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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82)화 (82/110)

#082

토파즈가 회랑을 넘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카르옌은 물이 떨어지는 회백색 분수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었다.

어깨에 새를 얹고 있는 소녀 동상이 들고 있는 항아리에서 세찬 물이 쏟아져 나왔다. 달빛이 물에 비치며 카르옌의 얼굴을 희게 빛냈다.

토파즈는 그가 이런 상황에 혼자 나왔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문을 눈치챈 카르옌이 나직이 말했다.

“호위는 모두 물렸으니 편히 계세요.”

“방금 뭘 한 겁니까.”

“……그것의 눈을 빌렸습니다.”

카르옌이 허공을 빙빙 돌며 날아다니는 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토파즈가 눈가를 좁혔다. 납치당했을 때도 그렇고, 종종 어떻게 알았나 싶을 정도로 손쉽게 토파즈를 찾아올 때가 있었는데 다 방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곧 황제 폐하가 되신다는데 그럼 건방지게 반말을 할까요.”

카르옌의 곁에 비딱하게 선 토파즈가 팔짱을 꼈다. 여전히 말투만 존대일 뿐 행실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으나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에 쓸 왕관도, 지켜야 할 황궁도 없는데 벌써 황제는요.”

카르옌이 쓰게 웃었다.

“에델티움에서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쳐야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도 그러셨죠. 살아남은 황위 계승권자가 어머니뿐이셨을 때도 대관식 전날까지는 황녀로 불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멈춘 카르옌이 고개를 들어 토파즈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매달리듯 토파즈의 손을 잡아 왔다.

“제가 황제가 되더라도, 토파즈님은 지금처럼 저를 편히 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어느 나라 법도인데?”

“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요.”

웃음을 머금은 카르옌의 목소리가 적막한 중정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분수대의 물소리만이 울리기를 한참,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토파즈님,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토파즈도 눈과 귀가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카르옌은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고, 적은 막으려 들 테니 그가 가는 길이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혹시 지금이라도 의뢰를 그만두고 싶으십니까?”

그런 말을 할 거면 이 손이라도 놓고 말하든지. 토파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뺄 거라고 생각했나.

“난 돈 받은 만큼은 일해. 그리고, 언제는 널 지켜 달라며.”

카르옌이 눈을 크게 떴다. 푸른 눈동자 안에 동그란 달이 들어찼다.

“너도 날 지켜 준다고 했고. 입장이 바뀌어서 마음도 바뀌었어?”

“그럴 리가요.”

카르옌이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토파즈는 그가 한 손을 멋대로 만지작거리도록 내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은 날이었다. 너무 밝아 주변의 별이 모두 빛을 잃을 정도였다.

“부모를 잃으면 많이 슬프다지.”

“…….”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분수대에서 떨어지던 물소리가 멈췄다. 정원을 고요히 잠재운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애틋한 관계가 아니라서 눈물은 나지 않네요.”

“…….”

“하지만 저 같은 불효자에게라도 괜찮으시다면…… 품을 빌려주시겠어요?”

맑은 눈이 토파즈를 올려보았다. 토파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독 가련해 보이는 어깨를 붙잡아 어설프게 끌어안았다.

카르옌이 가슴팍에 고개를 깊이 파묻어 왔다. 그리고 양팔을 뻗어 허리를 감쌌다. 허리를 단단히 감싼 팔 때문일까. 안아 주고 있는데도 반대로 끌어안긴 느낌이 들었다.

카르옌은 만족을 모르는 사람처럼 토파즈의 허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이내 중심이 무너지며 토파즈가 분수대에 한쪽 무릎을 댔다. 카르옌의 위로 반쯤 쓰러진 것 같은 자세였다.

“……뭐 해.”

토파즈가 카르옌의 어깨를 쥐었다. 분수대를 디딘 오른쪽 무릎 옆으로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허벅지가 스쳤다. 허리에 두른 팔을 옥죄며 카르옌이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위로해 주세요, 토파즈님.”

넘어지지 않도록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무릎에 부드러운 손이 닿아 왔다. 무릎 위를 둥글게 문지르다가 올라간 손이 허벅지를 쥘 듯 말 듯 쓸어 왔다.

리스타바트의 영주성에서 탈출할 때 그가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대로 힘을 빼고 기댄대도 그의 무릎이 박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토파즈님…….”

토파즈가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던 때, 애타는 부름과 함께 우묵하게 들어간 턱 아랫부분에 입술이 닿았다. 입맞춤이라고 부르기도 무색한 가벼운 접촉이었다.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쪼듯이 입을 맞춰 오는 건방진 입술을 손으로 덮어 버리니 손바닥에까지 입술을 문질러 왔다. 거친 손바닥에 입술이 스치는 감각에 손끝이 저절로 말렸다.

“뭐 하냐고.”

“위로받는 중입니다.”

카르옌이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뾰족한 콧대가 목 언저리를 스쳤다.

사람이 진지하게 달래 준다는데 지금…….

“안 떨어져? 안아 준댔지 누가 네 수작까지 참아 준댔어.”

토파즈가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금빛 털을 손으로 쥐었다. 아마도 살면서 처음으로 머리털을 쥐어 뜯겼을 카르옌이 아야, 앓는 소리를 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부모를 모두 잃은 날 실연까지 당하다니, 너무 슬퍼서 엉엉 울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울든지.”

“…….”

카르옌은 대답 대신 옅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 이제 대충 알겠다. 네가 어떤 놈인지.

토파즈가 한숨을 삼키며 양 뺨을 쥐고 들어 올렸다. 누군가 공들여 깎아 낸 듯한 얼굴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손끝으로 쓸어 낸 눈가는 바짝 말라 있었다.

“불세출의 마법사라더니 우는 법도 몰라?”

“……그러게요.”

한참 뒤에 낮게 잠긴 목소리가 대답했다.

카르옌은 고개를 떨군 채 얌전히 굴었다. 허리를 주물럭거리던 손도 다시 끌어안고만 있었다. 뭐가 그렇게 간절할까 싶을 정도로 꽉 힘을 주어 안고 있는 것만은 여전했다.

그가 카샤프에서 만난 그 꼬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라서일까. 아니면 습관처럼 짓는 미소 뒤의 외로움을 봤다는 착각 때문일까. 토파즈의 몸을 다 감쌀 정도로 커다란 남자가 작게 느껴졌다.

토파즈는 머리칼을 더 쥐어뜯는 대신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카르옌이 작게 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셨을까요?”

“……아마도.”

그렇게 답했지만, 사실은 알지 못했다. 사후세계나 내세 따위가 정말 있는지 토파즈처럼 어리석은 불신자는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 어머니를 잃은 아이 앞에서는, 막연히 있으리라는 대답밖에는 해 줄 수 없었다.

무책임한 위로에도 카르옌은 책망 없이 토파즈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멎었던 분수대의 물이 다시 쏟아졌다. 우는 법을 모르는 이의 눈물을 대신하는 것처럼.

* * *

용병 길드는 늘 소란스러웠다. 활기가 넘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정보를 교환하거나 할당된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정상적인 교류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말다툼하던 용병들이 끝내 검을 빼 들고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승급 심사에서 떨어진 용병이 직원을 붙들고 행패를 부리다 끌려 나가고 있었다. 왜 자기 의뢰를 받아 주지 않느냐며 호통을 치는 고객도 있었다.

녹스 길드 미리암 지부에서는 날마다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었다.

그때 누군가 직원의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겨우 수습하고 고개를 들자, 붉은 머리칼의 젊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훤칠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테이블에 팔을 걸쳤다. 화려한 머리 색과 달리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여기 지부장은?”

“예?”

“지부장을 만나고 싶은데.”

오늘 지부장이랑 만나기로 한 손님이 있던가……?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없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아니. 여기 지부장이 누군데?”

“예?”

단정한 말투로 흘러나온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직원이 멍청히 되물었다.

“……지부장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그걸 알아야만 만날 수 있어?”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허.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른다더니…….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별별 상황을 다 겪어 본 직원은 기죽지 않았다. 그가 가슴을 쭉 펴고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보아하니 용병인 것 같은데, 바쁜 이잔님이 당신 같은 삼류 양아치 용병을 왜 약속도 없이 만나줘야 하는지 이유라도 대 보시오!”

남자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그때였다. 단정해 보이던 눈매가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사, 삼류라고까지 말하지는 말 걸 그랬나? 지금 보니 이류 정도는 되는 것 같기도……. 직원은 저도 모르게 졸아서 어깨를 수그렸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방금 이잔이라고 했어?”

“예? 예에…….”

아니, 녹스 길드 미리암 지부의 지부장이 그 유명한 적패의 용병 ‘이잔’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나? 혹시 용병이 아닌가? 아니면 어디 산속에서 5년쯤 은둔하다가 돌아오기라도 했나…….

그때 눈앞의 남자가 설핏 미소 지었다. 눈매가 누그러들며 인상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보는 익숙한 모양새의 용병패였다. 그러나 색깔과 문양이 이상할 만큼 낯설었다.

붉은색 사자. 직원이 그 의미를 떠올려 내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잔에게 가넷이 무덤에서 뛰쳐나왔다고 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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