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83)화 (83/110)

#083

용병 길드 녹스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미리암 지부. 사무실을 지키는 것보다 바깥에서 검을 휘두르는 일이 더 잦은 지부장의 사무실은 단출하다 못해 허전했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가넷을 사칭하는지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만나겠다고 했는데…….”

토파즈는 살벌하게 읊조리는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 여전히 성질 사나워 보이는 인상까지.

“왜 진짜 너야? 가넷.”

지금껏 본 얼굴 중 가장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확실히 토파즈가 알던 이잔이었다. 녹스의 초기 구성원 중 하나이자 4년 전까지 수많은 전장에서 함께한 동료.

“오랜만이네, 이잔.”

토파즈가 담담히 인사를 건네자 이잔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의 얼굴이 이내 잔뜩 일그러졌다. 이잔이 성큼성큼 다가와 토파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격렬한 포옹이었다.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했다고? 미친 새끼. 넌 진짜 빌어먹을 놈이야.”

어깨를 끌어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아팠지만 토파즈는 짜증스럽게 밀어내는 대신 묵묵히 포옹을 받아 주었다. 4년 만의 재회였다.

“너도 아닌가 보네. 그날 날 구해 준 사람.”

이 격렬한 반응이 진실이라면, 토파즈가 몇 년간 품어 온 가설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다.

탄자와 베릴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웠던 동료가 바로 이잔이었다. 이잔도 아니라면 그날 토파즈를 불타는 건물 안에서 끄집어내 준 사람이 용병단 내 동료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난 그때 의뢰 때문에 수도에 있었잖아. 너랑 베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복귀했다고. 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혹시…… 베릴도 살아 있어?”

“…….”

토파즈는 그 목소리에 담긴 실낱같은 희망을 읽었지만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이잔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토파즈가 이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넌 탄자를 얼마나 믿지?”

“지금 그 이름이 왜……. 설마.”

“탄자가 나를 죽이려 했어. 베릴은 우고의 손에 죽었지.”

“…….”

이잔의 새카만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믿지 않아도 좋아. 근데 한 가지는 알아 둬. 탄자는 녹스를 이용해서 1황자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어. 그 새끼가 또 무슨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끼어들었다가는 피만 볼 거야.”

토파즈는 카르옌에게 1황자가 흑마법사들과 함께 벌여 온 무도한 짓에 대해 모두 들었다. 베론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그 ‘제물’의 공급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이교도와 녹스임이 틀림없었다.

한때 녹스에 몸담았던 용병으로서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거는 이들이 있겠지. 녹스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품은 채로.

“내가 탄자의 수하일 수도 있잖아. 뭘 믿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줘?”

그런 용병 중 하나일 이잔이 물어 왔다. 토파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까지는 그 새끼 편이었더라도 오늘부터는 다르겠지. 네가 베릴을 죽인 놈 편을 들 리 없잖아.”

“…….”

이잔이 뺨을 문지르며 실소를 흘렸다.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알고 있었어?”

“네 짝사랑을 몰랐던 건 베릴이랑 숙소에 밥 얻어먹으러 오던 고양이 정도였으니까.”

“…….”

“너야말로 내 말을 믿을 생각이야? 내가 베릴과 우고를 죽이고 도망쳐 놓고 너한테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토파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잔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가넷. 넌 진짜 개자식이야.”

……왜 갑자기 면전에 대고 욕질이지. 그런 눈으로 올려다보니 이잔이 울컥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넌 내가 베릴 때문에 널 믿는다고 생각하지? 북방에서 마수한테 한심하게 물려 가는 나를 구하겠답시고 네가 그 새끼 아가리에 팔까지 집어넣은 일 잊었어? 네 돈줄인 오른팔 말이야. 네가 목숨 걸고 우릴 구해 준 적이 몇 번인데……. 개새끼, 네 맘대로 빚지워 놓고 또 잊어버렸지.”

“…….”

“네가 동료를 배신해? 그딴 의심은 해 본 적도 없으니까 헛소리 마.”

이잔의 단호한 말에 토파즈는 묘한 감상에 잠겼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랑 베릴이 한꺼번에 당하다니. 거기다가 우고는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탄자는 부상을 입고 나타났지.”

“…….”

“내가 미리암에 있는 거, 유배나 다름없어. 탄자 그 자식이랑 개처럼 싸웠거든. 너희가 어쩌다가 죽었는지 캐물어도 늘 석연치 않은 대답뿐이었어. 어떻게 시신도 수습을 못 할 수가 있냐고 따졌더니 자기 왼팔을 보여 주면서 그러더라.”

‘가넷까지 당했는데 나라고 별수 있었겠어? 내가 두 사람 대신 죽기를 바랐던 거면……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지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보호를 받다니 길드장으로서 면목이 없어. 하지만 믿었던 동료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서 슬픈 건 나도 마찬가지야. 슬픔은 알지만 이제는 제발 남은 이들을 살피자, 이잔.’

“세상에서 제일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그 지랄을 떠는데…….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들이받긴 했지만 그 말을 믿긴 믿었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기 처박혀서 얌전히 지냈지. 너희가 죽는 걸 목격했다는 동료가 한둘이 아닌데 다 같이 거짓말을 한다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이잔은 목격자를 자처한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했고, 그중에는 토파즈와 등을 맞대고 싸웠던 이들도 있었다. 새로운 배신감은 없었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잔마저도 배신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안 그래도 곧 내전이 벌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퍼졌어. 용병 세력은 이런 싸움에 빠진 적이 없으니 녹스도 아마 참전하겠지.”

이잔은 생각에 잠긴 듯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더니 곧 양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우고는 어떻게 됐어.”

“죽었어.”

“네 손에?”

“그래.”

“…….”

이잔의 눈빛에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바득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잔이 곧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노로 달아올라 있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이잔이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 * *

미리암은 유서 깊은 대귀족이었다. 초대 황제는 건국 공신이었던 초대 미리암 공작에게 남부의 드넓은 영지를 하사했다. 땅이 비옥하며 기후가 온화해 늘 풍작을 거두는 곳이었다.

남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으나 마수의 침입이 드물어 늘 찾아오는 휴양객과 관광객으로 붐볐다.

비옥한 영지에서 거두는 세금과 관광 산업만으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던 미리암 공작을 제국 최고의 대부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은 바로 마석 광산이었다.

남동부의 광산에서 순도 높은 마석이 잇따라 채굴되며 미리암 공작가는 황제의 눈엣가시가 될 정도로 큰 부와 세력을 쌓았다.

현명했던 5대 미리암 공작은 황가의 권력을 탐내는 대신 마석 광산을 지참금으로 아들을 황제와 혼인시켰다. 일종의 혼인 동맹이었다.

그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두 가문 사이에 결합이 일어났고, 미리암은 황가의 가장 강력한 우군으로 남았다.

토파즈는 자신이 한평생 엮이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대귀족 가문의 손님이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메르디나에게 성 안팎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출입패를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제법 몸을 사렸다.

물론 가끔 창문을 문처럼 이용하거나 밤마다 제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황자와 밀회 아닌 밀회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는 자중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딱히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성안을 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성에서 1년쯤은 머무른 손님 같았다.

외출을 하고 돌아온 오후, 토파즈는 곧장 방으로 향하는 대신 가까운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갖 귀한 식자재가 손에서 손으로 오가는 주방에는 흰옷을 입은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토파즈는 커다란 사과 바구니를 들고 곁을 지나는 하인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하고 싶은데.”

“네?”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나서 태연하게 부탁하자 앳된 기색의 하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하인이 그의 팔꿈치를 툭 치며 고개를 숙였다.

“소공작님의 손님이시군요.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토파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인이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집었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토파즈는 주방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사과를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저기.”

고개를 돌리자 사과 바구니를 옮기던 어린 하인이 토파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용인들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토파즈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소공작님의 손님이시라니, 그럼 혹시 황자 전하도 보셨나요?”

“……같이 다녔지. 며칠 정도는.”

“와아!”

하인이 탄성을 내지르고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말 수배지에 그려진 초상화처럼 생기셨나요? 저는 먼발치에서도 뵙지를 못해서 너무 궁금했거든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이는 말에 토파즈가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그 초상화는 실물보다 훨씬 못해.”

“허억. 정말인가요? 안 그래도 다른 하인들이 꼭 천사의 현신처럼 아름다우시다고 떠들어 대더라고요. 귀한 분을 뵈었다고 으스대느라 허풍을 떠는 줄 알았는데…….”

“허풍은 확실히 아니지.”

토파즈가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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