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84)화 (84/110)

#084

그 이후로도 하인은 상기된 얼굴로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토파즈는 웃음을 삼키며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런데 나리는 기사님이신가요? 아니면 설마 마법사?”

“용병이야.”

하인은 그제야 토파즈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젖살이 덜 빠진 뺨이 위로 볼록 치솟았다. 눈동자도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안에서 자라서 용병분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용병이라고 하면 다들…… 음, 뭐랄까 거친 느낌이 있을 줄 알았거든요.”

“실제로도 그래. 싸우는 게 직업이니까.”

“하지만 나리는 전혀 그렇게 보이시지 않는걸요.”

“지금은 검을 뽑을 상황이 아니라서 그렇지. 전장 밖에서는 용병들도 그냥 사람이야. 귀족만큼 차 취향이 까다로운 용병도, 시 짓기를 좋아하는 용병도 있지. 너처럼 요리를 잘하는 용병도 있고.”

토파즈가 웃으며 슬쩍 고갯짓하자 하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가 양손을 내저으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저, 저는 아직 주방 보조라서 감히 요리를 잘한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에요. 주방장님은 제가 요리사가 되려면 50년은 더 굴러야 할 거래요.”

“내가 보기엔 5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지금도 나보다는 솜씨가 뛰어날걸.”

“헤헤. 아무리 그래도 저는 미리암 성의 주방 일꾼이니까요. 문외한과는 차이가 있죠.”

재잘거리는 하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다 보니 부탁한 간식거리가 완성되었다. 사과가 흘러넘칠 정도로 듬뿍 들어간 사과파이가 투명한 덮개에 덮여 있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하인을 불러 드릴까요? 아니면 제가 가시는 길까지 들어다 드릴게요!”

어린 하인이 손을 번쩍 치켜들 기세로 물었다.

“고맙지만 나도 손이 있어서.”

토파즈는 한 손으로 은쟁반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무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어린 하인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토파즈가 한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가넷.”

“네?”

“가넷이라고 불러.”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뜨인 눈이 토파즈의 붉은 머리칼과 허리춤의 검에 차례대로 닿았다.

“가넷이라면 혹시…….”

“무슨 대화를 그리 즐겁게 하십니까?”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토파즈는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돌렸다.

시종 복장에 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토파즈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모자 아래로 금빛 머리칼이 얼핏 보였다.

주방까지 몰래 행차하신 황자 전하께서 토파즈의 손에 들린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사과파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걸 어찌 아시고.”

“넌 좋아하는 음식을 그렇게 새 모이만큼 먹나 보지.”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자 카르옌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듣는 사람의 귀가 다 간지러워질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지금은 좋아합니다. 추억이 담긴 음식이지 않습니까.”

“추억까지야…….”

“제가 들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옥체나 보존하시지요, 전하.”

“으음…….”

불만스럽게 목을 울린 카르옌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전하’ 소리를 듣고 귀를 의심하던 어린 하인이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화, 화, 황…….”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황자 전하’를 부르짖을 것 같은 하인에게 카르옌이 입가에 검지를 세워 보였다. 하인이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만 갈게. 간식 잘 먹겠다고 전해 줘.”

토파즈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하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바짝 얼어붙은 앳된 얼굴을 보더니 머리칼을 한 번 토닥여 주었다.

“어린아이를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요?”

토파즈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사과파이를 자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팔을 괸 카르옌이 어쩐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토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대화를 나누던 하인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처음 봤는데. 무심한 대꾸에 카르옌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홀려 놓고 나 몰라라 하실 작정이시군요.”

“……뭘 해?”

홀려? 내가 무슨 유령도 아니고……. 토파즈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제가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데 너무하십니다.”

“네가 뭔데.”

“…….”

냉정한 말에는 대꾸 없이 입술만 샐쭉하니 내밀었다. 제 얼굴 예쁜 건 잘 알아서 시도 때도 없이 얼굴로 회유하려 든다.

“헛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카르옌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마지못해 포크를 들었다. 그가 느릿느릿 한 조각을 먹을 동안 토파즈는 세 조각을 가뿐히 먹어 치웠다.

먹는 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고개를 조금 돌리자마자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더미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귀한 마석, 여기저기 잉크가 튄 종이 낱장, 텅 빈 찻잔. 대체 왜 책상 위에 있는지 모를 망토와 부츠까지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토파즈는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밤사이 뒷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헤집어 놓은 감자밭이 꼭 이런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 난장판을 일으킨 범인은 멧돼지가 아니라 눈앞에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예비 황제였다.

카르옌이 아침부터 처박혀 있는 이곳은 미리암 공작성의 동쪽 탑이었다. 미리암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가 쓰고 있던 연구실을 빼앗았다는데,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연구실이 처참할 정도로 엉망이 된 것은 고작 반나절만이었다.

아까는 사과파이와 찻잔 두 개를 내려놓을 공간도 없었는데, 카르옌이 책을 빗자루처럼 쥐고는 굴러다니던 물건들을 죄다 한쪽으로 쓸어 버렸다.

정리 정돈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잘하리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건 좀 심한데. 어쩌면 괴상한 마법사의 눈에만 보이는 질서가 있는 걸까.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다.

“좀 치우면서 하지 그래.”

“다 필요해서 꺼내 놓은 거랍니다.”

대답만은 언제나처럼 나긋했다.

카르옌이 아침부터 이곳에 처박힌 첫 번째 이유는 미리암 성을 보호하고 있는 결계를 보수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그렌로샤 숲으로 가는 마도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간 이동 마도구는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적은 데다 재료 수급도 힘들었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최상급 마석을 비롯해 까다로운 재료가 섞여 있어, 그동안 여행가 겸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던 카르옌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침 일찍 카르옌이 불러 주는 긴 목록의 재료를 구해다 준 것은 물론 이 거대한 장원을 물려받을 후계자, 메르디나였다.

하란에게 듣기로는 메르디나가 들고 온 상자 안에 든 재료만 해도 저택 한 채는 지을 값이라고 했다. 카르옌은 그깟 재료보다 자신의 노동력이 더 비싸다며 재료를 아무렇게나 굴리는 중이었지만.

“왜 그걸 반지 형태로 만들어? 작을수록 만들기 까다롭다고 하던데.”

“소지하기 편하니까요. 심미적으로도 아름답고요.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토파즈는 카르옌이 입속에서 주문인지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시답지 않은 질문이나 캐물었다. 왜 방해하느냐는 핀잔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너희가 처음 그렌로샤 숲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네가 지니고 있던 마도구 덕분이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직접 만든 건가?”

“네. 그랬죠.”

“만드는 사람이 가 본 곳만 좌표로 새길 수 있다고 했잖아. 전에도 키올렌에 와 본 적이 있다는 뜻이네.”

“예전에…… 잠깐요.”

토파즈는 카르옌이 뭔가 설명을 덧붙이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눈을 내리깔고 종이에 뭔가를 써넣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평소답지 않았다.

토파즈의 빤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카르옌이 고개를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겸사겸사 다른 것들도 좀 만들어 두려고요. 겨울이니까 온열 마법이 걸린 망토나 신발도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토파즈는 바쁘게 움직이는 새하얀 손을 지켜보다가 대꾸했다.

“난 추위 잘 안 타.”

“아…….”

너른 어깨가 미묘하게 아래로 처졌다. 토파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있으면 좋긴 하겠지. 겨울이니까.”

“그렇죠?”

카르옌은 금세 낯빛을 바꾸며 몰두했다. 몸 쓰는 일 외에는 별 소질이 없는 토파즈로서는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마법사들은 매일 처박혀서 저러고 산단 말인가? 상상만 해도 몸이 뻐근했다.

“보고 있기 지루하지 않으세요?”

“지루해.”

부정하지 않자 카르옌이 피식 웃었다.

“소파에 누워서 눈 좀 붙이세요.”

“나가도 된다는 소리는 안 하네.”

“토파즈님이 나가시면 저만 손해인걸요.”

어차피 책상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놈이 말은 잘했다. 어찌 되었든 토파즈는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눈을 감으니 사부작거리는 작은 소음만이 귀를 간지럽혔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머리에 닿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머리칼이 많이 자라셨어요.”

앞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느껴졌다. 머리칼 사이를 느릿하게 헤집고 곧은 목을 쓰다듬더니 은근슬쩍 귓불까지 툭툭 건드려왔다.

이제는 아주 틈만 나면 수작질이다. 토파즈가 한쪽 눈만 게슴츠레하게 뜬 채 물었다.

“손목 잘리고 싶어?”

“그건 조금 곤란하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으르렁거리는 개가 절대 자신을 물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주인처럼. 아니, 어쩌면 물려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스스로를 개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슥슥 쓰다듬어지다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토파즈는 커다란 몸을 구겨 소파 앞에 쪼그려 앉은 카르옌을 보다가 팔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가렸는데도 뺨을 간지럽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 곤란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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