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나는 황제 폐하의 신하이자 아들로서, 에델티움을 뒤흔드는 불온한 위협에 정정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다.”
황실의 각종 의례가 행해지는 클로드 홀에서 황제 대리, 레오나르드 델 카샤프의 연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단에 선 1황자의 옅은 금발 위로 빛이 둥글게 내리쬐었다. 햇빛의 각도에 맞춰 설계된 창이 만들어낸 효과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눈으로 보는 순간에는 말하는 이의 머리에 권위가 씌워지는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반구형으로 놓인 좌석 맨 앞줄에는 일리야 세이드 대공이 앉아 있었다. 세이드 대공이 황궁에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는 황자와 황녀의 친부로서 여전히 황궁에 출입할 권한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늘 수도의 저택에만 칩거하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그 남자는 알려진 악독한 성미와 달리 온화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유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낯빛을 보다 보면 ‘정말 건강이 안 좋은가?’ 싶은 우려마저 흘러나왔다. 겉과 속이 그토록 다른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세이드 대공으로부터 두 칸 떨어진 자리에는 재상이 앉아 있었다. 얼마 전, 1황자와 재상의 딸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소식이 주요 일간지 1면에 보도된 사실을 고려하면 기묘한 자리 선정이었다.
서른이 넘은 1황자는 황족의 관행을 기준으로 하면 결혼을 두 번 하고도 남았을 나이였다. 실제로 엘제니아 황제가 재혼한 나이가 고작 스물여덟이었다. 1황자가 여태껏 국혼을 진행하지 않은 이유가 외척까지 등에 업는 것을 막으려는 황제의 의도였음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반면 베로니카 황녀는 손위 형제인 1황자보다 훨씬 일찍 국혼을 치렀는데, 상대는 작위를 돈으로 샀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작가의 아들이었다. 황녀가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황제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 국혼의 성사 여부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았다. 황녀가 데려온 상대가 조금이라도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더라면 오히려 맺어지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그만큼 황제의 의중은 명확히 2황자를 향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황태자 책봉을 준비하던 때가 엊그제가 아닌가.
그러니 더더욱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되었을 2황자 카르예니프가 대체 왜 반역을 일으켰는지.
“설마 2황자가 흑마법사였다니,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이유도 흑마법의 부작용이라면서요?”
“황태자 책봉식이 갑자기 미뤄진 이유도 황제 폐하께 흑마법을 쓴 사실을 들켜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그렇게 분노하시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궁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랍니다.”
“저도 은밀한 소식통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현명하신 황제 폐하께서 요양이라는 핑계로 유배를 보내려고 했더니, 초조해진 2황자가 앙심을 품고 감히 역모를…….”
“사실 저는 진작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간교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그런 마법을 부리겠습니까? 에페르테 폐하의 환생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황자파 귀족들이 들으라는 듯 속닥거렸다. 슬쩍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2황자의 반역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며 반발하고 나선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 역모에 가담했을 것이 의심된다며 자택에 연금당했기 때문이었다.
역모라는 이름은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혐의를 뒤집어쓰는 순간 가문의 존폐가 위태로워지니 아무리 권세가 대단한 집안이라 해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수도 기사단이 출입문을 굳게 지키며 홀 내부를 날 선 눈길로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도 수비군 총대장, 헤카베는 짧게 혀를 찼다. 수도 기사단은 완전히 1황자 편에 붙었군.
반면 수도 마법사단 제복을 입은 마법사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제 수도 마법사단 단장이 모종의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제 친부를…….”
“그럼 이 황궁 내에 로디언 경을 해할 만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또 있단 말이오? 인간의 규격을 벗어난 자에게 천륜을 논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지.”
위대한 마법사라는 이유로 찬양받던 황자가 도리어 마법에 발목이 잡힐 줄이야. 헤카베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쨌든 증거가 한둘이 아니지 않소.”
그 말이 사실이었다. 2황자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증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황제궁을 지키던 위병 셋이 그날 밤 급하게 황제궁을 빠져나가는 2황자를 보았다고 증언했고, 황제의 혈흔 위에서 단추 하나가 발견되었다. 황실 재단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지난 2황자의 탄신연에 황제가 직접 하사한 사파이어를 가공해 만든 단추로, 2황자의 예복에 매단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국서의 시신에서 발견된 흑마법의 흔적도 2황자의 혐의에 쐐기를 박았다. 황립 아카데미 학장인 데네브가 그에 관해 항의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데네브는 교수 시절 2황자와 사제의 연을 맺은 자였으므로 그의 말은 이 시점에서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었다.
발견된 증거들은 명백한 증거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나 섣불리 거짓이라고 주장하기에도 부담스러웠다. 누군가 정확히 그 지점을 의도한 것 같았다.
설령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다. 반역을 도모했고 기회를 얻었는데 왜 황제를 죽이지 않고 납치를 했단 말인가? 황녀가 동복형제인 1황자를 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2황자의 편에 선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 속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기만 한 사람이 있었다. 헤카베는 고개를 들어 연단 위의 1황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시대의 명령이니! 우리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코 타협하지 않으리라.”
위엄 있는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좌중을 휘어잡듯 손을 휘두른 1황자의 손끝에서 금빛 반지가 반짝였다. 잘 준비된 연극 같은 무대였다.
진정 수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멍청한 자이리라.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속이 시커먼 이들 중 그렇게까지 머리 나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있다면 진작 다른 이의 발밑에 밟혀 사라졌을 테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오해를 사거나 앞일을 가늠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는 이들이 반,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1황자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며 떠들어 대는 이들이 반이었다.
2황자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이미 세이드 대공에게 줄을 대고 약점을 내준 귀족들은 이제 와서 노선을 갈아타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2황자가 황제가 되어 황권이 더 강화될 것을 내심 꺼리는 신관들도, 축복을 타고났다고는 하나 병약하다고 알려진 2황자에게 미래를 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관료들도 있었다.
속을 모르도록 입을 다물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평소 능구렁이로 잘 알려진 아히네스 백작 같은 자들이었다. 아히네스 백작의 막내아들이 2황자의 최측근이며, 도주할 때 함께 사라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도 백작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낯짝이었다.
홀 내부는 조용했으나 들어앉은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각자 치열한 계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쨌든 황제는 생사조차 불명확했고, 국서는 죽었으며 황녀마저 사라졌다. 1황자 레오나르드는 황위 계승 순위에 따라 적법한 절차로 황제 대리가 되었다.
한평생 타인의 명령을 따르며 살아온,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 없다는 소리를 듣는 헤카베였다. 그는 그 이상의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자신 같은 검 한 자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헤카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제국력 1022년. 기사 스물과 마법사 다섯, 병사 1천여 명이 미리암 공작의 성을 둘러쌌다. 늘 ‘카샤프’의 가장 큰 우군이었던 미리암 영지에서 황가와 충돌이 일어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1황자 레오나르드는 황제 대리의 이름으로 ‘반역자 2황자는 황제 폐하를 놓아주고 투항하라’는 요지의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미리암 공작은 그에 답하는 대신 굳게 성문을 닫는다.
성의 위와 아래에서 수많은 활과 창, 검 끝이 서로를 겨누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성이 이어지던 때였다.
높고 새하얀 성벽 위로 누군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사람은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2황자였다.
‘카샤프의 적법한 후계자는 나,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다. 1황자가 진정 황제 폐하의 유지를 전해 들었다면 월계관을 머리에 써 증명하라.’
바로 옆에서 말을 거는 듯 고요한 목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땅 위에 울려 퍼졌다.
수백 개의 화살과 다섯 마법사의 공격이 일시에 2황자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2황자의 옷깃을 스치지 못하였다.
흰옷을 입은 2황자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휘장을 끌어당기듯 손목을 휘감았다.
황금빛 번개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천지가 뒤흔들렸다. 마치 신벌(神罰)과 같은 광경에 아군과 적군이 함께 두려움에 떨었다.
내전의 서막이 오름과 동시에 2황자가 거머쥔 첫 승기였다.]
* * *
동이 틀 무렵이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새보다 더 일찍 아침을 일깨웠다.
적군이 새카맣게 몰려왔다. 토파즈가 이끄는 아군의 숫자는 적군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앞뒤로 둘러싸일 것이었다. 토파즈는 전장의 흐름을 주시하다가 명했다.
“이잔, 너와 내가 좌측으로 퇴로를 뚫는다. 페로자는 후방을 지켜.”
“옙.”
퇴각하라! 퇴각하라! 명령을 전하는 소리가 다급히 울려 퍼졌다. 아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대부분 노련한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진열이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퇴각 명령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토파즈가 있었다. 토파즈는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날렵한 검 끝이 적들의 갑옷과 살갗을 꿰뚫었다. 붉은 머리칼 위로 피가 튀었다.
검을 맞댄 적군 가운데에는 목에 익숙한 용병패를 걸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녹스의 용병들이었다.
같은 녹스의 이름을 걸고서도 다른 옷을 입고 검을 맞대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토파즈로서는 착잡한 광경이었다.
녹스의 분란은 ‘가넷’이 살아 있다는 소식 한 줄에서 시작되었다. 길드장인 탄자가 가넷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그의 죽음을 꾸며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내부에 파란이 일어났다.
본래 녹스는 제국군, 즉 1황자군과 계약을 맺고 세력을 보태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잔을 비롯해 길드 내에서 발언권이 큰 간부 몇몇이 휘하의 용병들을 이끌고 탄자에게 반기를 들었다.
녹스 마법사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던 베릴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알려지며 녹스 소속 마법사들도 대부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탄자의 명령에 따라 제국군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선언했다. ‘가넷’의 편에 서겠다는 것이었다.
중앙 지부에서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며 그들 모두의 녹스 용병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날뛰었고, 이잔은 코웃음을 치며 제 용병패를 반으로 부수어 중앙으로 보냈다.
‘하여튼 성질머리 못 죽여…….’
그게 그렇게 쉽게 부서지는 물건이 아닌데 말이다.
사실 토파즈로서는 자신이 탄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내부의 갈등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한때 버렸던 위명이라도 도로 주워 용병들을 설득할 속셈이 있긴 했으나, 고작해야 일부에 불과할 줄 알았지 녹스를 이렇게까지 반으로 똑 잘라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들 알게 모르게 탄자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가넷, 너 지금 딴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