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눈발이 날렸다. 눈앞을 흐리게 만들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이 몇 번이고 털어 내도 머리 위로 소복이 쌓였다.
여전히 온화한 남부의 미리암과 달리 최북단은 이미 겨울이었다. 일 년의 절반 이상 눈이 내리는 혹한의 땅다웠다.
“한 계절만인데 굉장히 낯선 느낌이네요.”
“그때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니까.”
“정말 춥네요. 역시 제가 만든 온열 망토를 입길 잘하셨죠?”
“…….”
북쪽 숲 그렌로샤로 돌아온 인원은 단 둘뿐이었다. 저주의 당사자인 카르옌과 그의 호위 역할로 따라온 토파즈였다.
호위 역할이라고는 해도 미리암에 남아 있어 봤자 가장 할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차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그렌로샤는 전운이 짙게 감도는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손끝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와 숲을 감싼 기묘한 적막마저 평화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눈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 새하얀 평온 아래 모든 것을 파묻기 때문이다.
숲의 초입을 지나던 토파즈가 걸음을 멈췄다. 멀쩡히 걷다 말고 맨손으로 눈을 파헤치는 토파즈의 행동에 카르옌이 놀라서 다가갔다.
“잠시만요, 토파즈님. 손이 다 업니다. 장갑이라도…….”
끼고 있던 흰 털장갑을 벗어 내밀던 카르옌이 말을 우뚝 멈췄다. 토파즈가 걷어 낸 눈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쌓인 눈 한 겹으로 위장되어 있던 평화 아래에서 발견된 시체는 한 구가 아니었다. 토파즈는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카르옌이 쥐여 준 지팡이로 시체를 발굴해 내기를 반복했다.
마수와 싸우다 죽은 듯 사지가 성치 못한 시신이 대부분이었다. 숲 안쪽으로 발을 들일수록 피를 맛본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수들의 기척이 어수선했다.
복장은 모두 비슷했다. 시신들은 모두 무늬 없는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다. 체격이나 여기저기에 함께 파묻힌 무기를 봤을 때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의 출입이 금기시된 그렌로샤에 평범한 사람이 목적 없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일부러 땅을 파서 묻은 건 아니야. 죽은 뒤에 눈이 내려서 파묻힌 거지.”
아무리 북부의 날씨가 춥다지만 조금도 부패가 일어나지 않은 시신의 상태로 봐서는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어.”
“봉인석을 찾으러 왔던 이들일까요?”
“아마도. 그렌로샤를 우습게 보고 들어왔나 본데.”
아리아 호수의 봉인석처럼, 놓고 간 쪽에서 이미 선수를 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와 보지 않을 수 없어서 온 것이었는데…….
“어쩌면 못 가져갔을 수도 있겠어.”
바스락. 그때 저 멀리에서 풀을 헤집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관찰하듯 지켜만 보던 마수 중 하나일까.
그러나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낯익은 생명체였다. 눈으로 빚은 것처럼 새하얀 털의 여우.
날쌔게 달려온 흰 여우가 토파즈의 앞에 멈춰 서서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을 신나게 구르며 온몸에 눈을 묻히기도 했다.
“무사했네.”
토파즈가 무릎을 굽혀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듯, 여우가 토파즈의 무릎에서 어깨까지 타고 올라가 망토에 털을 잔뜩 묻혀 댔다. 반가움의 표시인 듯했다.
몇 달 전, 카르옌이 여우를 데리고 함께 떠날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때 딱 잘라서 거절한 토파즈였다. 그러나 여우의 턱 아래를 능숙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는 어쩔 수 없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카르옌이 눈을 가늘게 뜰 때까지 실컷 귀여움받은 흰 여우가 만족스럽게 꼬리를 휘휘 흔들었다. 여우는 땅으로 내려가더니 토파즈의 바지를 잇새로 물고 당겼다.
“……?”
“따라오라는 것 같네요.”
“둘이 말이라도 통해?”
“대충은요.”
토파즈가 농담처럼 물은 말에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였다.
흰 여우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이었다. 이전에 카르옌이 머리를 묶어 주기도 했던 장소였다.
그러나 절벽의 풍경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뒤따라오던 카르옌의 눈을 가렸다.
커다란 고목 근처에 시체가 여러 구 있었다. 미처 눈에 덮이지 못하고 엎어져 있는 시체는 하나같이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새하얀 설원 곳곳에 검붉은 피가 흩뿌려져 있어 더 참혹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깔끔하게도 잘렸네요.”
손목을 붙들어 오는 손길과 동시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카르옌은 제 눈가를 가려 주던 토파즈의 손을 꼭 쥐고 그 위에 손을 겹쳤다. 결코 작지 않은 토파즈의 손이 모두 덮였다.
이럴 때면, 그가 보호받아야 할 허약한 마법사도, 그때 그 설탕 과자 같던 어린애도 아니라는 뒤늦은 자각이 들고는 했다.
“무기는 저 도끼일까요?”
기묘한 감상에 시달리던 토파즈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카르옌의 말대로 바닥에는 도끼가 널브러져 있었다.
토파즈는 시체의 중심에 있는 눈에 익은 고목 한 그루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사람의 피가 튀어서 붉어 보이는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어른 셋이 손을 잡아야 겨우 감쌀 수 있을 만큼 두꺼운 나무 기둥에 도끼로 찍은 듯한 한 뼘짜리 상처가 나 있었다. 그 틈 사이로 피처럼 새빨갛고 진득한 수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꼭 이 나무를 베려고 하다가 똑같이 목이 잘린 모양새네요.”
절벽을 향해 가지를 뻗은 커다란 나무는 토파즈가 처음 이 숲에서 은둔했을 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목이었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굳건히 이 자리에 있었으리라.
토파즈 역시 이 나무 위에 올라가 바다를 구경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말라비틀어진 이 나무가 낯설게만 보였다.
“잠깐 떨어져 있어 봐.”
토파즈는 여우를 달랑 들어 올려 카르옌의 품에 안겨 주고 그를 뒤로 밀었다. 그리고 나무줄기에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휙! 검을 내리긋는 동시에 느껴지는 움직임에 토파즈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겨우 피했으나 머리칼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붉은 머리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토파즈님!”
뒤로 밀쳐지다시피 했던 카르옌이 놀라서 앞으로 뛰어왔다. 품 안에 안겨 있던 여우도 캥, 하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다가 카르옌의 손아귀를 탈출했다.
카르옌은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토파즈의 뺨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붙들고 휙휙 돌려가며 얼굴을 살폈지만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서늘한 손끝이 뺨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혼자 저지르시면 어떡합니까. 위험할 뻔했어요.”
“예고했잖아.”
“너무 빨랐습니다!”
그건 예고가 아니라 통보였다며 카르옌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무를 타듯 토파즈의 몸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안착한 여우도 동의하듯 컹컹거렸다.
“둘이 죽이 잘 맞네…….”
그러나 한가로운 감상을 이어 갈 틈은 없었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손을 떼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날아온 공격의 궤도와 강도는 자신이 휘두른 공격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무가 그의 공격을 반사하듯 튕겨 낸 것이었다.
토파즈의 검 끝이 할퀸 나무줄기는 껍질이 벗겨진 채 붉은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동물처럼 피를 흘리고 공격을 반사하는 나무. 이걸 과연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나무, 천년어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아.”
천년어가 봉인석 조각을 품고 돌연변이 인어가 되었던 것처럼 이 나무도 봉인석의 힘 탓에 단순한 식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 나무뿐만 아니라 숲 전체가.
바닥에 흩뿌려진 토파즈의 머리칼을 주워 손수건으로 소중히 감싸던 카르옌이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전에 토파즈님이 바다를 구경시켜 주셨을 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이 숲에서는 마수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서도 마나가 짙게 느껴지는 일이 많아서, 그냥 흔한 경우인 줄 알았죠.”
당시에는 몸이 안 좋아서 꼼꼼히 살피질 못했다며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였다.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다니 황당하네요.”
“이 나무를 몇 년 동안 끼고 산 나보다 더 황당할까……. 어쨌든 여기 어딘가에 봉인석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지.”
이 앞에서 죽어 있는 놈들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될 듯했다. 토파즈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곧바로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잠시만요, 토파즈님. 그 방법은 정답이 아니지 않을까요?”
“잘 피하면 돼.”
“이들도 그걸 몰라서 죽었을까요?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불로 나무를 태운다든가…….”
“그러다가 너한테도 불이 붙으면 난 네 멱살을 잡아다가 눈밭에 파묻어 버릴 거야.”
“으음…….”
카르옌의 입을 다물게 만든 토파즈는 먼저 도착한 이들이 베어 내려고 했던 밑동 부분을 노려서 검을 휘둘렀다.
나무는 쇳덩이보다도 단단했다. 정예 검사를 상대할 수 있도록 마석을 섞어 만든 검으로도 한 번에 베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쾅, 쾅! 숲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났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무가 휘청거릴 정도로 밑동이 잘려 나갔지만, 토파즈의 뺨과 목에도 얕은 생채기가 하나둘 생겼다.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튕겨 나오니 마치 자기 자신과 검을 맞대는 듯했다. 날이 쉽게 무뎌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금 상처를 입더라도 한 번에 끝내는 게 낫겠다. 토파즈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마치 그 속내를 읽은 것처럼 달려온 카르옌이 토파즈의 몸을 옆으로 밀쳐 냈다.
“……!”
토파즈는 갑자기 끼어든 카르옌을 보며 경악했다. 파삭, 두 사람의 앞을 반투명한 막이 감싸는가 싶더니 유리처럼 깨어졌다. 카르옌의 가슴팍이 희미하게 빛났다. 목걸이가 걸려 있을 위치였다.
두 사람을 모두 감싸기에는 작았던 방어막이 깨지고 카르옌의 오른팔에서 피가 튀었다. 스쳤을 뿐인데도 두꺼운 옷깃이 찢어지고 팔뚝에 긴 자상이 남았다.
“미쳤어? 넌 마법사 주제에 왜 자꾸 몸부터 들이밀어?”
토파즈는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잘못하면 팔이, 아니.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상처를 급히 손으로 지혈하며 이를 악물었다. 변명도 없이 얌전히 팔을 내맡기고 있던 카르옌이 나무를 고갯짓했다.
“토파즈님. 저걸 보세요.”
“또 뭘…….”
날카롭게 고개를 돌린 토파즈의 눈에 이상한 흔적이 잡혔다.
어깨높이의 나무껍질 일부가 꼭 녹은 것처럼 물러 있었다. 분명 조금 전 카르옌의 피가 튄 부분이었다. 그러나 정작 핏자국은 없었다. 카르옌의 피를 모두 안으로 흡수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굶주린 것처럼, 순식간에.
“아.”
카르옌이 뭔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고 제 팔뚝을 세게 감싸고 있는 토파즈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는 비밀을 속삭이듯 토파즈의 귓가에 입술을 내렸다. 곧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토파즈님, 그 검으로 저를 베세요.”
진짜 개 같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