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어둑한 오두막 안, 빛이라고는 책상 위의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세찬 바람에 문이 덜컹거렸다. 벽난로를 때고 있음에도 공기는 쉽게 훈훈해지지 않았다.
“토파즈님, 지난번처럼 팔베개해 주시면 안 되나요?”
침대 옆을 차지하고 누운 카르옌이 이불을 턱 끝까지 뒤집어쓰며 속살거렸다.
“네가 아직도 꼬맹이인 줄 알아? 무거워서 팔 저려.”
“그럼 제가 해 드릴게요. 제 팔 튼튼해요.”
“필요 없어.”
네 팔이 아무리 튼튼해 봐야 나만 할까. 매정하게 거절하자 카르옌이 한쪽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귀여우시긴.”
“……너 돌았어?”
“조금쯤은요.”
경악하며 묻는데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순순히 인정하니까 더 미친놈 같았다. 꾸물꾸물 옆구리를 파고든 카르옌은 그치지 않고 수작질을 펼쳐 댔다.
“춥지 않으세요?”
“추위 안 탄다고 했지. 내가 이 숲에서 겨울을 몇 달이나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는 탑니다…….”
카르옌이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양손으로 이불을 꼭 쥔 채 올려다보는 얼굴은 없던 죄책감도 자극할 정도로 처량해 보였다.
“네가 잘하는 마법 쓰든가.”
“그러다 또 통제 못 하면 오두막 지붕이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럼 저희는 이 추운 날 노숙을 해야겠죠?”
“…….”
가히 협박에 가까운 투정이었다.
결국 토파즈는 카르옌에게 팔 한쪽을 내어 주었다. 카르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냉큼 베어 왔다. 토파즈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침대가 하나뿐인 집이라지만, 제게 구애하는 여섯 살 어린 남자와 한 침대에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예전에도 함께 잠든 적은 숱하게 있었다. 숲에서 처음 만난 날에도 이 침대에서 재워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는 숲을 헤매던 여우 한 마리를 재워 주는 정도의 호의일 뿐이었다. 지금은…….
토파즈는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후회했다. 쭉 이곳을 보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팔을 베고 누운 카르옌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스칠 거리였다.
카르옌이 한 손을 뻗었다. 장난치듯 손안에서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던 손길이 이마로, 귀로 느릿하게 내려왔다.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는 서늘한 손에 어깨가 굳었다.
오두막 밖은 눈 쌓이는 소리마저 없이 조용했다. 귓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벽난로가 타오르는 소리와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카르옌이 눈을 내리뜨며 낮게 속삭였다.
“입 맞춰도 되나요?”
“……지금은 응급 상황이 아닌데.”
“네. 저도 잘 압니다.”
지나칠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가 긍정했다.
“내가 너랑 그런 걸 왜 해.”
“아까는 토파즈님이 먼저 제 입술을 훔치셨잖아요.”
“그렇게라도 해야 네가 정신을 차릴 것 같았으니까.”
“거짓말.”
낮게 웃은 카르옌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대놓고 얼굴로 홀리려 드는 수작에 토파즈가 미간을 구겼다.
“싫지 않으시잖아요.”
“좋지도 않아.”
“음……. 그 정도는 제 얼굴을 봐서 양보해 주실 수 있지 않나요?”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제 얼굴 좋아하시잖아요. 10년 전에도, 숲에서 재회했을 때도, 오늘도. 제 얼굴에서 눈을 못 떼셨던 거 다 압니다.”
카르옌이 뻔뻔스레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릎이 얽히고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토파즈는 말문이 막힌 채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신전 벽화에 그려진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한낱 인간의 얼굴이 이렇게 생기다니, 어쩐지 부조리함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생겨 먹은 얼굴이니 남의 생김새에 관심이 없는 토파즈마저 때로 멍하니 감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듯,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졌다.
토파즈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냥 신기해서 본 거지. 길가에 예쁜 꽃이 피어 있으면 눈길이 가는 것처럼.”
“그러니까 토파즈님 눈에 제가 예쁘다는 뜻이네요.”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은 고작 길가의 꽃으로 비유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화사했다.
카르옌의 손이 침대를 짚었다. 그가 상체를 비스듬히 세워 토파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진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저 오늘 많이 놀랐어요, 토파즈님. 시체도 많이 봤고, 저 자신도 낯설고……. 너무 혼란스럽고 무섭습니다.”
“…….”
“그러니 오늘도 저를 위로해 주세요.”
같잖은 엄살을 부리며 다가오는 얼굴을 밀어 내지 못한 이유는, 뻔뻔한 입과 달리 어깨를 쥔 손은 떨리고 있어서였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서였다.
아니,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토파즈는 생각을 멈추며 눈을 감았다. 쏟아진 머리칼이 이마를 스쳤다. 이내 맞닿아 오는 입술은 부드럽고 뜨거웠다.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떨리는 숨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가만히 대었다가 떨어지는 어린애 같은 입맞춤. 이런 풋내 나는 입맞춤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는 게 이상했다.
머리가 둔해졌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왜 이 애를 다른 사람처럼 밀어낼 수가 없을까. 자꾸 곁을 한 뼘 내주고 말까.
나를 이곳에서 꺼낸 네가 어느새 내게도 특별해졌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져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
토파즈는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흐트러져도 아름다운 얼굴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눈빛, 애타게 어깨를 쥐어 오는 손.
그 모든 것을 갖고 싶어졌다는 욕심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어차피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다. 쥐어 봤자 끝내 또 잃을 것이다.
“네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어.”
“뭐가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
책망이 아니라 달래는 것에 가까운 말투였다. 카르옌이 손을 뻗어 토파즈의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귀한 비단을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제가 황자라서, 그 이유도 있나요?”
토파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르옌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제가 황자가 아니게 된다면요?”
“……너 그게 무슨 뜻이야.”
“토파즈님.”
이름이 불리는 순간, 토파즈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했다. 무심코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저희 돌아가지 말까요?”
“…….”
“복잡한 일은 다 내버려 두고 이대로 둘이서 도망칠까요.”
아주 오랫동안 되뇌어 온 말을 내뱉듯 침착한 어조와 눈빛이었다. 토파즈가 한참 만에 물었다.
“진심이야?”
“저는 당신의 앞에서 한 번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어찌 그런 걸 물으십니까.”
“…….”
“외딴 오두막에서 여생을 살아도, 머물 곳 없이 평생을 떠돌아도…… 저는 분명 행복할 겁니다. 토파즈님만 곁에 계셔 주신다면요.”
열띤 눈동자는 도저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토파즈는 못 이긴 척 물러지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
“너는 황제가 되어야 해.”
“왜요? 저는 왜 그래야만 합니까?”
되묻는 카르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몫의 사탕을 빼앗겨 억울한 아이처럼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기도 했다.
마주친 푸른 눈동자에서 불씨가 튀는 것 같았다. 바다를 통째로 얼려 보석으로 만들면 이런 빛깔일까 싶은 눈동자였으나, 정작 그 안에서는 늘 뜨거움이 먼저 느껴졌다.
“네가 숲에 틀어박힌 나를 꺼내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유와 같지.”
숨어 사는 일은 조금도 평화롭거나 안온하지 않다. 사람을 사귈 수도, 믿을 수도 없다. 곁에 둘 수 있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뿐이다. 이제야 인정하게 된 속내였다.
카르예니프가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났는지, 그딴 건 모른다. 토파즈는 신탁이니 예언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고 황실의 대단한 전통에도 관심 없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카르예니프는 강력한 힘과 명분을 쥔 황위 계승자였다. 1황자든 황녀든, 다른 황족이든 간에 카르예니프를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길 것이다.
그가 숨는다면 끝까지 추격할 것이고, 찾는다면 후환이 없도록 없앨 것이다.
“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네가 쫓기거나 숨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언제나 빛이 가득 내리쬐는 곳에,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늘 오만하고, 당당하고 태연해야 한다. 그게 너에게 어울린다.
“살아서 황제가 돼. 누구도 널 해칠 수 없도록.”
끝내 옥좌에 앉은 네 곁에 내가 없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 * *
카르옌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밑동뿐이었지만 사람 두 명은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둘레가 넓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이한 붉은 피가 흐르던 나무는 이제 평범한 나무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언젠가 하신 말씀인데, 나무는 뿌리만 살아 있으면 다시 자랄 수 있대요. 어떤 나무는 잎만 잘라서 심어도 뿌리를 내려서 새로운 나무가 되고요.”
카르옌이 손으로 그루터기를 쓸었다. 꿈틀, 땅이 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뒤로 물러난 카르옌이 토파즈의 앞을 가로막았다.
토파즈는 그의 어깨너머로 일어나는 변화를 보며 입을 벌렸다. 무참히 잘려 나간 줄기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다시 자라고 있었다.
토파즈가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나뭇가지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뻗어 나갔다. 새순이 돋았다가, 꽃이 피었다가 다시 푸른 잎사귀가 무성히 달렸다.
마치 몇 년의 시간을 눈앞에 축약한 것처럼 순식간에 자란 나무가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수십 년 전, 어쩌면 수백 년 전에 간직하고 있었을 생기가 되살아났다.
숨 쉬듯 일어난 기적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토파즈의 귓가에 부드러운 속삭임이 닿았다.
“마음껏 잘라 내세요, 토파즈님. 저도 끈질김이 이 나무 못지않답니다.”
“…….”
말투만 보드랍다 뿐이지, 내용은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토파즈는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 이게 너지.
빙긋 마주 웃은 카르옌이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뒤를 쭐레쭐레 따라온 여우가 토파즈의 발치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이번에도 데려가지 않으실 건가요?”
“위험한 곳에 뭐 하러.”
단호한 말에 카르옌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 숲은 과연 안전하다고 생각하냐는 뜻이었다.
“그래도 얜 여기가 집이야. 무사히 수도에 도착한다고 해도 조그만 집에선 자유롭게 뛰어놀 수도 없을 거야.”
생명을 책임지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한 사람의 인생도 겨우 보살피는 토파즈 같은 이는 더더욱, 책임질 수 있는 선택만 하는 것이 옳았다.
“위험하지도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집이 생긴다면요?”
수도에 그런 집을 장만하려면 토파즈가 평생을 전장에서 굴러도 죽기 직전에나 가능할 것이다. 토파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보듯 혀를 찬 뒤 짧게 답했다.
“헛꿈은 안 꾸는 편이라.”
“으음…….”
제국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랐을 황자님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한 듯 턱을 쓰다듬었지만, 토파즈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토파즈는 흰 여우의 털을 쓰다듬어 주며 짧은 작별 인사를 마쳤다. 며칠 봤다고 그새 정이라도 붙였는지, 카르옌도 ‘또 봐’ 하며 여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돌아갈까요.”
카르옌이 토파즈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감싸 쥐었다. 그리고 왼손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콧잔등이 손등을 스쳤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어제부터 묻고 싶었는데, 꼭 이런 방식으로 작동해야 해?”
“네.”
“누구 마음대로?”
“그야 만든 마법사 마음이죠.”
“진짜 제멋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멀어졌다. 어느새 설원 위에 남은 것은 귀를 쫑긋거리는 여우 한 마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