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등을 맞댄 이잔의 호통에 토파즈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을 노리고 들어온 창을 피하며 상대의 심장을 꿰뚫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낼 새도 없이 또 다른 적이 눈앞에 나타났다.
“티 났어?”
“안 나서 억울하다. 여전히 귀신 같은 새끼.”
이잔의 핀잔에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본인도 4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녹슬지 않은 솜씨로 적군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가벼워진 몸놀림이었다.
그때 이잔이 베어내고 돌아선 적군 중 하나가 꿈틀거리며 다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이 전쟁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들이었다. 적군 중 일부는 잘린 팔다리를 달랑거리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달려들고는 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아군은 편의를 위해 그들을 ‘리라 병사’라고 불렀다. 겉으로 봐서는 일반 병사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그것들은 목을 완전히 잘라내야만 죽일 수 있는데, 목을 자르는 순간 리라꽃 향기가 짙게 풍겼기 때문이었다.
토파즈는 어렵지 않게 메이온의 양탄자 공장을 떠올려 냈다. 양탄자 공장의 흑마법사들이 몰두하던 연구의 성과가 바로 이 인간도 마수도 아닌 것들일까.
마수 중에도 약점을 파괴하지 않으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들이 있었는데, 저들은 사람의 겉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꼭 마수 같았다.
“뒤!”
이잔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젖힌 순간, 토파즈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창처럼 내던졌다.
푹! 미간이 정확히 꿰뚫린 리라 병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찰나의 공백이면 이잔이 검을 휘둘러 적의 목과 머리를 분리해 내기 충분했다.
검을 잃고 빈손이 된 토파즈를 향해 사방에서 공격이 쇄도했다. 토파즈는 어깨를 비틀어 가슴으로 날아드는 검을 피한 뒤 발로 상대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헉!”
비틀거리는 적의 손아귀에서 검을 빼앗는 동시에 몸을 훅 낮춰 양쪽에서 달려들던 적들이 서로를 찌르도록 만들었다. 상체만 반 바퀴 회전해 뒤로 달려드는 또 다른 적을 상대했다.
챙! 검날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으나 상대는 두 합 만에 나가떨어졌다.
“역시 내 생명의 은인.”
이잔이 감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토파즈는 때로 무모해 보일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구사하지만 실은 더없이 냉철했다.
판단이 남들보다 한발 빠르기에 과감해 보일 뿐, 결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였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이잔은 생각했다.
“안 도와줬다고 죽을 거였으면 내가 먼저 널 여기다가 묻었다.”
“안 그래도 지금 미리 땅 파 두려고.”
두 사람은 태연히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등을 맞댔다. 서로의 뒤를 맡긴 채 앞뒤로 몰려드는 적을 베어 나갔다.
아군이 퇴각하는 방향에는 산이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다급히 퇴각한 아군이 절벽 아래에서 멈춰 섰다.
그들을 구석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 1황자군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돌진했다. 함정이라는 의심을 할 법도 하건만, 경계를 품은 이들은 적었다. 산을 빙 두르듯 둘러싼 높은 절벽은 병력을 배치해 두기에는 너무나 좁고 험했기 때문이었다. 지형상 숨을 만한 곳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적들이 간과한 것은 애초에 많은 병력을 숨겨 둘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토파즈가 높다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에는 고작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토파즈는 맨 앞에 서서 붉은 망토 자락을 휘날리는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그는 일견 지루해 보일 정도로 무심한 낯빛이었다.
카르옌의 발끝에서부터 금빛 그물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함께 서 있던 마법사들이 손을 모아 주문을 외우거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물이 빛을 퍼뜨리며 영역을 넓혔다.
카르옌이 봉인 마법에 온몸이 얽매여 있을 때도 그렌로샤 숲의 마수 수십을 쓸어 버린 그 마법이었다. 봉인을 절반 풀어낸 카르옌과 뒤에서 보조하는 마법사들의 힘까지 합쳐지니 눈부신 금빛이 적군의 발밑을 덮었다.
저 아름다운 마법이 잔혹할 만치 강력한 결과를 불러올 것을 아는 토파즈마저 잠시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찬란한 빛이었다.
장엄한 광경 앞에 압도된 적군들 사이로 술렁임이 퍼졌다.
“마, 마법이야. 2황자의 마법!”
“이건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잖아…….”
‘항복한 병사의 목숨은 빼앗지 않는다.’ 2황자가 지켜 온 철칙을 떠올린 일부는 무기를 떨어뜨리며 항복하기도 했다.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것은 흑마법이다! 홀리지 말고 무기를 들어!”
“도망치는 자와 그 가족에게는 엄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진열을 가다듬어!”
지휘관들의 명령에도 혼란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슨 마법인지도 모르면서 무기를 내던지거나 무작정 뒤를 돌아 대열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탁.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르옌이 가볍게 두 손을 포갰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굉음도, 끔찍한 피바다도 없었다. 오히려 세상이 온통 고요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침묵을 깬 것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누군가의 멍한 읊조림이었다.
“말도 안 돼…….”
그물 위에 발을 딛고 있던 군사 수백 명이 사라졌다. 한 줄기 비명도 없이, 누군가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처럼 말끔하게.
무기를 버린 이들은 조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며 덜덜 떨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조준이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신이시여, 제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거나 엎드려 비는 이들의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아군마저 두려움에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토파즈는 여전히 절벽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법을 쓴 직후 카르옌이 휘청이다가 뒤에 선 이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난 마법사가 있어도 전쟁에서 단숨에 승리할 수는 없다. 마법사의 몸은 하나뿐이며, 국지전에서 승리한다 해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는 패했고 어디에서든 사람은 죽어 나갔다.
그러나 두려움은 병이 전염되듯 퍼져나간다. 제국군은 겁을 집어먹어 나날이 사기가 떨어졌고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반대로 공식적으로는 반란군으로 불리는 2황자군은 카르옌의 존재만으로 신을 등에 업은 듯 기세등등했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도 불구하고 팽팽한 접전이 이루어지는 이유였다.
이미 카르옌과 명운을 함께 하고 있던 2황자파 귀족들이나 셈 빠르게 도박을 건 이들을 제외하고도, 간을 보던 중립파 귀족이나 상인들마저 부랴부랴 카르옌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전하가 마법 쓰는 걸 보고 있으면 도무지 질 것 같은 생각이 안 든다니까?”
전쟁터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잔마저 이런 말을 할 정도니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올라 있는지는 짐작할 만했다.
토파즈는 피가 엉겨 붙은 검을 천으로 닦아내며 이 승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생각했다. 전장에는 영원한 승리도 영원한 패배도 없었으므로.
옆에서 무거운 갑옷을 툭툭 벗어 발치에 던지던 단발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안 죽었던데, 가넷.”
“너야말로. 아직 젊어서 그런가?”
토파즈의 대꾸에 페로자가 피식 웃었다. 이잔이 토파즈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끼어들었다.
“애늙은이 같은 소리 좀 그만해. 나랑 동갑인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까지 덩달아 늙은 것 같잖아. 페로자는 우리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네 살이야.”
페로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너 아직 스물다섯도 안 됐다고? 엊그제 태어났네…….”
이잔이 토파즈의 목을 조를 기세로 팔에 힘을 주며 감탄했다.
“그런데 가넷, 네가 몸을 숨긴 동안 비밀리에 2황자 전하를 지켜 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웃음기 섞인 페로자의 말에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또 터무니없는 소문이라도 퍼진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
“사실이지 않습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이잔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굳이 그 사이를 비집어 파고든 누군가 때문이었다.
누구인지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땀과 먼지 냄새를 잔뜩 묻힌 이들 사이에서 홀로 깨끗한 체향을 풍기는 이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얼굴이 코 옆에서 웃고 있었다.
“여기까진 왜 왔……. 왜 오셨습니까?”
토파즈가 묻자 카르옌이 입꼬리를 실룩였다. 토파즈가 대외적으로 존댓말을 할 때마다 ‘사이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서운하다’며 입을 비죽이는 카르옌이었다.
“가장 위험한 미끼 역할을 맡지 않으셨습니까. 무사하신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다 본인 생각해서 그러는 줄도 모르고, 그는 자꾸만 남들 앞에서도 토파즈를 극진히 대해 이상한 소문에 불씨를 붙였다. 지금도 안 그런 척 속닥거리며 지켜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뒤에 호위로 붙어 있는 하란은 다 포기한 얼굴로 토파즈를 향해 슬쩍 고갯짓했다. 차라리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는 뜻이었다. 토파즈가 한숨을 내쉬며 제 어깨를 감싼 카르옌의 손을 떼어냈다.
“이만 돌아가시죠, 전하.”
“그럴까요?”
서서히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이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2황자 전하 말이야. 자꾸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이잔, 바보 아니야? 수배지에서 봤겠지.”
페로자의 말에 이잔이 진지한 낯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저 얼굴을 알고 있었던 기분인데…….”
“네가 제국에 단 둘뿐인 황자를 어디서 봐. 지나가다가 시장에서라도 봤냐?”
“아하하, 그럴 리가 없겠지.”
웃음을 터뜨린 이잔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