웃으며 궤변을 지껄였다. 토파즈는 코웃음쳤다. 존재만으로 지킨다니, 그런 편리한 방패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 저 사람과 친하십니까?”

나란히 걷던 카르옌이 불쑥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누구?”

“검은 머리의 이잔이라는 남자 말입니다. 10년 전에도 시장에서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기억해?”

“제가 기억력이 제법 좋습니다.”

카르옌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널 기억 못 한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는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누군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한 기사는 엘제니아 황제 직속 친위대 소속 기사였다. 살아남은 친위대 기사 셋은 전쟁에서 늘 카르옌의 지척을 지켰고, 그를 위해 목숨을 몇 번이고 바칠 수 있다는 듯 결의에 찬 얼굴을 했다.

처음에 그들은 카르옌의 곁에 붙어 다니는 출신 모를 용병을 잔뜩 경계하고 의심했다. 대략 ‘저놈은 대체 뭔데 하늘 같으신 우리 전하의 곁에’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카르옌의 막사 앞에서 토파즈와 시비가 붙었는데,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온 카르옌이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이 혹시 황제인가?’

‘예?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나조차 그분이 가시는 앞길을 막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분의 걸음을 방해하지?’

그 싸늘한 눈길을 받은 이후 친위대 기사들은 이제는 토파즈를 막아서지 않았다. 토파즈를 대하는 태도도 한결 정중해져 받는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반면 황자가 토파즈를 ‘은인’이라고 칭하며 극진히 대할 뿐 아니라 전략 회의 따위에도 대동하니,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교들 역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카르옌은 ‘아니꼬우면 1황자한테 가서 붙든지. 근데 네가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라는 말을 몹시 우아하게 돌려 말함으로써 반발을 일축했다.

물론 그들이 토파즈의 앞에서 조용해진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전하, 아군이 아닌 마법사 두 명이 군영 근처를 기웃거리기에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저항 없이 협조했으며, 마탑주가 보내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짜 마탑 소속 마법사가 맞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탑?”

뜻밖의 이름에 카르옌이 눈썹을 까딱였다. 중립을 지킨다며 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던 이들이 아닌가.

“예. 둘 중 한 사람은 전하와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황립 아카데미 출신 마법사라는데, 이름은 노아 슐츠입니다.”

카르옌은 ‘그게 누구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옆에 서 있던 하란은 곧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얼굴을 기묘하게 찡그린 하란이 말했다.

“전하 덕분에 마법부 최고의 미친놈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던 두 번째 미친놈 말입니다.”

카르옌이 마탑 마법사들을 붙잡아 놓았다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고 토파즈가 홀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퍽! 맞은편에서 오던 기사 하나가 토파즈의 어깨를 세게 치며 지나갔다.

“……?”

그러나 정작 뒤로 밀려난 사람은 토파즈가 아니라 부딪쳐 온 본인이었다. 부딪친 어깨를 툭 털어내자 기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모욕당한 얼굴을 했다.

또군. 토파즈가 성가심에 혀를 찼다.

기사와 용병의 관계는 제국 역사상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현시대에는 가히 최악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들은 서로를 무시하며 소 닭 보듯 했다.

기사들은 용병을 ‘기사가 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되지 못한 기사 지망생’ 정도로 생각했고, 반대로 용병들은 기사를 ‘자유도 실전 경험도 없는 고리타분한 허수아비’로 취급했다.

기사들은 특히 용병의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평해지는 녹스의 용병들을 몹시 건방지며 주제를 모르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중심이 되는 ‘가넷’을 향한 반발심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어린 시절부터 보호자 하나 없이 살아남아 거친 전장에서 자란 토파즈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아주 잘 알았다. 토파즈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검 뽑아.”

“뭐?”

“검 뽑으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반말을……!”

“자신 없어?”

이런 놈들은 좋게 말해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말 백 마디보다 코를 한 번 납작 눌러 주는 것이 좋았다.

토파즈는 검을 뽑지도 않고 상대를 향해 손을 까딱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기사가 달려들었다.

잠시 후 토파즈는 상대의 코를 표현 그대로 납작 눌러 내려 앉혀 준 후, 눈물과 코피를 동시에 줄줄 흘리는 기사를 치유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에게 인도해 주었다.

“너, 너 내가 가만 안 둬……. 흐어어.”

“입 열지 마세요. 코 삐뚤어져요.”

처음 가넷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살아 계셨냐’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녹스 소속 마법사들이 토파즈를 보며 ‘여전하시네요’ 하며 힐난하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부상자가 많아서 바쁘니 사사로운 싸움질은 적당히 하시라고요!”

토파즈는 마법사의 핀잔을 가볍게 흘려보내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않고 기꺼이 코뼈를 내려 앉혀 주거나 뒤통수를 깨 주는 것. 그게 토파즈가 감히 황자의 곁에서 얼쩡거려도 무사할 수 있었던 비법 중 하나였다.

“가넷님!”

치유 막사에서 막 나온 토파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꼭 밀짚모자를 눌러쓴 것처럼 부드러운 밀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소년이 보였다.

기사들과 달리 대부분 평민 출신인 일반 병사 중에는 처음부터 토파즈에게 호의와 호기심을 품고 다가온 경우도 많았는데, 바로 눈앞의 소년이 그랬다.

“왜 거기서 나오세요? 어디 다치셨나요?”

“아니. 난 멀쩡해.”

“그럼 설마 또 누가 가넷님께 시비를 걸었나요?”

토파즈가 씩 웃기만 하자 대답을 짐작한 소년이 마치 자기 일처럼 씩씩거렸다. 열일곱 살 소년의 이름은 얀으로, 수도 출신이었다.

‘저는 일곱 살 때까지 수도 외곽지역에서 살았는데, 부모님 품에 안겨서 성벽 위를 덮치듯 날아오던 마수가 검 한 자루에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 제 가족과 이웃들은 가넷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가넷’을 동경해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던 소년은 활 솜씨가 제법 뛰어나 귀족의 눈에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귀족이 대표적인 2황자파 귀족 중 하나인 코헨 백작이었다.

처음 내전에 지원 병력으로 보내졌을 때는 꼼짝없이 죽을 각오를 했지만, 이곳에 ‘가넷’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살아서 부모님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2황자군은 열일곱 살 이상만 병사로 받고 있으니 소년은 이곳에서 가장 막내나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의 영웅이 전황을 바꿀 수 있다고 굳건히 믿을 나이.

토파즈 자신은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부터 전장을 떠돌았으면서도, 눈을 반짝이는 소년을 보고 있자면 열일곱은 무척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파즈가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눈을 크게 뜬 소년이 귓가를 붉히며 허둥거렸다. 팔에 끼고 있던 종이 뭉치가 부스럭거렸다.

“그건 뭐야?”

“아, 마을에서 구해 온 신문이에요. 심부름 다녀오던 중이라……. 가넷님도 보시겠어요?”

“그래, 고마워.”

토파즈는 신문을 받아들고 제목만 대충 훑었다.

[2황자, 간악한 흑마법으로 제국군을 몰살하다.]

[1황자는 왜 월계관을 증명하지 못하는가?]

[베로니카 황녀의 충격 증언!]

[적법한 계승자는 누구?]

[사라진 황제의 행방은…….]

[녹스의 내분. 원인은 영웅의 귀환?]

“제국에 신문사가 이렇게 많았나…….”

토파즈의 혼잣말에 소년이 재잘거렸다.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어요. 모두의 화제가 내전에 쏠려 있으니 돈이 된다나 봐요. 그래서 그런지 이런 기사를 내보내는 황색지도 다 있다니까요. 아예 연재소설을 실은 곳도 있고요.”

소년의 손끝을 따라가니 기가 막힌 문구가 쓰여 있었다.

[2황자 미모의 비결은 규칙적인 수면]

“…….”

할 말을 잃은 토파즈의 앞에서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제보자가 누굴까요? 아무튼 다들 우리 전하께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잘된 일이죠.”

그래, 잘된 일이었다. 카르옌이 도시를 지날 때마다 일부러 얼굴을 드러내고, 싸울 때는 눈에 띄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 또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약하고, 본 것을 떠들기를 좋아한다. 카르예니프는 그 존재 자체로 선전 요소가 되었다.

이 기사들만 봐도 전략은 훌륭하게 먹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카르옌의 화려한 승리가 계속되자 반역자를 타도해야 한다던 목소리는 주춤하고 그를 향한 호의 어린 관심이 이어지고 있었다.

신문을 뒤에서부터 넘기자 소년이 말한 연재 소설란이 나왔다. 무심히 지나치려던 토파즈는 믿을 수 없는 문장을 발견하고 다시 종이를 넘겼다.

[“나, 당신이 반역자라도 좋아. 우리 함께 도망치자.”]

……그래도 그렇지 이딴 글이 버젓이 나돌아도 되는 거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