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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86)화 (86/110)

#086

“이 봉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의 마나를 삼키는 거죠. 마법사의 마나가 가장 짙게 흐르는 것이 바로 혈액이고요.”

“…….”

“그러니 검에 제 피를 묻혀 보세요, 토파즈님.”

카르옌이 몸을 감싸고 있던 흑갈색 망토를 완전히 벗었다. 옷깃을 접어 올려 팔을 드러내자 이미 팔뚝에 남은 선명한 자상이 드러났다.

“조금만 더 상처를 내면 충분히 검에 묻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토파즈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확실한 방법도 아닌데 멀쩡한 살을 찢으라고?”

“토파즈님도 그렇게 하셨잖아요.”

“…….”

카르옌의 시선이 토파즈의 목에 닿았다. 확실하지 않은 방법을 시도하다가 찢어 먹은 살이 거기에도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토파즈에게 카르옌이 그것 보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목숨을 빼앗는 행위도 망설인 적이 없는 토파즈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저 희멀건 살갗에는 도저히 검을 들이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토파즈님. 별로 아프지 않을 겁니다.”

“…….”

머리 위에서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망설임을 모두 읽은 것이었다. 토파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

토파즈가 카르옌의 입가에 왼팔을 내밀었다.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옌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토파즈의 검지를 잇새로 가볍게 물었다.

“……?”

“…….”

……손 말고 옷을 물으라고 한 건데, 뭐 상관없나.

“더 꽉 물어. 혀 깨물기 싫으면.”

“잠깐…….”

토파즈는 손가락을 더 깊게 밀어 넣어 이로 물게 했다. 카르옌이 당황한 낯으로 혀를 움찔거렸다. 손끝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토파즈가 검을 움직였다. 베인 당사자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을 정도로 빠르고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카르옌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분명 꽉 깨물라고 했는데, 엊그제 태어난 고양이가 물어도 이보다는 더 따끔하겠다 싶었다. 토파즈가 혀를 차며 젖은 입술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새하얀 검날이 피를 먹듯이 젖어 들었다. 토파즈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뒤를 돌아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손끝에서 나무가 종잇장처럼 부드럽게 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검을 적시고 있던 피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나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겁지겁 그 피를 삼키던 나무는 제 살을 내어 주고 말았다.

쿵! 거대한 나무가 옆으로 넘어지며 숲이 울렸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내렸다.

“이거…….”

나이테의 중심부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피처럼 짙은 붉은색이었다.

카르옌이 손으로 보석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깊게 파묻혀 있을 것 같았던 보석은 생각보다 쉽게 툭, 떨어져 나왔다.

카르옌은 지난 세월 동안 제힘을 억누르고 있었다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는 보석을 꾹 움켜쥐었다. 차가운 시선이 보석을 훑어내리는 동시에 화르륵, 손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잿더미조차 남기지 않은 봉인석 절반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헉.”

동시에 카르옌이 심장 부근을 감싸 쥐며 허리를 굽혔다.

“왜 그래? 괜찮아?”

대답을 해야 하는데, 카르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마나를 운용하려 한 것이 문제였을까. 머리 위로 파도가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디를 딛고 서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지도 앉아 있는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밀려왔다. 태초에 그가 타고난 힘이었다. 아니, 이것조차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밀어 절벽 아래로 떠민 기분이었다. 파도에 집어삼켜진 카르옌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휘청이며 쓸려 다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도 몸은 가볍게 느껴져 기이했다.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를 떼어 내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느리게 달리고 있었는지가 느껴졌다.

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리하면, 곧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향 없는 바람이 숲을 휘감았다. 발밑의 풀이, 머리 위의 나무가 흔들거렸다. 누군가 한 손으로 숲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카르옌!”

토파즈가 소리 높여 이름을 불렀지만 카르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허리를 숙인 채 심장을 쥔 그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고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려던 토파즈는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 흰 여우를 안아 들었다. 재빨리 뒤로 몸을 물린 순간,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붉은 머리칼이 휘날리며 눈앞을 가렸다.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으며 시야를 확보하자 순식간에 엉망이 된 숲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짐승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조금 전 토파즈가 서 있던 땅은 발목이 빠질 정도로 푹 파여 있었다.

가히 폭풍이라고 불러도 될 듯했다. 그 폭풍의 중심에 있는 것이 고작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휘몰아쳤다.

새들이 재앙을 피하듯 급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품 안의 흰 여우도 네 발을 마구 휘저으며 버둥거렸다.

토파즈가 여우를 바닥으로 내려 주자 귀를 쫑긋거리던 여우가 재빨리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마나 폭풍. 토파즈는 언젠가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는 기현상에 대해 떠올려 냈다.

때로 마법사가 주변의 마나를 마구잡이로 끌어당기면 주변이 폭풍 치듯 일렁이는 현상이 벌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주로, 그 마법사가 죽기 직전의 순간에.

설마. 평생 저주를 품고도 살아남아 왔다면서. 모두가 세 살을 넘기지 못하리라 단언했지만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다며 웃던 카르옌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르옌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를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토파즈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빈민가에서 죽어 나간 이웃들, 유일한 가족이었던 가넷, 유리와 베릴, 지키지 못한 수많은 동료, 그리고 자신이 죽인 적들까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아는데도 눈앞에서 카르옌의 숨이 멎는 광경을 상상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토파즈가 아는 한 죽음은 영원히 끝이라는 뜻이다. 죽으면 이 애는 여기서 더 자라지 않는다. 사탕을 먹거나 어리광을 부리지도, 제 손을 잡아 오지도 못한다.

그 어떤 찬란했던 시절도 땅에 묻히는 것. 그게 토파즈가 보아 온 죽음이었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닥치는 것이라 해도 카르옌에게는 달라야 했다. 이 애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넌, 여기서 이렇게 죽을 애가 아니잖아.

제국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앉을 이가 아닌가. 이토록 허무하게 스러져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지금 토파즈의 눈앞에서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토파즈는 팔을 들어 시야만 확보한 채 무작정 폭풍의 눈으로 뛰어들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뺨과 이마에 상처를 냈다.

폭풍의 중심에서 카르옌은 인형처럼 늘어져 서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은 도자기로 빚은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토파즈의 몸에 생채기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폭풍을 뚫고 다가간 토파즈의 손끝에 카르옌의 어깨가 겨우 잡혔다. 이 와중에도 그가 눈보라 속에서 망토 없이 얇은 옷만 입고 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거슬렸다.

토파즈는 핏줄이 비칠 정도로 창백한 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낮게 을렀다.

“카르예니프, 정신 차려. 나까지 죽이고 싶어?”

카르옌은 대답이 없었고 손에 닿는 뺨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몰아치는 바람이 정신을 흐트러뜨려,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토파즈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전투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갈급함이었다.

“이 정도도 감당 못 할 거면서 날 지켜 준다는 헛소리를 지껄였어?”

숲이 뒤흔들렸다. 막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자신은 그를 벨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 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토파즈가 수년간 이 위험한 숲에서 은둔했던 이유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구와도 깊게 친교를 맺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소중한 이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토파즈는 타인의 마음을 돌릴 능력도, 세상 모든 사람을 지킬 능력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는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것뿐이었다.

그 다짐이 깨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네가 망설임도 없이 올곧은 애정을 고백했을 때? 연약한 줄 알았던 등을 보며 누군가가 나를 지켜 줄 수도 있음을 알았을 때, 아니. 어쩌면 너희가 제멋대로 쳐들어와 나를 이 어둠에서 끄집어냈을 때부터일까.

침투한 것은 고작 한 방울의 물이라고 여겼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낙하하는 물 한 방울은 기어이 바위에도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건 원래 네 힘이었어. 그러니 감당해.”

토파즈는 얼어붙은 양 뺨을 손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맞물렸다. 손바닥 아래의 뺨은 서늘했으나 입술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토파즈는 마른 입술을 벌리고 인공 호흡하듯 숨을 길게 불어 넣었다.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으나 그 감각은 금세 잊혔다. 뺨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초점이 흐려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카르옌의 얼굴이 보였다. 긴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금세 녹아 내린 눈은 물기로 변해 눈물처럼 속눈썹을 무겁게 적셨다.

영원 같은 찰나가 흘렀다.

이내 얇은 눈꺼풀이 잘게 떨리더니 감춰 두었던 새파란 눈동자를 드러냈다. 몽롱해 보이던 눈빛에 차츰 빛이 돌아왔다.

“……방금…….”

“너 괜찮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카르옌이 토파즈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토파즈는 무너질 듯 기대오는 몸을 받아 냈다.

“안 괜찮습니다, 토파즈님…….”

어리광 부리는 말투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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